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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융한삶 Jun 27. 2024

2015 자전거 국토종주_나흘



여섯 시쯤 일어났다.

샤워 후 뜨끈한 침대에 앉아 다리를 풀었다.


밤에 간간히 악몽을 꿨다.

포기하고 울고 있는 꿈.


기분이 조금 심각해졌다.


컵라면과 냉장고에 있던 캔음료로 아침을 때웠다.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올 예정이었다.






출발하기 전 계획은

2박 3일 완주였다.


2박 3일 동안은 비도 오지 않았고,

후기를 읽어 보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었다.


물론 충분한 스트레칭과 보급,

좋은 자전거와 든든한 체력이 내게 없다는 생각은 못했다.






적응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지만 

안장통은 여전했다.


울고 싶은 고통이었다.


누가 시켜서 시작한 거라면

진작에 안장을 뽑아 던져버렸을 거였다.


벌써 뾰족한 먹구름들이 

스멀스멀 많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무릎의 통증은 아직 늦잠을 자고 있었다.





칠곡보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근처에 식당이 없어 대충 점심을 때웠다.


기어코 한 방울씩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비를 사서 입고 손이 시려워 목장갑도 샀다.


오늘은 숙소를 잡지 않기로 결정했다.

밤을 새서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일 점심쯤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고,


오후 두 세시쯤에는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정을 끝내고 싶었다.






하늘이 본격적으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안경에 비가 맺혔고, 신발과 양말, 가방이 젖어 들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비가 꽤 많이 쏟아졌고,

세 네시쯤 늦은 점심으로 어탕 해장국을 먹었다.


강정 고령보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안난다.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두꺼운 안개 속에서, 자욱한 비 속에서,

에픽하이의 노래 속에서 달렸다.


살아있다는 게 느껴져서 웃음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을 경험했던 것 같다.






다섯 시쯤 달성보에 도착했다.

오늘만 150km 정도를 탔다.


그리고 아직 그 정도가 남아 있었다.


빗줄기는 거세지지도, 약해지지도 않았다.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두워졌지만 라이트가 있었고,

내려서 끌고 가면 안장통이 없으니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달성보 CU 편의점이 보였다.


거지꼴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다리에 감은 붕대까지 젖어 있었다.






편의점에서 일 하시는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이봐요 학생, 자전거 타는 학생이에요?

자전거 타고 가는 거면 내가 숙소 알려줄게요."


경상도 말투가 

저렇게 사근하고 다정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말하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트윅스를 집어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호객행위는 질색이었다.


"괜찮아요. 저 오늘 숙소 안 잡을 거에요."


배려나 걱정을 가장한 위선은

항상 거부감이 들었다.


아주머니는 다시 말을 거셨다.


"자전거 여행객한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 있어요. 내가 알려줄게요.

이리 와 봐요. 무릎도 안 좋고 비도 많이 오는데 그러다 큰일나요."






무료라는 말에 솔깃했다.

시간도 많은데 들어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카운터로 갔다.


"지금 문 닫으려고 했는데,

학생 나를 만난 건 정말 운 좋은 거에요.


이화령 넘어왔죠? 힘들었죠?

다람재, 영아지 고개, 박진 고개. 들어봤어요?


이화령은 비교도 안되게 힘들고 험한 코스에요.

종주 최고 난이도.


근데 밤에 가는 건 말도 안되는 거에요.

내 말 들어요.


내가 알려주는 길로 가면 

싹 우회해서 갈 수 있어요.


내가 알려주는 데서 잠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출발하면 내일 완주할 수 있어요.


아니면 절대 못해요. 사고나요.


지금 출발하면 딱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갈 수 있겠네.

여기 봐봐요. 알려줄게. "






책상 위에는 나 같은 여행객들을 위한 것인지, 

지도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친절하고 상세하게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셨다.


'무심사'라는 곳으로.


여기서 좌회전하고, 어떤 표지판에서 우회전하고,

몇 미터를 가서 어떤 건물이 보이면 어떻게 가라고.


그리고 내일 아침엔 이러이러 해서 가라고.

내일 아침의 우회로까지 모두 알려주셨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표지'였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객기와 오기로 정신 못 차리고

경솔하게 행동하는 나를 도와주려는


무언가의 우연이었다.






원래의 결심이 확고했기 때문에

무시할까도 생각했지만, 곧 이성이 돌아왔다.


젖은 옷 속에서 피로가 느껴졌다.


감사합니다를 열 번도 더하고,

무심사로 향했다.


여행이 끝난 후, 돌아와서 찾아보니

달성보 편의점 아주머니는 자전거 여행객들의 천사로 유명하셨다.


그날 만약 

내가 아주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무모하게 행동했다면 

과연 어떤 경험을 하게 됐을까. 


여러 번 생각해봐도

정말 정말 감사한 일이다.






지독한 길치라, 

지도가 있어도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km의 개념이 아직도 잘 잡히지 않았고,

안경에 자꾸 비가 맺혀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비에 젖을까 투명 비닐에 정성스레 싸주신 지도는

꺼내 볼 때마다 조금씩 비에 젖어 번졌다.


비와 함께 어둠도 내리기 시작했다.


금방 나올 것 같았던 무심사는

한 시간을 갔는데도 찾지 못했다.


길치답게 길을 잘못 들어

논두렁에서 삼십 분을 헤맸고,


으슥한 마을 무덤가에서도 

또 삼십 분을 헤맸다.


정말 무서웠지만

주유소 아저씨의 도움, 택시 기사님의 도움을 받고


무심사에 전화해서 스님과 통화를 하면서

거의 두 시간만에 무심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기했다.


오전 오후 내내 아파서 아껴쓰던 무릎이,


달성보에서 무심사를 찾아가는 동안에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심지어 오르막을 오를 때조차도.





무심사에 도착했다.


비가 그쳤다.


살이 퉁퉁 불어 있었다.


밥을 주셨고, 말을 걸어 주셨다.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따뜻한 방에 누웠다.


그제서야 무릎의 통증이 서서히 번져왔다.

버텨준 무릎에게 고마웠다.


신기하고 감사했다.


내가 만난 모든 멜키세덱에게.





내일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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