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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Apr 01. 2024

[#7. 단상집] 여행한 지 139일째


1
집 나와 캐리어 하나 배낭 하나에 모든 것들 담고 여행한 지 139일. 올해만 해도 1분기를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하루들로 꽉 채웠다.
돌아보면 세계여행이 뭐라고 그냥 여행이 길어진 것뿐이지-싶다가도 지금까지 한 어떤 여행들보다 세상을 넓게 보고 나를 깊게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서 뛰어내리고

온갖 작고 큰 축제들 속에 있어보고

특정 음식의 본고장에서 그 음식을 먹어보고

테마파크의 세계관에 빠져보고

코인 세탁소를 정기적으로 찾아가 돌아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기도 한다. 

가끔은 유쾌하지 않은 일을 겪으면서 여행에 대한 피로도도 꾸준히 쌓고 있다.

왜 한국으로 안 돌아가냐며 입국심사에서 의심받기도 하고

선반에 먼지가 쌓여 있고 거미줄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호스텔에서 어떻게든 몸을 뉘어보고 적응해 본다.

여행만으로도 피곤할 때가 많지만 블로그도 챙기고 뉴스레터도 보내고 사진도 편집하고 기고에 필요한 원고도 쓴다.

다양한 상황을 마주하고 해야 할 것들을 챙기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깨달을 때가 많다. 

코는 둔하면서 향에 크게 위로받고 안정감을 찾는다.

어떤 음식이든 씹는 식감이 확실한 음식을 좋아한다.

아무리 길게 여행해도 계획은 반드시 하는 진정한 계획형 인간이다.

'해결'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위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선으로 표현된 모든 것을 좋아한다. 

이 밖에도 스무 개가량의 나에 대한 정의를 메모장에 정리했다.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여러 나라 그리고 도시들을 끊임없이 다니면서 내가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경계하고 타인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지 알게 됐다. 여행을 지속하다 보면 '한국 사람들은 통일감을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생각될 때가 많다. 3년 전 뉴욕에 갔을 때 잠깐 느꼈지만 뉴욕 외에도 패션, 헤어스타일, 취미, 사랑에 대한 표현, 사랑하는 대상, 하고 싶은 걸 해보는 의지, 궁금한 걸 질문하는 적극성 등에서 한국과는 다른 세상이 많았다. 여행하면 할수록 한국의 정서가 맞지 않아 이민을 결정했다는 사람들의 말들이 이해가 된다. 한국의 통일감이 주는 장점도 있겠지만, 적어도 FM을 고수하던 나는 그걸 넘어서야 더 성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여행 중 알게 된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오롯이 주체적인 삶을 만들어가고 싶다. 그러려면 돈도 열심히 벌고 공부도 해야 하고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겠지만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됐으니 잘 펼쳐낼 수 있지 않을까?

백 년 넘은 성당에서 만난 한국인 신부님의 말씀처럼 긴 시간 혼자 있음으로써 얻는 무언가가 있을 듯하다. 세계여행이 끝나도 삶이 달라지는 건 없다는 어느 세계여행자의 말과 달리, 나는 이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특이점이 되겠구나 짐작하고 있다.


2.

영국 드라마도 영화도 배우도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 런던은 매 순간이 드라마 영화고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배우다. 영국식 발음만 들어도 신사들의 발음이라며 속으로 호들갑을 떤다. 영어를 영국식 발음으로 배워야 하나. 런던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 해리포터까지 정주행 했다(셜록은 보고 싶은데 OTT에서 지원 불가한 지역이란다). 영어 자막뿐인데도 그저 좋다고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런던은 추후에 또 오겠구나 싶다. 

런던은 동네 이름, 역에서는 터지지 않는 데이터, 발음은 다르지만 동일하게 영어를 쓰는 것까지 뉴욕을 참 많이 닮은 도시다. 그래서 적응이 빨랐을까. 여행 중에 이렇게 빨리 일상이었던 것처럼 적응한 도시는 뉴욕 이후 처음이다. 길게 잡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내일이면 떠난다. 적응 속도만큼 금방 익숙하게 느꼈는데 이제 와서 특별한 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런던 브릿지도 올드한 갈색 건물들도 근위병 미키마우스 인형도 아쉽다.


3.

<유퀴즈 - 기안84편>을 보고 기안84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가장 오래 생각한 건 '최선'과 '성실'이었다. 

예전에 유병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글에서도 결이 비슷한 문장이 있었다. 

'성실과 최선. 그 시시한 단어의 놀라운 힘에 대하여'

기안84는 운이라고 언급했지만, 하늘이 일방적으로 주는 행운의 결과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운보다는 기회라고 표현하고 싶다. 유퀴즈에서 정리한 것처럼 평소에 최선을 다해 꾸준히 노력한 사람이라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거다. 사람 또한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방송이었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가끔 생각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꺼내게 됐다.

성실 하나는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나의 장점이라 생각하는데, 최선의 정도는 잘 모르겠다. 여행하는 중에도 블로그를 매일같이 쓰고 뉴스레터도 만들고 글도 쓰는데 이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만들지 않고 있는 영상들. 제목만 써 두고 미뤄둔 글들. 때문에 쌓이기만 하는 재료들. 매일 '하 도저히 그건 못 해'하고 미루다가 지나간 한 달.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기안84가 해온 노력들을 보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일뿐더러 환경 탓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또 막상 호스텔 침대 위에 앉아 몇 시간 동안 키보드를 뚝딱대니 온몸이 다 아픈 것 같아서 못 하겠고. '여행 유튜버들은 몇 년을 여행하면서도 꾸준히 영상을 만들어 올리잖아?' 생각하니 또 인내심과 정신력 부족인 것 같고. 어디까지가 최선을 다한 건지 잘 모르겠다.

기안84편 유튜브 영상 댓글 중 가장 인상 깊고 공감됐던 글


관련 유퀴즈 영상 첨부!

 



*지난 25일 단상집 연재 글을 실수로 연재 카테고리에 넣고 발행하지 않아서 일반 발행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 단상집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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