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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May 26. 2020

스님보다 더 스님 같았던 템플스테이 동창님

화엄사 템플스테이에서 생긴 62살 동창 아저씨

2020년 5월, 전남 구례 화엄사로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다. 1박 2일의 템플스테이 일정은 서울에서 출발하는 것 치고 썩 여유로운 여행 일정은 아닌 듯했지만, 노트북 모니터로 본 구례 사진에 단번에 반해 미룰 수 없었다.

지난 양양 낙산사 템플스테이와는 다르게 화엄사는 정해진 일정이 거의 없었다. 3시에 입소해서 다음 날 12시 퇴소까지 있는 프로그램은 예불과 공양뿐이었다. 사찰 구경도 등산도 예불 참석도 내키는 대로. 그야말로 '휴식'형이었다. 이런 휴식이 평소에 언제 또 있겠냐며 마루에 누워있다가 방 안에서 스트레칭으로 팔다리를 쭉쭉 뻗다가 절을 구석구석 구경하며 푹 쉬었다. 그렇게 묵언수행급으로 조용히 지낸다고 생각할 찰나에 입을 열 일이 생겼는데 나에게 동창이라고 했던 62살 아저씨가 그 이유였다.

아저씨는 나보다 하루 먼저 입소한 분이셨다. 혼자 조용히 방에 짐을 풀고 나오는데 "제가 24시간 선배입니다"라며 우스갯소리를 건넨 분이기도 하다. 

자칭 '24시간 선배'님과는 둘째 날 해가 뜨고 나서야 주제가 명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첫날은 낯을 가렸다). 그 1시간~1시간 반 가량되는 대화가 이번 템플스테이에서 깨달은 전부가 되었고.


"근처에 암자가 있는데 시간 되면 같이 갈래요?"

어차피 할 일도 없는 고요함 그 자체인 일정이라 바로 따라가겠다고 했다. 등산인 줄도 모르고.

암자라고 해도 근처겠거니- 생각했는데 완전 오르막 그 자체였다. 아저씨가 건넨 속임수에 1시간을 헥헥대며 대화도 없이 올라갔다. 아저씨는 출발할 때 "우리는 도 닦으러 온 거니까 대화보다는 자연을 보면서 갑시다"라고 했는데 대화가 애초에 불가능한 루트였다.

그렇게 한 시간동안 도를 닦은 끝에 화엄사보다 더 조용한 암자에 도착했다. 그 분위기를 깨지 않고 조용히 구경하고 돌아갈 때도 조용하려니- 생각했는데 아저씨가 예상을 깨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친구랑 안 오고 혼자 왔어요?"

"음...친구들은 심심할 것 같아서 템플스테이같은 건 안 좋아하더라고요."

"허허. 자연도 보고 얼마나 좋은데. 그래도 혼자 오고 대단하네."

"아 저는 원래 혼자 잘 다녀서요."

혼자 여행하면 항상 누군가 나에게 물어봤던 질문들이었기에 긴 생각없이 대답을 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화의 질문이 깊어졌다. 

"후배는 인생에 무슨 고민이 있어서 왔어요?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아져서요.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잘 안 되고, 미래에 정말 잘 살 수 있을까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미래를 계획하면서 살아요?"

"저는 계획적인 성격인데 친구들 중에는 또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정답은 없는 것이겠지만요." 하니 아저씨는 자기가 정답을 안다면서 허허 웃으며 여유롭게 내리막길을 걸으셨다.

"젊었을 때 미래에 잘 살아보려고 정말 헌신하면서 살았는데, 60년 넘게 살아보니까 현재에 충실하는 게 맞아요.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몸이 많이 망가졌어. 그러니까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너무 계획적으로 살 필요도 없어요."

미국에서 가족들을 위해 일에만 몰두하며 살다가 1년 동안 하고 싶은 것도 실컷 하기 위해 한국에 혼자 왔다는 아저씨는 이제는 무릎이 많이 망가져서 오래 걷지도 못하고 걸음도 많이 느려졌다며 하고싶은 것을 하려고 해도 어렵다고 하셨다. 그 표정에서 포기한듯한 헛헛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읽혔다. 

그러면서 젊었을 때 여행을 많이 다니며 견문을 넓히는 내 모습이 당차고 좋아 보인다고 하셨다.

"젊었을 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다 결국에는 잘 되더라고. 내 주변에 동창님(어느새 나는 아저씨와 동창이 되었다)처럼 살던 사람들은 다 잘 됐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숫자에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 생각과 마음이 따로 노는 28살은 항상 조급했다. 이제는 성과를 내야 하는 때가 아닐까? 왜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 거지. 더 부지런해지고 싶은데 왜 잘 안 되지. 일상 속에서 자꾸만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억울했다. 출근길 지옥 버스 안에서 책을 챙겨 읽고 퇴근 후에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느라 하루종일 모니터를 보는 눈이 시렸다. 주말에는 글과 사진을 편집해 블로그에 예약 발행을 하거나 영상을 편집했다. 그 와중에 틈틈히 여행도 다니고 전시도 챙겨 봤다. 노력한답시고 많은 것들을 벌였는데 여전히 불안하고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다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태한 사람이 될 거라는 마음의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28살 시작부터 몇 달간 겪은 안정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마음을 아저씨는 굳이 구구절절 다 듣지 않아도 이미 잘 아시는 듯했다. 그렇게 느껴지는 딱 적절한 대답이었으니까. 이미 나의 현재를 걸었기에 그런 것일까. 인생선배가 이런 것이구나-싶었다. 굳어져가는 생각에 변수를 주는 사람. 참 멋진 아저씨라는 생각을 하며

화엄사로 복귀했다.


템플스테이 마지막 날 나눈 대화는 구례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시간에도 집에서도 문득 문득 찾아왔다.

62세 선배님은 퇴소 전 마지막 공양 시간에 조용히 말했다.

"동창님은 좋은 사람이니 분명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사람을 구분해낼 눈이 있을 테니 동창님을 알아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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