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4
밤새 비가 내리고 난 뒤,
아침 일찍 일어나 뒷산 숲길을 걸었다.
공기는 눅눅하면서 약간 서늘하고,
몸을 감싸는 안개는 피부보다 마음에 먼저 스며들었다.
뒷산 숲에는 말이 필요 없는 길이 있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 충분한 길이.
산은 그런 곳이다.
나는 이 산길을 그렇게 걸어갔다, 말없이.
바람이 불고 비가 지나간 뒤라서일까,
나무들은 이미 대부분의 말을 끝낸 듯 조용하다.
잎사귀들은 그 말의 마지막 모서리,
바람을 따라 떨어진 문장의 조각들처럼 길 위에 겹겹이 쌓여 있다.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들은
햇살에 투명한 숨을 토하고, 가볍게 바람을 따라 흔들린다.
그 잎들에선
비 맞은 흙냄새와 풀잎 속 물비늘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내 발끝에 밟히는 건
이미 한 생을 다 살고 떨어진 잎들이다.
누군가의 이파리였고,
한 계절을 품었고,
빛을 가졌고,
이제는 짓눌린 채 조용히 향기를 낸다.
나는 그 위를 걸었다.
사박사박...
걸을 때마다 내 발 아래에서 향기가 올라온다.
그 향은 살아 있는 잎들의 풋풋함과는 다르다.
어쩐지 더 깊고, 더 오래 남고, 더 또렷하게 기억을 깨운다.
그 향은 코로만 들어오지 않는다.
몸 안 구석구석,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감각들을 조용히 깨운다.
잎사귀가 밟히는 소리보다 그 모든 냄새가 더 크게 말을 건다
이 모든 잎의 향기들이 나의 뇌 속으로 스며들어 오래된 나의기억을 깨운다.
산의 향기는 살아 있는 것보다 오히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들에서 더 짙게 난다.
그건 어쩌면,
어린 시절 걷던 뒷산의 마른 낙엽들,
가을 운동회가 끝나고 혼자 남은 운동장의 흙먼지 냄새,
누군가의 낡은 가방 속에서 흘러나오던 풀냄새 섞인 종이의 향이다.
오래 묵은 책장을 넘기다 갑자기 피어오르는 기억.
끝내 쓰지 못한 편지를 접으며 입안 가득 차오르던 말들의 냄새다.
잎은 떨어져야 향기가 되고,
짓눌려야 더 멀리 퍼진다.
그리고 떨어진 뒤에야 진짜 자기 이야기를 남긴다.
햇살을 머금고 흔들릴 땐 들리지 않던 고요한 울림이,
흙과 섞이고 짓눌린 뒤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람이 잠시 멈춘다.
그 틈새에 흙속에서 한 겹 더 깊은 향이 올라온다.
가만히 머무는 듯, 그러나 분명히 흘러가는 냄새다.
바람도 없고,
사람도 없고,
다만 짓뭉개진 잎 사이로 내가 지나온 계절만이 숨어 있다.
잊은 줄 알았던 얼굴 하나,
끝내 건네지 못한 인사 하나,
그 모든 것들이 향기로 바뀌어 내 옆을 스친다.
기억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들.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
죽은 것에서 피어나는 생의 잔향들.
그 냄새가 나를 붙잡는다. 그러고는 다시 놓아준다.
산길을 걷는다는 건
살아 있는 것을 지나 죽어 있는 것을 밟고,
그러면서도 둘 다의 숨결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건 생의 끝에서
비로소 향이 되어 남은 것들에게 말을 건네는 시간의 언어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순간을 품고 살아간다.
나는 다시 걸어간다.
산길을 간다, 말없이.
나는
그 향 속에서 가만히, 나 자신을 다시 걷는다.
나는
그 놓아주는 힘에 이끌려 말없이, 산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