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내집마련 디딤돌 대출’로 첫집을 산다. 보통 신혼부부들이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1인가구도 신청은 가능하다. 그러니까, 가능은 하다.
처음에 알아본 건 디딤돌 대출이었다. 그런데 결혼하지 않은 단독 세대주의 경우, 신청가능 조건이 만 30세 이상이었다. 거기에다 부양가족까지 있어야 했다. 부양가족의 조건은 만 60세 이상이다.
나는 만 27살이었다. 만 서른이 되려면 2년이상 더 기다려야 하고, 내가 만 서른이 되어도 부모님은 만 60세가 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갖다대도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럼 안되는 건가?
고민하며 다른 정부대출을 알아보니, ‘보금자리론’이라는 것이 있었다. 금리가 2%로 1%대인 디딤돌 대출에 비해 금리가 높지만 부양가족이나 나이 조건이 없는 ‘주택담보대출’이었다.
금리가 높다 해도 2%는 일반 은행에서 받을 수 있는 주택담보대출이나 신용대출에는 비할 데 없이 낮은 금리다. 게다가 무슨 어플을 다운 받으면 금리를 0.1프로 추가로 깎아준다고 했다. 대출 한도는 아파트의 경우 시세의 70%, 빌라는 65%였다.
온라인에는 공시지가라고 써놓은 것도 있고 시세라고 써놓은 곳도 있는데 ‘시세’가 맞다. 처음에는 공시지가라고 써놓은 글을 보고 겁을 먹었다. 공시지가는 매매가보다 한참 낮기 때문이다. ‘시세’ 역시 실 매매가 보다는 낮다. 하지만 공시지가보다는 훨씬 높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시세는 국민은행의 부동산 어플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고 나와있었다. 당장 그 어플을 깔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어플에 나오는 건 아파트 시세 뿐이었는데 내 예산에 아파트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인터넷 상의 정보와 실제 부딪치는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이 났다.
내 예산에 가능한 빌라는 매매계약서를 쓴 후 은행에 대출 신청을 한 후에야 진짜 시세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매매하기 전에는 정확히 내가 얼마를 대출받을 수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단 내가 가진 돈에 1억 정도 더해서 생각하기로 했다. 2천 정도 유통 가능한 마이너스 통장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대출이 안돼도 8천 정도는 대출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렇게하니 대략 1억 5천이라는 금액이 나왔다.
1억 5천. 그게 서울에서 내가 살 수 있는 집값의 마지노선이었다.
서울에서 1억 5천짜리 집을 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침 저녁으로 네이버 부동산을 열고 ‘낮은 가격순’을 클릭했다. 집이 낡은 거야 고치면 되고, 환기가 잘되는 고층일 것,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일 것, 이 두가지만을 염두에 두고 미친 듯이 싼 집을 찾아다녔다.
가장 먼저 염두에 둔 집은 홍제동 모 중학교 근처의 1억원짜리 빌라였다. 10평에 높은 층이고, 산이 보이는 뷰라고 했다. 독립한 후엔 9평 넘는 곳엔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10평이면 꽤 넓은 평수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산이 보이는 뷰’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1억원이면 대출의 도움을 받는다는 전제 하에 기초 공사부터 인테리어까지 싹 다 갈아엎을 수도 있었다. 내 마음에 쏙 들게 고친 예쁜 집에서 살면 출근도 덜 힘들지 않을까? 나는 부푼 마음으로 그 집을 보러가기로 했다.
설렘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동네에 발을 딛는 순간 집을 보고싶다는 의지는 사라졌다. 다세대 주택으로 가득 찬 동네 전체가 하나의 가파른 언덕이었기 때문이다. 걸어서는 도저히 못다닐 것 같은 비쥬얼이었고, 실제로 틈새 공간에 자동차들이 빼곡이 주차되어있었다. 그 광경에 나는 약간 겁에 질렸다. 너무나 가파른 각도의 언덕에 주차된 차들이 당장이라도 미끄러져 내려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네 자체는 전반적으로 깨끗해 보였기에 희망을 잃지 않고 그 집 앞까지 갔다.
출발할 때의 설렘처럼 마지막 희망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증발했다. 건물 자체가 너무 더러웠다. 똑같은 붉은 벽돌 빌라라도 외벽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이 있고, 반질반질 깨끗한 건물이 있다.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은 그 주변 길에도 쓰레기가 뒹구는 반면, 깨끗한 건물은 그 주변도 말끔히 비질이 되어 있다. 내가 보러간 집은 집도 주변도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건물이었다. 외벽에는 거미줄 같은 것이 군데군데 꼬여있었고, 널어놓은 빨래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유리창들은 하나같이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그래서야 살고 있던 반지하 집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집은 내가 ‘살 수 있는 집’이었으나, ‘살만한 집’도 ‘살고 싶은 집’도 아니었다.
두 번째로 마음에 두었던 집은 북한산 인근에 있는 빌라였다. 올리모델링 되어 하얗고 깨끗한데다 창문을 한가득 채우는 산과 나무들이 환상적이었다. 그런데 집을 보러가기로 약속을 잡고 광고를 다시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대부분의 빌라들은 다 대지지분이 얼마인지 써있는데, 유독 그 집만 대지지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전화해서 물어보니, 대지지분이 없는 집이었다.
아무리 거지같은 집이라해도,
서울에 내집이 생기면 내땅도 한 뼘은 생겨야 한다.
그런데 대지지분이 없는 집이라니? 대지지분이 없어도 나중에 재개발될 경우 아파트 분양권을 받는 경우가 있다지만 나는 그런 머리아픈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 10제곱미터라도 대지지분이 있는 집을 사고 싶었다. 어쩐지, 뷰도 너무 좋고 리모델링도 깨끗하게 되어있는데 가격이 싼 게 이상하다 싶었다.
그 뒤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다섯 가지를 마음에 두고 집을 검색했다.
2층 이상의 지상층
방마다 창문이 있을 것.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창문에서 녹색이 보일 것.
대지지분
청결한 집 주변
이 다섯가지가 모두 충족되는 지금 집을 만난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직방과 네이버 부동산등의 온라인 매물만 주구장창 찾아보던 내게는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부동산에 방문해 소개받은 첫 매물이 바로 이 집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랑 함께 걷다가 아무 기대없이 들어간 지역 부동산이었기에, 인터넷을 몇 주 뒤져도 없던 조건에 맞는 집을 단 한번의 방문으로 얻을 수 있을거란 생각을 전혀 못했다. 주택 매매 경험이 전무하고 쇼핑부터 문화생활까지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는 전형적인 90년대생인 내게는, 스마트폰 검색으로 찾을 수 없는 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달까. 실제로 지금까지 살아온 셋방도 전부 인터넷과 어플에서 찾은 거였다.
우리 집은 네이버 부동산에는 올라오지 않은 매물이었다. 급매 건이었기 때문이다. 왜 급매를 원했는지 정확한 사정은 모른다. 이 집의 전 주인분은 이 동네에서 건물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부동산 부자였다. 그래서 2020년 하반기에 한참 시끄럽던 세금 인상 문제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이 집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거실 큰 창을 가득 채우던 늦가을의 진녹색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채광이 좋아, 불이 꺼진 상태였는데도 집이 눈부시게 환했다. 그리고 방이 세 개나 있었다. 15평이라고 하는데 어릴 때 15평 아파트에서 살아본 경험으로는 그보다 훨씬 넓었다. 어릴 땐 몸도 더 작아서 모든 걸 더 크게 느꼈는데도 그 때 살았던 15평 집보다 이 집이 훨씬 넓어 보였다. 체감상 20평은 되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오래된 빌라의 경우 ‘서비스 면적’이라는 게 있어 실평수가 더 넒을 수 있다고 했다.
세로로 긴 형태의 거실은 좁은 편이었다. 하지만 큰 창문이 있는 거실은, 그 존재만으로도 내게는 감동이었다. 넓은 집에 사는 사람에게는 거실이라기보다는 현관문과 방문들 사이 여유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았지만, 그래도 창가에 2인용 테이블과 의자 2개를 놓을 만한 공간이 나왔고, 싱크대가 긴 거실의 창문 반대편 끝에 붙어 있어 ‘부엌과 합쳐진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방들은 또 얼마나 넓은지. 가장 넓은 방은 퀸사이즈 침대와 옷장, 책상을 놓고 원룸으로 써도 될만큼 넓었고, 작은 방은 책장과 넓은 책상을 놓고 서재를 만들면 딱일 것 같았다. 창고용으로 사용되던 가장 작은 방 조차 싱글침대와 옷장을 놓고 사람을 재워도 될 크기였다. 세탁기를 놓을 수 있는 다용도실이 있다는 것도 감동적이었다.
집을 보러 갔을 때, 전 주인분들은 거실 창에 커다란 장식장을 놓고 그 앞에는 약간의 공간을 두고 티비와 티비장을 놓아둔 상태였다. 게다가 거실 한 가운데는 엄청나게 커다란 가죽 소파를 두고 쓰고 계셨다. 창문의 아름다운 숲 뷰가 많이 가려진 상태였는데도 장애물들 사이로 보이는 창밖의 푸른 잎들이 선명했다. 그리고 거실 한 가득 넘실대는 햇살은 오래된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광경조차 분위기 있는 일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버렸다.
내 집이다.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이 집이 그토록 찾아왔던 ‘내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집은 못 돼도, 내 눈에는 가장 예쁜 집으로 만들어줄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집이 되게 해줄게.
집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마음속으로 집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만 더 흥분했다간 곤도마리에처럼 거실 한가운데 퍼질러 앉아 기도를 할 판이었다.
첫 눈에 반한 사람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건 미친 짓이다. 하지만 10년을 연애하고 결혼해도 이혼하는 사람이 있고, 첫눈에 반해서 결혼해도 평생 사는 사람이 있듯, 집도 마찬가지다. 나는 첫눈에 반한 내 집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바로 다음날 매매계약서에 사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