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집을 꾸미는 일에 집요한 관심을 가져 왔다.
1년 전 일기에서 나는 집을 사게 될 40살의 어느날을 상상하며 이렇게 썼다.
물건이 적기 때문에 10평이 되지 않는 5평에서 7평 정도의 작은 집도 상관없다. 싱글침대 하나, 원목책상 하나, 수납장 한 두 개와 전신거울, 작은 옷장 하나가 예쁘게 들어갈 정도의 집이라면 크기는 상관이 없다. 내가 40살까지 내 고양이 두 마리 중 한 마리라도 장수한다면 옷장이 필요하겠지만, 두 아이 다 무지개 다리를 건넌다면 사실 행거 하나와 수납장 서랍 두세칸이면 내 옷 수납은 충분하다.
내 집 바닥엔 대리석 느낌의 새하얀 폴리싱 타일을 깔 거다. 벽은 하얗게 칠하고, 혼자 사니 현관문은 모두 없애 아치형으로 만든 다음, 기분에 따라 여러 가지 컬러의 쉬폰 커튼을 바꿔 달 생각이다. 벽에는 좋아하는 영화포스터를 표구해서 걸 거다. 지금 사용하는 아름다운 원목 책상이 그때도 멀쩡하다면 계속 쓰고 싶다.
싱크대도 당연히 화이트. 2인용 밥솥과 에어프라이어, 전자렌지, 스메그 스타일의(불법복제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짭이라는 말이다) 작은 냉장고 외에 다른 가전은 두지 않을거다. 싱크대 위엔 상부장을 떼고 원목 선반을 여러개 설치해 찻잎과 조미료를 예쁜 유리병에 담아 보관할 거다. 프라이팬은 지금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때 사게 된다면 원목 손잡이가 달린 예쁜 것을 사야지. 하지만 불 앞에서 직접 요리하면 폐암 발병률이 높아진다 하니 아무래도 에어프라이어를 사용할 것 같다. (물론 이건 요리를 지독히 싫어하는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면죄부일 뿐이다.)
미래의 내 집에서 아직 완벽히 그림을 그려놓지 못한 공간은 화장실이다. 흰색 타일에 수전을 모두 골드로 할까, 블랙에 골드로 할까? 아니, 독특하게 그린이나 블루타일을 깔까?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욕실만은 마흔의 나에게 오롯이 맡겨둘 생각이다.
이 일기를 쓸때까지만 해도 나는, 20대가 채 끝나지 않은 1년 후 어느 날 덜컥 집을 사게 될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듯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과거의 나는 미래에 살고 싶은 집의 인테리어에 대해 꽤 디테일하게 상상한 모양이다. 바닥재는 무엇으로 할지 어떤 가전제품을 쓸지까지 세세하게 정해놓은 걸 보면 말이다. 10년도 더 남은 미래의 화장실 공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앉아있는 꼴을 보니 아주 기가 찬다.
무언가 아주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상상하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시크릿>이나 <해빙> 류의 도서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듯 하다. 완전히 똑같이는 아니어도, ‘언제가 갖게 될 예쁜 집’을 디테일하게 상상한 결과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그런 집을 갖게 됐으니 말이다.
물론 내가 상상한 ‘미래의 예쁜 집’과 현재 집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실제로 사게 된 내집은 내가 상상했던 꿈의 집보다 훨씬 넓고 방이 많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주거 형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터라 원룸, 기껏해야 투룸에 살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다보니 거실이 딸린 방 세 개짜리 집을 갖게 되었다.
넓고 방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300만원이라는 한정된 예산으로 인테리어를 하려니, 집이 넓고 방이 많은 건 엄청난 시련이었다.
원래는 집 전체의 폴리싱 타일 시공과 함께 벽지도 새로 하고, 몰딩도 새로 하고, 화장실 공사도 하고 싶었는데 아무 것도 못했다. 나는 돈을 최대한 절약하기 위해 벽지를 새로 하는 대신 기존 벽지 위에 페인팅을 하고, 화장실은 일단 살다가 여유 자금이 생기면 수리하기로 했다. 소위 ‘갈매기 몰딩’이라 불리는 크고 화려한 크라운 몰딩과 두툼한 걸레받이도 교체하고 싶었는데, 일단 하얗게 칠해서 쓰기로 했다. 여기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요즘은 미니멀한 마이너스 몰딩이 유행인데 내가 원하는 집 스타일이 정말 그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내 인테리어 취향을 분석한 결과, 내가 좋아하는 건 일본식 미니멀도, 한국식 미니멀도, ‘오늘의 집’에 도배된 북유럽 스타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프렌치와 앤틱에 가까웠다. 쉽게 말하면, 공주풍이란 말이다. 허 참, 음악 취향도 옷 스타일도 공주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어째서 이런 취향을 갖게 됐는지.
속설에 따르면 어린 시절 공주 드레스를 많이 못 입어본 애들은 커서 언젠가 그 한풀이를 하게 된다는데 내가 아마 그 케이스인 모양이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 엄마는 젊었을 적 세련된 취향을 추구해서 애기 옷도 시크하게 입혔다고 한다.
다시 몰딩으로 돌아와서, 내 취향에 맞는 프렌치&앤틱 인테리어엔 화려한 갈매기 몰딩과 두툼한 걸레받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굳이 내 취향도 아닌 유행을 따라가고자 안 써도 될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폴리싱 타일 공사와 페인팅만 하기로 했다.
시공업체를 알아보는 건 만만치 않았다. ‘오늘의 집’ 어플에 ‘시공’ 탭이 생겨 견적을 몇 개 의뢰했는데 비용이 적다고 전부 거절당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다른 업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소 천만원 이상의 공사만 취급했고, 그마저 빌라는 공사하기 힘들다고 혀를 내둘렀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아파트 외의 주거 형태를 선택한 사람은 인테리어도 못하나?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듣고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수많은 후기를 찾아보고 수많은 업체에 직접 연락하면서 깨달은 점이 몇 가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테리어에 대해 어떤 결벽증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폴리싱 타일을 한다니 넘어져서 뇌진탕에 걸린다는 말을 하는 업체도 있었다. 연골이 닳는다는 말을 하는 곳도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도저히 모를 일이다. 저녁마다 무릎에서 연골을 빼내 폴리싱 타일에 문지르는 사람들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말을 하는 곳들이 추천하는 바닥재는 주로 장판이었다. 저렴하고 실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찍혀서 몇 년 주기로 교체해야하는 장판 말이다.
사람 얼굴도 완벽한 대칭이 아닌데 사람이 지은 집이 어떻게 완벽히 편편할 수 있을까? 돈을 처발라 벽과 바닥을 완벽히 편편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발상은 얼굴이 완벽한 대칭이 될 때까지 성형수술을 하고 싶다는 욕망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물론 완벽한 대칭 얼굴이라 예쁘고 잘생긴 사람도 있지만, 비대칭이어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도 많다. 집도 마찬가지다.
페인팅이라는 좋은 대안이 있는데 습기에도 약하고 오염도 잘되는 벽지에 집착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기분전환 겸 색을 바꾸기도 쉽지 않고 제거하기도 (끔찍하게X100) 어려운 벽지를 덧방하고 또 덧방해 패스츄리 벽을 만드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안에 곰팡이만 생길뿐 그런다고 단열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인테리어 공사 후기를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답’이라고 여겨지는 인테리어는 지나치게 ‘아이가 있는 3인 이상 가족이 사는 아파트’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엄청난 돈을 들여 편편하게 만든 벽과 바닥에(혹은 신축아파트라 편편할 수도 있겠다.) 실크 벽지와 두툼한 장판을 장착하고, 부엌에는 큼직한 상부장과 식탁만한 조리대를 설치하고, 물건이 많이 들어가는 붙박이장을 여기 저기 설치하는 게 인테리어의 모범 답안인 것 같았다. 물론 실용적이고 장점이 많은 인테리어지만, 나랑은 잘 맞지 않았다.
나는 요리에는 별 관심이 없고, 요리를 한다 해도 나 한 명만 먹이면 끝이다. 거실에서 달리기를 해서 아래층이 식칼을 들고 찾아오게 할 일도 없다.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은 갖고 있지만 생활의 규모가 1인 단위이기 때문에 일반 살림집 기준으론 물건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남녀가 만나 아이 낳고 길러야 한다는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나만을 위한 집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폴리싱 타일을 집 전체에 깔기로 한 거였다. 도저히 폴리싱 타일만 해주겠다는 업체를 찾지 못한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방산시장을 직접 방문해 재료상을 통해 시공자만 고용하는 ‘반셀프’로 공사를 진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