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꿈(1)_알에서 깬 꿈틀이가 공벌레를 만나다

단편소설 <꿈꾸는 꿈틀이>_1

by 시골뜨기

깊고 마른 우물 바닥처럼 빛도 소리도 없다. 적막만 있다. 꼭두새벽에 안개가 슬그머니 다가오듯 꿈틀이의 감각과 의식이 시나브로 움텄다. 긴가민가 꿈꾸는데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는지, 누가 내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리는 퉁소 갈청의 떨림처럼 끊일 듯 말 듯 간들간들 이어졌다.


“너는 흙에서 생겨나서 흙으로 돌아가리라.”

“흙은 생명의 뿌리이며 만물의 자궁이다.”

“땅을 독점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결코 그 대가를 피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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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이는 잠결에 이런 소리를 들으며 그렁저렁 몸이 불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러구러 몸이 커갈수록 의식도 맑아졌다. 몸을 감싼 껍데기는 꿈틀이를 점점 옥죄었다. 사실은 제 몸틀을 찾아가는 꿈틀이가 껍데기를 밀어내는 것이다.


레몬 꼴의 지렁이 알은 처음엔 황백색이었다가 차츰 흑갈색으로 변했다. 꿈틀이는 달포 가량 알로 지내면서 흙으로부터 본능적인 감각과 삶의 앎을 익혔다.


알껍데기는 몸을 지키는 방패다. 추위와 더위, 메마름과 축축함, 병과 충으로부터 피해입지 않도록 보호한다. 반면에 알껍데기는 몸을 가두는 울타리다. 껍데기를 부수지 않으면 내내 알 안에 갇혀있어야 한다. 껍데기가 점차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때, 그때는 알까기 할 때다. 꿈틀이는 알을 깨고 맨몸으로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운 한편 설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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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에서 깬 꿈틀이는 찬찬히 둘레를 둘러봤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흙에 에둘린 곳이다. 꿈틀이는 알맞은 곳에 자기를 낳아 준 엄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땅밖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우며 하루에도 밤낮의 온도차가 있지만 땅속은 한결같다. 꿈틀이는 거기 머물면서 시나브로 자랐다.


땅속엔 지렁이뿐 아니라 톡토기, 응애, 선충과 원생동물들이 많았다. 걔 중에 꿈틀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애벌레가 있어 그 주위를 서성거렸다.


“안녕, 난 지렁이인데 넌 누구니?”

“······.”

애벌레는 아무런 말대꾸 없이 계속 잤다. 머쓱해진 꿈틀이는 안달 나서 다시 물었다.


“잠보야, 도대체 넌 누구니?”

“······.”

그래도 반응 없다. 죽은 것 같으나 분명 살아있다. 꿈틀이는 애벌레의 몸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

“······.”

둘 다 침묵했다. 그러다가 꿈틀이는 되레 자신에게 물었다.


“난 누구지?”

“······.”

애벌레는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난 뭐지!”

꿈틀이는 다시 혼잣말을 했다.

“······.”

애벌레는 역시 묵묵부답이다.


심드렁한 꿈틀이는 언덕을 향했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정신이 혼란스러운데 오싹한 느낌과 함께 꼬리가 물린 것을 깨달았다. 순간 몸을 퍼뜩 움츠렸으나 이미 끄트머리는 잘려 나갔다. 꿈틀이는 이젠 죽었구나 했는데, 다행히도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마침 어떤 인간이 그 옆을 지나갔는데, 인간의 발걸음에 놀란 두더지는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다. 꿈틀이는 일단 그 자리를 떴다. 정신없이 가다보니 어느 빈 곳이 나왔다. 그 공간은 아늑하고 고요했다. 꿈틀이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꿈틀이는 잘려 나간 제 몸을 고즈넉이 바라봤다. 상처 부위에서는 붉은 체액이 나왔다. 좀 지나면 상처는 회복되고 잘린 몸도 다시 생기겠지만, 꿈틀이는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처량하게 여겨져서 슬퍼졌다. 인간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이미 두더지 뱃속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긴 어디지?’

땅속인 건 분명한데 뭔가 다른 분위기다. 귀퉁이에 콩알만 한 쥐색 공이 있기에 살짝 건드려봤다.


“누구야! 내 명상을 방해하는 작자가.”

공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몸을 움츠리고 있는 공벌레 쥐며느리였다. 꿈틀이는 쥐며느리의 퉁명스런 말투에 언짢기도 했지만 처음 누군가를 만난 것이 반가워 말을 걸었다.


“안녕, 난 ‘꿈틀이’라는 지렁이인데 명상을 방해해서 미안해. 실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한데 알려줄 수 있겠니?”

쥐며느리는 꿈틀이를 살짝 귀찮아하면서도 약간은 으스대며 말했다.


“이곳은 ‘창문’이야. 아주 오래된 나무뿌리 밑인데, 이 나무는 세상일을 모두 알고 있지. 그러므로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엿볼 수 있어.”


그곳은 우산살같이 사방팔방으로 퍼진 나무뿌리 틈바구니에 생긴 공처럼 텅 빈 공간이었다. 세 아름 크기의 나무는 수백 년을 그 자리에서 붙박이로 살았지만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해마다 제 몸 안에 적었다.

그 기록은 나이테다. 해마다 둥글게 두 겹 테를 그렸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바깥으로 둥근 테두리를 펴면서 나이테를 늘려갔다.


나이테에는 나무가 몸소 느낀 추위와 더위 등 해마다의 기상, 새들이 나뭇가지에 머물며 조잘댔던 사람들의 살음살이, 떠돌이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흘린 먼 지방의 얘깃거리, 구름에 실려 온 빗물이 줄기를 적시며 묻힌 바다 너머의 딴나라 이야기가 빙글빙글 쟁이었다. 나무의 나이테는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와 같다.


“근데 왜 움츠리고 있지?”

쥐며느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쭐대며 대답했다.


“언젠가 돌 밑에 있었는데 인간이라는 커다란 동물이 돌을 드러내고 날 발견했지. 난 달아나려고 했으나 인간의 손아귀를 벗어나기엔 너무 느려 잡힐 지경에 이르렀어. 인간이 날 잡으려는 순간 너무 무서워 몸을 힘껏 움츠렸어. 그랬더니 이렇게 몸이 공처럼 둥글게 되어 언덕 아래로 떼굴떼굴 굴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어.”

쥐며느리는 흥분에 겨워 들뜬 맘을 어찌할 줄 몰라했다. 싸움에서 이긴 무용담도 아니고 겨우 제 몸을 피한 요령이지만 쥐며느리의 자랑은 대단했다.


“꿈틀아. 너도 나처럼 몸을 둥글게 할 수 있니?”

쥐며느리는 보란 듯이 뻐기며 꿈틀이에게 물었다.


“아니.”

꿈틀이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자신 없게 대답했다.


“그럼, 넌 나보다 열등한 동물임에 틀림없어”

“왜?”


“넌 몸을 둥글게 할 수 없고, 난 할 수 있으니까.”

의기양양한 쥐며느리의 말에 꿈틀이는 기죽었다. 상대는 할 수 있는데 자신은 할 수 없다. 주눅 든 꿈틀이는 다소곳이 쥐며느리에게 물었다.

799px-Armadillidium_vulgare_000.jpg 쥐며느리


“그런데 몸을 둥글게 하는 것은 왜 좋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지. 음, 하여튼 난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고 넌 못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너 보다 더 우월한 동물이야. 그렇지. 그럼. 우월하고말고.”


꿈틀이는 생각했다. 자신도 쥐며느리처럼 몸을 둥글게 할 수 있었다면 두더지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쥐며느리야, 넌 뭘 먹고 사니? 먹이를 찾으려면 몸을 펴고 움직여야 할 텐데?”


꿈틀이는 궁금한 게 많았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알수록 궁금증은 더 커졌다. 누구를 만나든지 이것저것 묻고 싶었기에 젠체하는 쥐며느리가 꼴불견이긴 해도 물었다.


“전에는 너처럼 낙엽 부스러기를 먹고 흙을 뒤지면서 곤충의 사체를 먹었었지. 그러나 지금은 그따위엔 관심 없어. 내 몸이 둥근 공이 된 것을 체험한 후부터는 내 몸이 지구처럼 동그란 세상을 품은 우주라는 것을 깨달았지. 난 보다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아. 그래서 명상하며 내가 터득한 이 비법을 연구하고 있지.”

혼자서 신나게 떠들던 쥐며느리는 꿈틀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끌끌거리며 덧붙였다.


“흙만 먹고사는 너같은 무지렁이가 어찌 내 뜻을 알겠니.”

그러더니 꿈틀이 보란 듯이 몸을 더욱 움츠렸다. 그러나 힘이 없어 보였다. 꿈틀이는 쥐며느리가 잘나 보였지만 왠지 짜증났다. 몸을 둥글게 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외부와 담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느낌이 들었다.


머쓱해진 꿈틀이는 ‘창문’에서 상처가 회복되길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 상처가 아물자 꿈틀이는 태어난 곳으로 다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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