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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신 다음 날

by 라프

2012년 초 겨울


변기를 부여잡고 위액을 쏟아낸다. 이런 아침을 맞이한 게 얼마만인지... 아침 내내 술이 깨지 않는다. 책 선물을 받으러 갔다가 셋이 와인을 5병 넘게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 집으로 오는 길에 다 쏟아버렸다.


멍하니 술이 덜 깬 채로 출근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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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은 꼭 버스에 사람이 꽉 차서 앉을자리가 없다. 혹시나 일찍 내릴까 서 있으면 내 앞에 앉은 사람은 꼭 나와 같은 정류장에 내리거나 더 멀리 간다. 비몽사몽 간에 사무실에 도착해 임원을(공기업에서 임원 비서로 일할 때다) 맞이할 준비를 하고 책상에 앉았다. 그런데 구역질이 난다. 화장실로 달려갔으나 아침에 먹은 게 없어서 노란 위액만 쏟아냈다. 그렇게 두세 번 화장실을 갔다 오니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진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부사장님 비서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탕비실에 가서 잠을 좀 자라고 한다.


탕비실로 달려가 소파에 쭈그려 앉아 잠을 청한다. 하지만 오늘따라 전화는 또 왜 그리 많이 오는지, 쉴 수가 없다. 결국엔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점심시간에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었더니 술이 조금 깨는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사장님 덕분에 얻어먹게 된 햄버거로 2차 해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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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비실에 푹신한 돗자리를 깔아 놓고, 불을 끈 뒤 잠을 청한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회사 동료가 나를 깨운다. 밥 먹고 잠도 잤더니 다행히 심신이 개운하다.


가끔 이렇게 술이 술을 마시게 할 정도로 엄청나게 폭음을 할 때가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렇게 마시게 만드는 멤버들이 있을 뿐. 하지만 매번 폭음한 다음 날은 숙취에 괴로워하며 ‘술을 끊어야 하나?’라고 아주 잠깐 진지하게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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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도 잠시, 컨디션을 회복하면 괴로움은 까맣게 잊고 또 내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다. 이렇게 단순하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는 강력한 지우개가 들어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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