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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by 라프

지난주도 가족 통화를 했다. 통화가 끝나기 전, 오후에 여동생과 남동생이 따로 통화했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잠깐 있었다. 조카들이 나중에 식당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것이 여동생의 질문이었다.


두 살 터울이라 대학생활을 같이 보냈던 시절, 나는 비교적 편하게 수학 과외와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했던 반면, 여동생은 한여름 뜨거운 주유소에서 와이퍼를 팔거나 방송국 방청객 아르바이트 등을 했다.


"나는 기왕이면 아이들이 일부러 힘든 일을 찾아서 하지 않고, 조금 편하게 자기 하고 싶은 일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지."


돈이 없어서 힘들었던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대학원 시절을 떠올리며 우리 조카들만은 본인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여동생의 질문에 남동생은 아이들과 와이프가 있던 방에서 나와 거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남동생의 답은 "그래, 웨이트리스,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을 이어갔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남동생은 그 말을 할 때 왜 방에서 나왔을까? 남동생의 와이프, 즉 올케는 레스토랑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아마도 그 말을 하는 순간 아내를 의식해서 나온 건 아닐까? 나 혼자 추측해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식당에서, 카페에서 일하는 게 나쁜 건가?'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 후기부터 중국에서 전래된 유교로 인해 직업의 귀천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깔려 있는 것 같다. 사농공상이란 말은 봉건시대에 직업의 귀천을 논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선비(학자) 아래에 농부, 그 아래 수공업자와 상인이라는 말로 봉건시대의 계급 관념을 순서대로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와 달리 양반, 평민, 노비의 관념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직업의 귀천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택배 혹은 배달 노동자를 향해 어떤 이가 자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례들을 종종 미디어나 SNS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말이다.


"너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


물론 나도 이 생각에서 절대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가족 통화를 한 뒤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으로 살아오진 않았나.


"무언가, 남부럽지 않은, 무언가가 되어야만 해."


하고 말이다. 예전에 구본형 작가님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홍대에 '크리에이티브 살롱 9'를 오픈할 때였다. 당시 신촌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는 '일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괜찮았는데 카페에서 '일'을 하겠다고 하니 엄마가 내게 엄청나게 화를 내며 말했었다.


"내가 너 커피나 팔라고 대학 공부까지 시킨 줄 알아?"


하지만 엄마가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된 데는 부잣집에 시집와 물질 만능주의를 신봉하는 가족들이나 아빠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아빠는 첫째인 내가 태어나자마자 사고로 뇌를 다쳤다. 그리고 몇 년간 식물인간처럼 있었다. 깨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기적처럼 깨어났다. 하지만 사고로 인한 뇌손상은 아빠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평생 거의 백수처럼 살다 간 아빠였다. 그런 아빠와 한 가족을 이루며 살며 주변의 곱지 않은, 무시하는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엄마였기에 자식들만큼은 누구에게든 자랑하고 싶은(아빠가 하지 못했던 것을 자식들을 통해 보상받고 싶은), 얘기만 하면 부러워할 만한 그런 일을 했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첫 직장을 글로벌 기업인 '푸르덴셜 생명'에 다닐 때 엄마는 좋아했고, 그만둔다고 했을 때 많이 아쉬워했다. 그러니 나도 그동안 엄마처럼 남들이 들으면 '우와~' 하고 부러워할 만한, 혹은 대단하다 여길 만한 그런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어떤 일을 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하는 일을 어떤 태도로 해내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어느 새벽 호텔에 나이 든 노부부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날따라 만실이었다. 방이 없다고 했지만 갈 곳이 없어 난감해하던 노부부에게 호텔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 방에서 주무시고 가시는 건 어떠세요? 저는 어차피 근무를 하고 있어서요."


노부부는 호텔 직원에게 정말 감사해했고 다음 날 호텔을 떠났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때의 노부부가 호텔 직원을 찾아와 말했다.


"잠시 우리와 함께 가주지 않으시렵니까?"


노부부가 호텔 직원을 데리고 간 곳은 엄청난 규모의 호텔이었다. 노부부가 바로 그 호텔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호텔 직원에게 제안했다.


"이 호텔의 총지배인이 되어 주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내가 찾고 있었던 대단한 일,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이나 성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 나의 일상 속에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동화 『파랑새』에서 가난한 남매 틸틸과 미틸은 크리스마스 전야에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꾼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 자신들이 기르던 비둘기가 바로 그 파랑새였음을 깨닫게 된다.


나 역시 그동안, 그리고 지금도 눈앞에 있는 나의 파랑새를 계속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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