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1. 일요일, 상봉역 도보 10분 동네에 갔다.
회기에서 중랑천만 건너면 금방인 상봉. 역 근처 사거리 큰길 가전제품 매장 앞에서 부동산 아저씨의 차를 기다렸다. 가끔 와본 적 있지만 큰길이 정말 큰길이다. 상봉이 이렇게 큰 동네였구나. 상봉은 서울에서 강원으로 나가는 기점에 있는 지역이다. 상봉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강원 충북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탈 수 있고, 상봉 다음역인 망우는 1940년 일제강점기부터 역이 개통되어 *60~80년 산업화시기에*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을 강원도로 실어 나른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상봉역 또한 1996년 7호선 개통 후 2010년 경의중앙선과 경춘선, 2018년 평창올림픽 때 강릉선 기차역도 개설되면서 총 네 라인이 운행하는 대규모 환승역이 되었다.
출구가 워낙 많으니 역세권이 크다. 역과 역 사이 소외되었던 지역에도 새롭게 주택단지와 상권이 형성되는 모양이다. 저 멀리 망우역 앞의 48층의 초고층 아파트를 병풍 삼아 이쪽 대로변에도 2~4층의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15~20층의 오피스텔이 들어서고 있다. 주택이 많으면 먹자골목 또한 알차기 마련. 리모델링한 깔끔한 상가에 스타벅스나 투썸 같은 통유리 카페와 힙한 안주를 파는 식당이 줄지어 있다. 주말 거리에는 꾸안꾸 원마일 패션을 걸친 젊은이들이 이른 오후부터 노상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2. 상가대로 안 쪽은 신축빌라들로 꽉 차 있다.
부동산 아저씨는 한 동네 골목에 차를 댔다. 고만고만하게 생긴 신축빌라 사이로 특이한 계단이 툭 튀어나왔다. 바로 저 집이란다. 오래된 3층 주택에 2층 집 하나가 전세 4500에 나왔다고 했다. 층마다 두 집뿐인 아담한 주택. 옆집하고 현관문 두 개가 사이좋게 딱 붙어있는 집. 대학생이 전세로 들어와 무슨 사정으로 만기를 한참 남겨두고 도중에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고 들었다. 엄마가 다른 집을 구해줬다고. 그래. 집에 돈이 많으면 그렇게도 할 수 있지. 어쨌든 그래서 전주인이 이 집에 올 때 산 새 가전제품 일체를 100만 원에 사는 조건이 딸려왔다. 어차피 투룸이란 옵션이 없으니 나도 전부 사긴 사야 한다.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벽걸이 에어컨, 책상, 의자, 서랍 등 중고로 사도 어차피 그 정도 돈은 들 것이다.
3. 발매트만 한 현관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작은 거실 겸 주방. 왼쪽에 작은 방, 오른쪽에 큰 방
오른쪽 방문 옆에 바로 화장실 문이 붙어있다. 옛날 집들은 특이하게 화장실 문턱이 높더라. 보통은 물 튀지 말라고 그런 거지만 여기는 화장실 바닥도 그대로 한 뼘이 높다. (**왜 그런 거지?**) 세면대는 없어서 간이 세면대를 설치하던가 아니면 쪼그려 앉아서 세수해야 한다. 엄지손가락만 한 터키색 타일을 빽빽하게 바른 화장실엔 창문이 없어서 들어가 문을 닫으면 SF영화 속 우주선처럼 무중력 상태의 큐브에 갇힌 듯했다. 신비한 이 화장실을 환기시키려면 화장실 문을 열고 현관문도 밖으로 조금 열어놔야 할 것 같다.
4. 왼쪽의 작은 방은 길 쪽으로 창문이 나 있다.
나무 창문틀이 덜컹거려서 겨울엔 문풍지를 붙이고 암막커튼을 달아야 추운 바람을 막겠다 싶었다. 이 좁은 골목 동네에 운 좋게도 마주 보는 집이 없다. 풍경을 반쯤 가리는 회색 벽 위엔 주차장이 있어서 빌라 단지가 각도를 비틀어 멀찍이 흩어져 있으니 마음 놓고 창문을 열어도 된다. 4층 5층 빌라가 겹겹이 쌓인 소실점 끝에 조막만 한 하늘이 보였다. 이 창문 앞에 책상을 놓으면 작업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 좋다.
지금 세입자는 이 작은 방을 짐방으로 쓴 듯하다. 거실 겸 주방이 세탁기와 싱크대만으로 꽉 차서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는 작은 방에 놨다. 이들이 벽을 건너 싱크대와 일렬로 이어진다. 방 안쪽엔 옷가지와 트렁크가 잔뜩 있다. 지금 4월인데 행거에 두툼한 겨울옷뿐인 걸 봐서 겨울이 끝나고 한 번 다녀갔으니 한동안 또 안 오겠지.
5. 옆에 큰 방.
안방 격인 이 방은 싱글 침대와 책상 사이에 이부자리를 또 펼 수 있는 넉넉한 크기다. 그런데 큰 창문이 있는데도 방이 새까맣게 어두웠다. 창문 옆의 웬 검정 문짝을 열어보니 거기는 보일러실 겸 창고였다. 그곳의 창문을 열어야 밖인데 1.5미터 코 앞에 옆 건물이 딱 붙어 있었다. 내 집과 옆집 사이의 쿠션 같은 이 공간이 베란다가 아니라 보일러실이어서 방의 창문은 어차피 열 수 없어 갇힌 방이 되었다. 환기도 안되고, 옆 건물이 딱 붙어 있어서 비집고 들어올 채광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창문을 내지를 말지, 기대나 안 하게…
역과 가까운 깔끔한 동네. 다닥다닥 붙지 않고 트여있는 골목. 이 집이야 오래됐지만 주변이 다 신축이다 보니 동네는 물론 골목길까지 깔끔히 정돈되어 있다. 무엇보다 전세 4500에 투룸이라니. 지금 내 원룸 전세랑 똑같은 금액인데 투룸이 라니. 전세 대출을 더 내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연장해서 같은 가격에 집만 넓어지는 좋은 조건이었다. 심지어 관리비도 없어서 매달 5만 원, 2년이면 120만 원도 아낄 수 있다.
그런데 아침햇살에 눈 뜨고 싶은 로망. 창문 없는 큰 방이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게 망설여졌다. 2년 동안 방범창이 햇살을 다 가리는 방에 살며 햇살이 늘 그리웠다. 그럼 창문 있는 작은방을 작업실 겸 침실로 쓰면 될 거 아냐? 하지만 어두운 큰방에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큰 방을 짐방으로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망설여져서 부동산 아저씨께 일단은 다른 집도 보러 가자고 하며 나왔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서는 다음날 일요일 내내 마음에 조급함이 올라왔다. 내가 너무 딱! 맞는 것을 바라나? 적당한 것에서 골라야 하지 않을까? 며칠 사이에 금방 나가면 어떡하지, 그 가격에 그런 집은 또 찾기 어려울 텐데. 그러나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난 그런 집을 찾게 될 것이다. 모든 게 완벽한 집은 어차피 1억으로 구할 수 없으니 바라지 않는다. 나에게 딱 맞는. 딱 맞는 그런 집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