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집에 돌아와서는 나는 민정이가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샹송을 들으며 잠을 청했다. 한 때 민정이가 많이 들었던 Florina의 ‘Va va vis’. 민정이 대신 나라도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같이 듣던 추억을 붙잡아 둘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를 몰라 그저 옹앙 옹앙 거리는 말들이 왜인지 로맨틱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가사의 번역본을 찾아봤다.
Va, va vis, va, va mon ami
가, 어서 가, 그리고 살아, 나의 친구
N’oublie pas de sourire en chemin
가는 길에 미소 짓는 것을 잊지 마.
Va, va vis, va, va mon ami
가, 어서 가, 그리고 살아, 나의 친구
Et le destin pourrait bien changer d’avis
운명은 때때로 그 마음을 바꾸기도 하니까.
Certains voudraient l’echaner contre la tienne
어떤 이들은 너의 인생을 부러워하지
Sans savoir que chaque espoir traine sa peine
모든 희망은 그 슬픔까지 가져온다는 걸 모르는 채
*
아직 일주일에 한 번은 심리치료를 받으러 다닌다. 계속 수면치료를 병행 중인데, 이상하게 악몽은 더 심해진 것 같다.
“선생님 저 악몽을 계속 꿔요.”
“음 그래요?”
“악몽을 꾸는 건 치료가 안 되나요?”
“꿈은 심리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이야. 치료하는 과정에서 뭔가 스트레스가 있나 보구나. 최근에 뭐 특별히 스트레스받는 일 있니?”
“글쎄요.”
“그럼 오늘은 바로 수면치료를 해볼까?”
“... 저기 선생님, 오늘 수면치료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그냥 상담하고 약만 받아가고 싶은데.”
“아직 기억이 완벽히 안 돌아왔잖아.”
“기억을 꼭 되돌려야 한다고 하셨죠?”
“그래. 그래야 완치가 되지. 그리고 수면 치료하면서 돌아온 기억도 있고. 효과가 좀 있었잖니?”
“네... 그런데 수면치료 한 날은 뭔가 몽롱하고 이상해서요. 받고 나면 시간이 엉킨 느낌이랄까.”
“잘 되고 있는 거야. 지난번 민정이 집에 놀러 갔던 걸 얘기했었지?”
“네.”
“그래. 그럼 그 전이든 후든 또 민정이 집에 놀러 간 날을 떠올리려고 해 봐.”
- 따라라란 따라란 따라리리딴다단 -
사실 민정이 집에 처음 놀러 간 날은 대부분 기억이 났지만 그걸 말할 새도 없이 선생님은 종소리를 들려주며 최면을 시작했고, 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취해 쉽게 잠에 빠져버렸다. 간혹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지고 대신 꿈에 나타난 민정이의 목소리가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목소리만 들리더니 어느새 민정이가 옆에 와 있었다.
“소연아.”
“응?”
“담배 있어?”
“웬일? 나 이제 끊어서 없는데.”
“나한테 가르쳐 줘 놓고, 네가 끊어 버리면 난 어떻게.”
“뭐야... 너 이제 안 핀다며. 그리고 네가 가르쳐 줬지 내가 가르쳐 줬냐?”
“내가 가르쳐 줬다고?”
“그래”
“언제?”
“그 날. 기억 안 나?”
“그 날이 무슨 날인데?”
“와. 진짜 기억 못 하나 보네.”
“응. 요새 기억력이 안 좋아지는 거 같아. 기억이 잘 안나. 네가 말해 줄래?”
“바보야. 너희 집에 처음 놀러 간 날!”
“아? 그랬나? 네가 우리 집에 왔었나?”
“야, 너 왜 이래 진짜. 너네 집에 자주 갔었지!”
“그랬지... 언제 처음 왔었지?”
“아! 작년 가을에!”
“작년 가을? 확실해?”
“그래. 너 좋아하는 하늘색 잠옷 입었었어.”
“아. 맞다 맞다. 그 날 우리 엄마, 아빠 없었지?”
“응. 너희 엄마 아빠 계실 때 네가 날 초대했냐?”
“하긴. 근데 그때 내가 왜 담배를 가르쳐 줬더라?”
“뭘 왜야. 자연스럽게... 그냥 얘기하다가 펴보라고 줬지.”
“내가 왜 그랬을까. 민정이는 그럴 애 아닌데.”
“큭큭. 너 지금 3인칭 쓰냐? 안 귀여워. 징그러.”
“아, 미안 미안. 그 날 우리가 또 뭐했지?”
“그냥 수다 떨고, 마카롱 먹고. 노래 듣고.”
“우리 집에 또 놀러 올래?”
“좋아.”
“알았어. 그럼 우리 엄마 아빠 여행 가면 또 말해 줄게.”
“근데... 아, 아니다.”
“왜? 뭔데?”
“너희 아빠... 아직도...”
“응? 우리 아빠가 뭐?”
“아니... 너네 엄마 아빠 안 계시는 날이... 아빠가 그 여자랑... 그래서 집이 빈다고...”
“...”
“미안.”
“...”
“미안해. 상처 주려던 말은 아니었어.”
“... 알고 있...”
“야, 너 울어? 아... 어떡해. 미안하다 괜히 말 꺼내서..”
“... 알고 있었네. ...이가...”
“뭐? 나, 나야 네가 말해줬으니까... 아씨 다른 얘기 해.”
*
종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는데 이상하게 또 나는 내 방 침대 위였다. 여전히 꿈속 같은 몽롱한 기분으로.
엄마에게 물어보니 병원에서 내가 엄청난 두통을 호소했다고 엄마가 병원으로 날 데리러 왔다고 했다. 엄마는 이렇게 힘들 거면 당분간 치료를 하지 말자고 했다.
“응? 소연아, 당분간 치료하지 말고 그냥 쉬는 게 어때?”
“그래 볼까?”
“그래. 좀 쉬어. 엄마 기분도 좀 이상하고.”
“왜?”
“아니... 네가 요즘 요일을 자꾸 헷갈려하고, 병원만 갔다 오면 머리 아프다는 얘길 자주 하네.”
“그런가?”
“응. 이제 학교는 잘 다닐 수 있잖아. 잠시 쉬었다가 또 네가 꼭 기억을 찾고 싶어 지면 다시 병원 가자. 병원 좀 쉰다고 이제 일상생활에 무리는 없잖아.”
“응. 그렇긴 하지. 근데 선생님이 기억을 이번에 또 못 찾으면 다시 또 여러 가지 공황장애 등이 겹쳐 올 수 있다고...”
“그래. 선생님 말씀도 맞겠지. 그래도 잠시 쉴 수 있는 거야. 네 컨디션에 맞게 치료해야지.”
“응.. 알았어. 고민해볼게. 엄마 근데 나 또 뭐 이상한 거 없었어?”
“뭐 어떤?”
“엄마가 내가 요일을 자꾸 헷갈려한다고 했잖아.”
“응 그러더라고... 음 그리고 너 스트레스받을까 봐 말은 안 했는데, 네가 병원을 갔다 온 날 학교 갔다 온 거처럼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민정이가 뭐랬고 하면서, 학교 얘길 그렇게 해. 그리고 저번에 선하가 전화왔을 때 학교에서도 네가... 그... 환청을 듣는 거 같다고...”
“... 나 병원 토요일에 가지?”
“응. 주말에만 가지 가끔 일요일에도 가고.”
“알았어 엄마 나 병원 잠시 쉴까 봐. 너무 피곤한가 봐 요즘.”
“응 엄마가 말해둘게.”
뭔가 최근 나의 시간 감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엄마의 말을 들으니 더욱 안정이 필요할 거 같다.
그래. 치료를 하려다 병을 얻어서는 안 되지.
내 주변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할 수는 없다. 민정이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나보다 더 이상한 민정이를 나 외엔 아무도 이상하다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
밤에 수면제를 끊어서 인지 다음날 학교에서 웬일로 자지 않고 수업을 들었다. 어김없이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3반 앞으로 갔는데 민정이가 아닌 선하가 헐레벌떡 뛰어와 나를 불러 세웠다.
“소연아!”
“응 안녕 선하야.”
“소연아, 나랑 매점 가자.”
“그래. 그럼 민정이도 같...”
“그냥! 그냥 나랑 만 가. 할 말도 있고.”
내 말까지 끊으며 뭔가 작정한 것 같은 선하의 표정에 압도당해 나는 매점으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우린 매점에 도착했고 초콜릿 과자와 바나나우유를 두 개씩 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수업 종이 울리는 것 같았지만 선하는 종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선하가 사준 초콜릿 과자를 까먹으며 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사온 간식을 먹지도 않고 땅만 보던 선하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가 걱정돼.”
“왜 뭐가? 에이~ 나 걱정하지 말래도.”
“근데 왜 하나도 안 좋아져? 계속 안 좋아지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응? 뭐가?”
“네 상태가!”
“내 상태가?”
“미, 민정이를 왜 찾아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소연아. 중학교 때 네가 나 도와준 것처럼 나도 너 도와줄게. 다른 애들이 무섭다고 이상하다고 다 피해도 난 니 옆에 있어 줄게 소연아.”
“... 무슨... 내가 왜 무서워. 요샌 나 싸움도 안 하고 조용히 지내는데, 내가 왜 무서워.”
“네가 자꾸 이상하게 굴잖아!”
“어휴. 소리 좀 그만 질러. 너 질투하냐? 내가 너 보다 민정이 더 좋아하고 자주 보면 질투나?”
화가 나 소리치던 선하는 내 말을 듣더니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너무 정곡을 찔렀나.
“미안. 진짜 미안. 너무 미안해서 밤에 잠도 안 와.”
선하가 대뜸 사과를 한다. 대체 또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선하는 갑자기 또 울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울음이 많아진 거야 얘는...
“박선하, 왜 그러는데? 너 뭐 나한테 말 못 할 짓 했어?”
“응 했어. 못할 짓. 나 질투했어. 근데 과거형이야 소연아. 질투했었다고.”
“... 미안한데 너 지금 이러는 것도 질투처럼 보여.”
“아니야.”
“그럼 뭔데? 아니, 아니다. 너 말 못 할 짓 했다는 건 뭔데? 과거형이 뭔데?”
“그래. 말할게. 네가 다시는 나를 안 본다 해도 말할게. 무릎 꿇고 빌라면 빌게. 그러니까 제발 유민정 좀 그만 찾아! 정신 좀 차려!!!”
“하... 왜 그러는데!!! 왜 네가 민정이 못 보게 하려고 안달이냐고! 민정이 요즘 힘들어! 아무도 모르잖아 그건. 나만 알잖아!”
“흐흑... 흑흑. 소연아 내가... 내가 잘 못 했어. 후회했고 후회하고 있어. 미친 듯이 후회 중이야. 그러니깐 제발 이제 민정이 좀 찾지 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민정이를 만나지 말라는 거야.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언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
화가 나서 옥상 문을 열고 내려가려는데 선하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말았다.
“유민정 죽었잖아!!!”
온몸이 얼었다.
순식간에 얼어버린 몸을 억지로 돌려 선하를 바라보았다. 선하는 바닥에 철퍼덕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박선하. 일어나. 장난도 정도껏 쳐. 장난도 정도껏...
지난주 금요일에도 목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민정이를 봤는데 무슨 말이야... 왜 울고 있어 박선하. 왜 울어? 진짜야? 너의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진짜라고? 그럼 나는? 내가 본 건 뭔데? 너무 생생하게 민정이었어. 조금 이상했지만 민정이었는데...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조금 이상했지만...
옥상에 올라와있던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우릴 쳐다보고 있었고 이번엔 나를 향해 애써 웃어주지 않았다. 그들의 연습에서는 이런 상황이 없는 듯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들이 내 눈앞을 둥둥 떠다녔다.
이건 선하의 장난도, 나를 향한 몰래카메라도 아니다. 진짜다.
없다.
유민정이 진짜 없다.
*
생각해보면 민정이는 죽고 싶다는 말을 참 많이 했다. 내가 그 말을 멍청하게 못 알아 들었을 뿐. 너무 예쁘게 말해서 날 감쪽같이 속였거나.
바다 위에 누워 파도처럼 부서지고 싶다고 했고,
하늘로 날아가 구름이 되고 싶다고 했고,
무색무취의 바람이 되어 멀리 떠나고 싶다고 했다.
그냥 난 그게 시적인 표현인 줄 알았다. 시인 같이 멋지다고만 생각했다. 멍청하게.
그건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외로움이라 여겼다. 그래서 이기적으로 민정이의 센치함을 즐겼다. 힙하다고, 멋지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게 소리치는 건 줄도 모르고,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건지도 모르고...
선하의 말을 듣고 나서 난 또 일주일 동안 밖을 나가지 못했다. 학교도 병원도 가지 못했다. 하루는 내내 눈물만 흘렸고 이틀은 잘 먹지도 못했다. 그렇게 유령처럼 방구석에 처박혀 울다, 멍 때리다 다시 울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니 머리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옛날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굳이 병원을 가지 않아도, 약을 먹지 않아도 전부 기억나기 시작했다.
내가 자해를 한 게 민정이 때문이었구나. 아니 민정이를 잃은 나 때문이었구나. 민정이를 구해주지 못한 나 자신이 미웠구나. 혐오스러웠구나. 오빠도 민정이도 어떤 누구도 구할 수 없었던 내가 나는 그렇게 싫었구나.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절로 이해가 되었다. 이런 내가 지금도 너무나 싫었으므로. 다시 세상이 너무나 싫었으므로.
포스터가 들어있던 상자를 열어 민정이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어린 민정이는 행복해 보였다. 엄마 아빠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안녕 민정아? 안녕 내 친구야?
지금은 어디 있니? 네가 있는 곳은 편안하니?
혹시 우리 오빠는 만났어? 오빠는 그곳에서 너와 동갑일 테니 만나면 서로 친구 하면 되겠다. 나 대신 네 이야기를 많이 들어줄 사람일 거야. 분명 그럴 사람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