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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Dec 05. 2018

그날 이후 아빠는 출근하지 않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Default>

영화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1997년,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매일 출근하시던 아빠가 어느 날부터인가 집에만 계셨다. 가정주부였던 엄마는 새벽에 아침상을 차려놓으시고 저녁 늦게까지 들어오시지 않았다. 아빠가 술에 취한 모습은 일상이 되었고, 엄마는 돈 얘기를 자주 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돈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해버렸다.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나눠준 급식비 통지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에 왔다. 전날에도 엄마가 ‘돈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돈이 없다’라는 말을 초등학생도 뼈저리게 느끼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IMF 구제 금융 사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IMF 구제 금융 사태가 발생하기 일주일 전 상황을 그린다. 그해 12월 3일 대한민국은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면서 경제 주권을 넘겨줬다. 영화는 ‘헬조선’의 시작을 탐구한다. 그날 이후 건물주는 온 국민의 꿈이 되었고, 청년들은 공무원을 최고의 직업으로 꼽기 시작했으며, 모든 분야에서 서로를 갉아먹는 지독한 경쟁사회로 돌입하게 된다. 김혜수, 허준호, 유아인은 예견된 비극 앞에서 세 부류의 국민들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분했다. 영화는 이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는지 조명하며 마치 재난영화와 같은 전개를 보여준다.
1997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은 곧 엄청난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을 예견하고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한 비공개 대책팀에 합류한다. 대응 방식에 대해 재정국 차관(조우진)과 부딪히던 한시현은 IMF 총재(뱅상 카셀)가 협상을 위해 입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국가 부도를 예측한 금융맨 ‘윤정학’(유아인)은 투자자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역베팅을 하기 위해서다.

작은 공장의 사장인 ‘갑수’(허준호)는 이 상황을 알지 못한다. 그는 대형 백화점과의 어음 거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뒤 국가 부도 상황에 직면하며 곤경에 빠진다.
무능과 무지에 투자하려 한다.


<국가부도의 날>은 직접적으로 말한다. IMF사태가 정부의 무능과 무지의 결과라고. 뿐만 아니라 정부와 대기업, 은행들이 이 사태를 만든 주범임에도 피해를 오롯이 일반 국민들이 받았다는 점도 강조한다. 국민들이 과소비와 과도한 해외여행으로 외환위기가 왔다는 보도를 쏟아낸 언론도 사태에 일조했다는 점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당시 상황에 대해 고발하는 태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바도 있다.


다만 주장이 매우 강하고 나아가 관객을 계몽까지 하려 한다는 점이 아쉽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영화 <빅쇼트>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빅쇼트>가 인간의 탐욕을 다루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것에 비하면 <국가부도의 날>은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마저도 배우 한지민을 특별출연시켜 강조하는 모습이 한 편의 사설을 영화화한 것처럼 느껴진다.


캐릭터들은 이 사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누구 하나 인간적이지 않다. 캐릭터가 평면적이니 공감할 수도 없고 영화에 빠져 당시 상황을 간접 체험하긴 커녕 멀리서 관전하게 만든다. 게다가 캐릭터들은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윤정학(유아인)이 "우리 부자야"라고 외치는 오렌지(류덕환)의 싸대기를 때리는 이유, 국가부도를 만천하에 알리려는 한시현(김혜수)이 오빠인 갑수(허준호)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은 이유 등 몇몇 장면이 설득력이 떨어지고 의문을 갖게 한다.

대한민국 망했어.
씨발 우리 부자야.


때문에 캐릭터 설정이 어색해졌다. 왜 윤정학은 물질적 탐욕을 넘어 냉혈한인 걸까. 국가가 망해가는 순간에도 돈을 벌겠다는 탐욕적인 윤정학은 목을 맨 시체를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한시현이 정부 주요 관료들의 정책에는 반대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자회견을 제외하면 행동이 소극적이라는 점도 어색하다. 갑수는 또 어떤가.  IMF사태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변한다. 초반에 순박한 웃음을 짓던 갑수는 회사가 망하는 동안 괴로워하지만 누구의 탓도 하지 않던 사람이다. 하지만 결말에서 아들에게 “아무도 믿지 말라”라는 대사와 함께 외국인 노동자에게 소리치는 까칠한 공장 주인으로 변한다.


게다가 지나치게 설명한다. 복잡한 경제 상황과 용어 때문에 캐릭터들이 어색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초반에 한시현이 차관, 수석 등 주요 경제 관료들에게 경제 위기를 브리핑하는 모습은 관객을 상대로 쉽게 풀어서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또,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고 온통 답을 강요하는 목소리뿐이다. 직접적으로 “속지 말라” “의심하고 경계해라” “항상 깨어있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메시지에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일랜드에서 1년 6개월 정도 산 적이 있는데 당시 아일랜드는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한 상태였다. 당시 길거리에서 이와 관련한 시위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 등을 하며 국가와 대기업의 빚을 갚으려 노력한 것과 달리 아일랜드 국민들은 국가의 잘못으로 진 빚을 국민이 왜 책임져야 하냐며 대규모 시위를 했다. <국가부도의 날>의 메시지는 내가 본 시위에 참여한 아일랜드 국민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해당 메시지를 ‘영화’라는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허점이 드러났지만, 당시 정부와는 반대되는 도발적인 시선으로 IMF사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때의 일이 우리를 바꿨다.


<국가부도의 날>은 ‘헬조선’의 시작이 IMF사태라는 것을 고발하는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인 세상에 ‘갑질’이 만연하고 ‘개천에서 용 난다 ‘는 속담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로의 변화가 언제부터였는지 그 시발점을 보여준다. 김혜수는 한 인터뷰에서 “그때의 일(IMF사태)이 우리를 바꿨다. 비정규직이나 명예퇴직도 그 이후에 생긴 말이다. 그 당시 IMF 협상과 상관이 있다”라며 영화 속 시점 이후에 대대적인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장하준 교수의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는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표현이 나온다.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상대로 자유무역 등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강요하며 가난한 나라가 부자가 되기 어렵도록 경제적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찼다는 내용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정부와 언론, 대기업이 IMF사태를 이용해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로 이러한 ‘사다리 걷어차기’를 했다고 말한다. 이어 한 푼이라도 아껴 써야 한다며 ‘아나바다 운동’을 통해 경제 위기의 원인이 부패한 기업과 무능한 정치인이 아닌 국민 탓이라고 교육해온 국가를 비판한다. 언젠가는, 누군가는 말했어야 하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회 부작용의 원인을 되새김질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혜수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영화가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오래되지 않은 현대사에서
유의미한 대화들이
오갈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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