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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들 Aug 06. 2022

할아비의 기쁨

외손자에 풍덩 빠지다

연초 2월 28일, 나는 '할아버지'라는 타이틀을 새롭게 추가하였다. 그날 아내에게도 고대하던 '할머니'라는 호칭이 생겼으니 아내와 나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젤리'와는 임신 이후 줄곧 초음파 사진으로 조우하면서 현실에서 만날 날을 오매불망 기다렸더니 그게 이리도 쉽게 실현되었다. '젤리'는 딸이 뱃속에 담은 후부터 지어 부르던 태아의 이름이다. '제일 이쁜 아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지금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도록 획수를 따지고, 장차 젤리가 커서 되었으면 하는 꿈을 담아 작명한 '선우'라는 어엿한 이름을 지닌 외손자.  녀석은 태어났어도 바로 만날 수 없었는 데 코로나의 창궐로 인해 철통 같은 보호 속에서 외부인의 접촉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도, 산후조리원에서도.


우리 부부는 첫 만남을 위해 코로나 자가진단을 수시로 했고, 백일해 예방접종도 미리 조치했다. 마치 신성한 종교의식을 치르듯 가급적 외출을 삼가 외부인과의 접촉을 회피하면서 건강한 상태로 신생아를 맞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지금도 첫 만남의 떨림을 기억한다. 매일 보내주는 사진으로 꽤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실물을 영접한다는 사실에 긴장도는 최고였다. 주먹만 한 얼굴에 눈 코 입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일단 안도를 한 것이며, 꼼지락 거리는 조그마한 손과 발이 마치 인형과도 같다고 몇 번이고 쓰다듬던 일을. 한 번 안아보라는 아내의 요청이 두렵게 느껴진 것은 지금도 의문이다. 파손되기 쉬운 귀한 유리그릇을 드는 양 너무 조심스럽고, 혹여 갓난아이를 안다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 탓이었을까? 가슴은 뛰었으나 몸은 이미 경직되었고 아이 방향으로는 가급적 숨을 참으려고 하다 보니 너무 부담되어 어쩔 줄 모르고 헤맸던 기억. 


그러던 손자가 훌쩍 자랐다. 백일을 지나면서부터는 주변의 움직임에도 곧잘 반응을 보인다. 까꿍 소리에 까르르 웃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계속 추근대게 된다. 배부르면 혼자서도 손발을 휘젓으며 놀 줄 알고, 뉘어 놓으면 뒤집기를 시도하느라 용을 쓰는 손자가 예뻐 보이지 않는 할아비가 어디 있으랴. 하루하루가 다르고, 그럴수록 점점 빠져든다. 보면 볼수록 내 핏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얼마 전, 딸 내 식구들이 친정 나들이를 왔다. 분유를 한 통 물리고 난 후 손자를 차지했다. 아직도 갓난아이를 안는 게 서투르고 조심스럽다. 포대기를 이용해 가슴 쪽으로 안았더니, 두 팔로 안을 때보다 한결 안심된다. 두 손에 지긋이 힘을 주어 가슴 쪽으로 당기면서 손자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배부른 녀석도 좋기는 마냥 좋은 지 방긋 미소로 답한다. 통통하게 오른 두 뺨이 올라가도록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어찌 이리 예쁜가. 잠시 동안 손자와 할아비는 일체가 되어 놀았다. 이런 맛으로 늙어 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던가? 단내 나는 행복을 첫 손자에게서 맛본다.


함께 한 사진을 몇 장 얻어  몇몇 지인에게 보여줬더니 둘이 어쩜 그리 닮았느냐며 응원한다. 푸훗! 지인들은 좋은 뜻으로 할아비와 손자의 닮음을 얘기하지만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나는 사실 손자가 할아비를 닮지 않길 고대하는 편이다.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소리가 제일 싫다. 자라면서는 반드시 잘 생긴 엄마 아빠를 닮으리라 확신하면서, 나는 오늘도 손주 용돈을 벌기 위해 일감을 찾는다. 나는 손자바라기 할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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