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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Mar 19. 2020

캘리포니아, 팔로스 버디스의 봄

San Ramon Preserve, California

봄비가 오신다.


며칠째 봄비가 내리고 있다.

봄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내리는 것 같지만 봄에 내리니 봄비가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북미 대륙을 휩쓸고 있는 겨울 폭풍(봄 폭풍이 아니라)의 영향으로 미대륙엔 지역에 따라 폭설이 내리기도 하고, 폭우가 내리기도 한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도 고도가 높은 곳에는 눈이 내리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비가 내리고, 중. 북부 캘리포니아 쪽은 대체로 눈이 내린다. 시절이 하도 수상하여 봄이 오는지 가는지 별 느낌이 없었는데, 때마침 비가 내리니 들녘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주말을 이용해 가까운 태평양 해안의 자연보호구역에 나들이를 다녀왔다.


해마다 봄만 되면 남부 캘리포니아의 들이며 산이며 구분할 것 없이 온통 뒤덮어 피는 꽃이 있다. 바로 갓꽃이다. 이 녀석들은 번식력이 어찌나 강한지 해가 다르게 영역을 넓히고 있어, 봄마다 비라도 내리면 꽃이 피기 시작하여 3월 중순 쯤되면 온산을 노랗게 물들인다. 보통은 식물들 간 영토전쟁에서 이기는 쪽의 개체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떤 해는 노란 꽃이 주로 보이다가도 또 어떤 해가 되면 다른 빛깔의 꽃을 피우는 식물이 대세를 장악하기도 한다.


이런 좋은 예로 카리조 대평원(Carrizo Plain)의 야생화를 들 수 있다. 야생화 군락지의 빛깔에 따라 매년 산과 들의 무늬가 달라지는데, 해마다 달라지는 기후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 발아하는 개체수가 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미루어 생각해본다. 남부 캘리포니아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커다란 군락을 이뤘고 매년 규모를 키워나가는 식물은 갓꽃이 대세인 것은 사실이다.


갓꽃의 향연, 태평양 해안을 가득 메운 갓꽃들.


갓꽃은 비슷하게 생긴 꽃이 많아 여간해서 구분해내기가 쉽지가 않다. 먼발치에서 보면 유채와 다를 바가 없다. 빛깔이며, 모여사는 모양이며, 하늘거리는 자태며 천상 유채다. 게다가 겨자 꽃과도 많이 헷갈린다. 얼마 전까지 야생 겨자로 알고 있었는데, 지난해에야 갓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야생 겨자로 알고 있다. 뭐,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식물들이 계속해서 영토를 넓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갓은 사진에서 보듯이 꽃이 지고 씨앗을 맺으면 생명을 다하고 말라버린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말라버린 갓 대가 아직 남아있는 곳에 다시 새 생명이 피어났다.


캘리포니아가 원산지인 수많은(약 6,300여 종 쯤 된다.) 식물 가운데, 캘리포니아 해바라기(California Bush Sunflower or Encelia Californica)가 있다. 이들은 자생종인 만큼 캘리포니아 어디를 가든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이른 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6월 한창 더울 때까지 꽃을 피우는 다년생 식물이다. 수많은 외래종 식물이 침략해 들어와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식물이기는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들이 자라는 곳엔 대부분 갓이 번식해 군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어떤 곳은 뒤섞여 있는 곳도 있다. 그런데 박힌 돌이 굴러들어 온 돌에게 밀리고 있는 느낌이 든다.


토박이의 위용, 캘리포니아 토박이 식물인 '캘리포니아 해바라기'가 흐드러졌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몇 해전부터 쑥갓이 맹렬하게 개체수를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쑥갓인 줄 몰라봤다. 흔히 식품점에서 나물로 사다 먹는 쑥갓이 이렇게 흔히 들에서 자라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쑥갓은 동아시아 쪽에서 자라는 식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그런데 막상 알고 보니 쑥갓은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로 이미 전 세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동아시아에서는 식용으로 재배하지만 서양에서는 주로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그러므로 쑥갓을 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쑥갓 꽃의 꽃말이 '상큼한 사랑'이라니, 꽃이 예쁜만큼 사람들이 먹기보다는 관상용으로 키우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쑥갓, 쑥갓꽃이 이렇게 예쁜줄 미처 몰랐다.


해안가 트레일을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나무가 있다.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주변의 식물들에 비하면 꽤 커 보이고, 잔가지가 난 폼을 보면 뽕나무로 보이기도 한다. 거센 바람 때문 이기는 하겠지만, 몸통이 가늘기도 해서 반듯이 서있질 못하고 구부정하게 허리가 굽었다. 해안가라고는 해도 캘리포니아의 해안은 상당히 건조하여 황무한 땅이 많은데도 이 나무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 꽃이 핀다. 바로 담배나무(Nicotiana glauca, Tree Tobacco) 이야기다. 담배나무는 상당히 신박한 식물이다. 여기에서는 좀 다르지만, 사막지역 등에서 불이 나면 미친 듯이 싹을 틔워 번식을 하다가 다른 식물이 자라기 시작하면 곧바로 사그라들었다가 다음 불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특성이 있다. 만약 불이 나지 않는다면? 몇십 년이라도 기다린다고 한다.


담배나무, 오래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 나뭇잎을 피웠다고 한다.


여기는 꽤 이름난 곳이다. 다른 것이 아니고 트럼프 내셔널 골프장 때문이다. 현직 미국 대통령 소유의 골프장, 여기에서 가끔씩 PGA경기도 열리는 골프장으로 이름나 있다. 이 골프장을 가로질러 해안가로 갈 수 있고, 골프장을 끼고 해안 트레일이 만들어져 있다. 이런 면에서는 말리부 해안을 독점하고 있는 갑부들의 이기심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골퍼들과 트레일 길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걷는 도중에 골퍼들과 마주치기도 하는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즐거움이 있다.


트럼프 내셔널 골프장, 트레일을 하다보면 골퍼들과 조우를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위에서 나열한 꽃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갓꽃, 캘리포니아 해바라기, 쑥갓 꽃, 야생 담배 꽃... 혹시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눈치를 채셨을까? 그렇다, 바로 이 꽃들은 모두 노랗다는 것이다. 올해는 특이하게도 민들레나 쇠서나물이 보이질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다른 식물들에게 밀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들의 질긴 생명력을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매우 이례적이다. 민들레 또한 노란 빛깔이니 적어도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피는 들꽃들은 모두 노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다른 빛깔을 띈 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태평양 해안에서 노란 빛깔 말고는 모두 색 소수자(?)에 속한다. 천천히 톺아보면 더 있겠지만, 얼핏 눈에 띄는 꽃들이 몇 종류 된다. 세열 유럽 쥐손이(Stork's Bill) 같이 눈을 씻고 봐야 하는 것들이 있는 반면, 선샤인 미모사(Sunshine Mimosa)와 같이 눈에 확 들어오는 꽃도 있다. 이런 색 소수자들 가운데는 블루 샐비어(Blue Sage), 마누카(Manuca) 같은 식물들도 있어서 노랑 일색인 들판에 흥미를 더해준다.


세열유럽쥐손이/선샤인 미모사
블루 샐비어/마누카


어느 곳이든, 어떤 공동체나 집단이든 한 가지 빛깔만 띈다면 아무리 좋아할지라도 때때로 지루하고 때로는 게을러지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씩 일탈과 낯섦, 거리두기가 활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봄비가 내리는 어느 봄날 들판을 물들인 봄빛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달팽이의 나들이, 땅이 촉촉해지니 달팽이도 나들이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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