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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선 Apr 22. 2024

모순된 삶에서 찾은 여유

나와 보내는 시간


후회할 거라면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살 거라면 절대 후회하지 마라. -무라카미 하루키 -



모순


 그렇게 스스로를 알아가다 보니 그간 해온 행동들에서 아이러니한 점들을 몇 가지 발견했다.



결과보다는 과정


 일전에 결과와 과정 중 뭐가 더 중요하냐고 나에게 물어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All or nothing, 성취하지 않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인생이었다. 다행히도 그 노력은 늘 보상을 가져다주었고 그러한 '성공경험'들을 통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믿어왔다. 그간의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내 뇌 속에는 노력을 하면 언제나 좋은 결과가 생길 거라고, 반대로 목표한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강한 신념이 생겼던 것 같다.  


 그 신념은 대부분 나에게 긍정적이었다. 내가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데 있어서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세상엔 당연하게도 내 노력만으로 안되는 것들이 있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가령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요인에 의해서 성취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 성취가 온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당연한 말인데 뇌 속 깊이 박혀버린 신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노력에 감명받은 하늘이 여느 때와 같이 그 외부요인마저 나의 편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오만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내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고 그간의 노력도 인정해주지 않으니 마음이 곪는 게 영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 잘못된 신념을 바꾸기 위해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과정'에서 노력의 의미를 찾기로 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늘 해야 하는 것들을 온전히 해냈다면 그것만으로 오늘의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빨리 보다 멀리


 게다가 내가 지금 참가한 이 경기는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었다. 내 상황을 달리기 선수에 비유하자면 마라톤 경기에 처음 참가한 단거리 선수가 평소처럼 전력질주하다가 지쳐 쓰러져버린 형국이었다. 언제 통과할지도 알 수 없는 아주 긴 레일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마라톤 선수들처럼 속도를 낮추고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방법, 오래 달리는 방법을 연습해 보기로 했다.



나를 위한 시간


 일도 잘하고 싶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고, 자기관리나 자기계발도 놓칠 수 없고, 잠도 충분히 자고 싶고.. 그러면서 데이트도 해야 했던 나의 솔로 시절, 그 모든 걸 잘하고 싶은 나는 시간이 늘 부족했고  "시간이 아깝다" "시간낭비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 당시 나는 마치 여러 개의 공을 단 한 개도 놓치지 않고 빠르게 굴리는 저글링을 하는 것 같았다.


 결혼하고 나서 '집안일'이라는 공이 추가되면서부터는 시간이 더 부족해졌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 균형은 아예 무너졌다. 사업은 기존과 아예 다른 차원의 개채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개의 공이 필요했고, 나는 그것을 굴리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많은 공들을 놓아주어야 했다. 남편과 보내는 시간도 없어졌으며, 잠자는 시간도 부족한 채 일에 매달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것을 포기한 채 매달린 사업이 나에게 그리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진 않았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반복해야 할지 그 기약도 없이 지속되던 생활에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굉장히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내 목표가 근본적으로 어떤 욕구를 향해있는가 생각해 봤을 때 가장 원하는 것은 나의 안녕安寧(편안할 안, 편안할 녕)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바쁜 시간 속에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그 모순을 깨닫고 나는 다른 것들의 기준을 조금 낮추더라도 '나와 보내는 시간'을 하나의 공으로 포함시키기로 했다. 좋아하지만 "쓸데없다"라고 생각해서 쉬이 하지 못했던 것들을 나를 위해 기꺼이 해주는 것이다.






나와 보내는 시간


자연을 즐기기



“마음에 활기가 없으면 모든 자연이 무기력하게 보이지만 마음이 밝게 빛나면 온 세상이 생기 있게 타오르며 반짝인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봄에는 꽃놀이를 가고, 여름엔 바다에 가고, 가을엔 단풍구경을 가며, 겨울에 내리는 눈을 구경하는 그런 여유를 좋아하지만 그런 것들을 할 때면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낸다는 죄책감이 들어 그 시간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올해는 ’나와 보내는 시간‘을 갖기로 하면서 봄에 꽃구경을 원 없이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는 거,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이는 꽃들 속 차이점을 찾아내는 거, 알록달록 꽃 색깔을 보면서 자연의 색깔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느끼는 거, 그게 뭐라고 엄청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많을 수 있다면 더 마음이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바다의 매력


 모든 바다를 좋아하지만 유난히도 바닷물 색이 파랗고 파도가 잔잔하면서도 모래가 아주 고운 강원도 고성 앞바다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바다에 도착하면 한동안 한 자리에서 파도가 치는 모습을 관찰한다. 파도는 잔잔하게 물결을 따라 흐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내 신발을 적실 정도로 커다랗게 왔다가 이내 깊은 바닷속으로 되돌아간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와 육지보다 매서운 바다 바람도 함께 느낀다. 그러고는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파도가 요동치는 것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깊고 잔잔하다. 바다같이 넓고 깊은 마음을 갖기를 바라본다. 저 멀리 확고하고 안정된 수평선을 바라본다. 한동안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다가 해변가를 따라 걷는다.


산의 매력


 푸릇푸릇한 산에 오른다. 저질체력인 나는 1-2시간 내 갈 수 있는 코스를 좋아한다. 작은 산이라고 만만히 보는 것도 잠시, 등산하는 동안 숨이 턱턱 막히며 그동안의 잡념이 사라진다. 지칠 때면 아무 돌이나 나무에 주저앉아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좋은 공기와 풀내음이 마음속 깊이 들어오며 도시의 미세먼지 등 나쁜 공기가 씻겨져 내려간다. 선선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힌다. 눈을 감으면 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주기적으로 멈춰서 시각, 촉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자연을 관찰한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한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을 느끼면서 가만히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직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 포기할까 고민했던 높고 긴 계단, 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풍경 등을 바라본다. 옆에서 마주했을 땐 아주 커다랗게 다가왔던 그 모든 것이 별거 아닌 듯이 작게 보인다. 숨을 고르고 난 뒤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내려갈 준비를 한다. 어차피 다시 내려갈 거 뭐 하러 힘들게 올라왔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가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등산을 마무리한다.  


차크닉의 매력


 정말 바빴던 날들이 지나고 여유가 생겨 혼자 오롯이 쉬고 싶을 때면 차박을 간다. 차에 먹고 싶은 음식과 음료(술 포함)를 챙겨서 인근에 있는 차박지를 간다. 차박지에 도착하면 차를 평탄화하고 매트를 깐 다음 차 창문을 살짝 열고 그냥 눕는다. 어떨 때는 음악을 틀어놓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는데, 주로 그냥 그 고요함과 잔잔함을 누린다. 배가 고파 오면 챙겨 온 음식과 음료를 먹는다. 그리고 누워있다 보면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오면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든다. 한숨 자고 일어나 한껏 여유를 부리다가 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예술을 즐기기



“각각의 감각마다 그것에 따른 즐거움이 생겨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

그리고 감각 역시 최선의 상태에 있으면서, 그렇게 최선의 상태에 있는 대상에 관계해서 활동할 때 그렇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감각 대상과 지각하는 것이 다 같이 그런 상태에 있을 경우에는 언제나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멍하니 음악을 듣는다거나, 한 그림을 온전히 감상하는 거, 그러한 것들도 나에게는 시간낭비였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글도 하나의 창작활동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다면 음악이나 그림을 창작한다는 건 얼마나 고귀한 경험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그림을 바라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은 새로움 경험이었다. 그리고 더 여유가 생긴다면 그림이나 음악을 취미로 배워보겠다는 버킷리스트를 추가했다.




그림에 집중해 본다


 전시회에 가는 걸 좋아한다. 그곳에서 작품 하나하나 쳐다보고 있는 그 행위 자체가 좋다. 각각의 작품들을 단순히 내가 느끼는 어떤 감정도 좋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무슨 의도를 가진 것일까?라고 생산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처한 상황에 따라 좋아하는 작가도 바뀌는 것 같다. 한창 활기차던 24살, 회사 입사를 앞두고 홀로 떠났던 유럽여행에서 클림트의 '키스'를 실제로 보기 위해 굳이 오스트리아를 들렀다. 그 당시에는 그림체의 화려함과 사랑받는 여성의 행복한 표정에 크게 매료되었다. 아마도 내가 꿈꾸는 사랑에 대한 이미지였을 것이다.

키스 - Gustav Klimt -


 최근에는 마음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뭉크의 작품을 다시 돌아봤다. 뭉크는 다섯 살 때 엄마를 잃고, 열네 살 때 누나를 잃으며 아빠에게 정신적 학대를 받으면서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우울과 불안감, 공포의 감정을 호소했던 뭉크는 놀랍게도 80세까지 살았다. 뭉크가 그림을 통해 본인의 부정적인 마음들을 '승화'하지 않았으면 그는 그토록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저녁, 멜랑콜리 - Edvard Munch -


 가끔 사무치도록 어떤 것을 그리고 싶을 때면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잘 그리지 않더라도 괜찮다. 재능이 있는 사람만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음악 감상하기



“ 음악은 그 자체로 정서다. 정서를 만들어내지 않고 정서의 내적인 움직임을 재현하기에 슬퍼할 일이 전혀 없는데도 우리는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슬퍼하는 것이다.” - 무기력한 날엔 아리스토텔레스 -



 음악은 그 공간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꿔주는 엄청난 힘이 있다. 요즘은 유튜브에 ‘ㅇㅇ한 음악’이라고 검색만 해도 무수히 많은 곡들이 쏟아져 나오고 훌륭한 유튜버들이 큐레이션 한 좋은 곡들을 들을 수 있다. 나는 주로 BGM으로 음악을 틀어놓는다.


업무 상 집중할 때는 보사노바나 재즈 풍의 멜로디를 좋아하고

 사색을 할 때는 뉴에이지 음악을 좋아한다.

 그냥 쉬고 싶을 때는 물소리, 새소리 같은 자연소리에 멜로디를 가미한 뮤직테라피 류의 음악을 듣기도 하고

 청소나 운동 등 몸을 써야 하는 일을 할 때는 "신나는 팝송"이라고 검색해 비트가 빠르고 밝은 음악을 듣는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적당히 감미로운 분위기의 팝송을 들어놓으면 상대방과 더 무드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가끔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가사와 멜로디로 어우러진 음악을 만나면 감동하기도 하는데, 음악에 집중하는 시간이 별로 없는 나에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더 의도적으로 음악에 집중해 본다. 어떤 악기의 소리인지, 그 악기는 어떻게 연주되고 있는지, 그 화음과의 조화하던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음과 가사를 써냈을까 작곡가와 작사가가 되어 그 감정을 느껴보는 거 그 모든 것은 굉장한 즐거움이다.





과정의 즐거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것,

방향이 맞다면 속도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 ‘나를 위한 시간‘도 스스로 허락해 주는 것,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변화였다.


삶의 만족도는 올라갔고 삶이 만족스러우니 관대해졌다


시시콜콜한 것들에 스트레스받지 않았다

웬만한 어려움은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씩 삶에 활력이 돌아왔다

다시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겼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그 순간에 집중하며 다시 루틴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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