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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May 20. 2024

진상보다 나은 위선

남편은 편의점을 한다. 나이 들어 편의점 알바를 시작하자마자 한 달 만에 점주가 내놓은 편의점을 엉겁결에 인수했다. 나는 남편이 사람 상대하는 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장사에 이렇게까지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를 신뢰하지 못해서 어떤 자영업도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장사를 잘해 깜짝 놀랐다. 


여기서 남편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가지를 칠 수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내가 편의점 이야기를 꺼낸 이유로 돌아가야겠다. 편의점에는 하루 이백에서 삼백명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그 사람수에 비례해 진상이 발생한다. 천명 중에 한 명이라고 해도 사나흘에 한 번은 진상이 출현하는 것이다.


갖가지 형태의 진상이 있지만 그중 가장 나쁜 진상은 미성년자 알바생에게 치근덕거리는 나이 든 남자들이다.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 깊은 혐오감이 들정도로 미성년자에게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이 많다. 손녀뻘인 아이에게 손을 댄 남자, 과자를 한 보따리 사서 알바생에게 안기는 남자..... 이들은 대부분 술에 취해있다.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 들른 편의점에서 온갖 추태를 일삼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남편이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는 걸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술냄새 풍기며 돌아다니는 늙은 남자는 바로 내 남편의 모습이니 이 남자도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을 핑계 삼아 그들이 벌이고 다니는 일은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다니는 병원에서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진상력의 최고 레벨을 보이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간호사가 이름을 호명했을 때 자리에 없었다. 간호사는 이름을 부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니기까지 했다.


한참 뒤 돌아온 할아버지는  자신이 예약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부르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호명했으나 자리에 없어서 뒤로 밀렸다고 했더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호명한 시간은 예약 시간보다 앞이었으니 그건 밀어 두고 자신이 예약한 그 시간에 맞춰 진료를 볼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간호사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고 화만 내던 할아버지는 병원이 여기밖에 없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할아버지가 가고 나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진상들은 대부분 강약약강이다. 


3차 병원 대학교수 진료실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진상짓을 하지 않고 고분고분하다. 그 권위 앞에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조심한다. 그런데 지역 2차 병원 간호사에게는 성을 내며 병원이 여기뿐이냐고 소란을 피운다. 그런 맥락에서 편의점은 세상 가장 만만한 곳이고 그중에서도 미성년자 알바생은 만만 X 10,000 X 10,000 일 것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이십 년이 넘도록 동물병원에 근무하면서 진상다운 진상 손님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기껏해야 미수금을 밀려놓고 금액이 많아지니 확인을 해야겠다고 하는 하는 분들이다. 그리고 확인이 되면 바로 수긍한다.  


우리 병원은 일반 동물병원처럼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지 않는다. 바운더리가 정해져 있는 손님이다. 이 지역에서 소를 키우는 분들로 한정되어 있으니 함부로 진상짓을 했다가는 바로 소문이 나고 본인이 더 민망해지는 작은 사회인 것이다. 


결국 진상이라는 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해도 된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불특정다수에게는 진상짓을 해도 자기 영역 안에서는 조심하고 체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편의점에서 진상을 부리는 술꾼보다 인격적으로 더 훌륭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체면을 지켜야 할 자리에서 조금 더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한번 보고 말 사람이 아니니 부끄러운 짓은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진상보다는 위선이 낫다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하물며 남편도 제발 내 앞에서 위선적으로 행동했으면 좋겠다. 타인의 내면 따위 하나도 알고 싶지 않다. 그들의 본성은 그들의 문제이고 나는 꾸민 모습으로 상대해 줬으면 좋겠다. 


위선이 계속되다 보면 그게 진심이 되기도 한다. 정치가의 아내인 동생은 처음에는 유권자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마음에 시작한 선한 행동이 결국 진심이 되었다. 마음이 따르지 않던 행동도 계속하면 마음이 생긴다. 오죽하면 얼굴 찡그리는 근육을 못 움직이게 보톡스를 맞으면 마음이 훨씬 긍정적인 된다고 한다.


그러니 위선이라도 친절하게 살아야 할 것 같다. 진상보다 위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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