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여곡절도 많았던 한 해가 모두 지나갔다. 우혁은 인테리어용인 줄만 알았던 거실의 벽난로에 참나무 장작을 넣어 불을 지폈다. 크리스마스에는 내리지 않던 눈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자 보기 좋게 내리고 있었다.
서아는 거실 창에 붙어 서서 마당에 쌓이기 시작한 눈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당 가장자리 울타리 위에 켜놓은 노란 등불 덕분에 마당의 눈이 더욱 운치 있어 보였다.
“이 시간에는 내가 내린 커피보다 이게 더 어울릴 것 같지?”
우혁이 머그컵에 탄 진한 초코 라테를 내밀며 말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그컵을 받아 들었다. 따끈한 컵을 손아귀에 감싸 안자 익숙한 초콜릿 냄새가 그녀의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주었다.
“이런 날이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우혁이 서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너를 억지로 쫓아버리던 나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행복할 자격이 있나 싶어.”
서아는 컵을 창가 옆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놓고 우혁의 뺨을 살포시 감싸 안았다.
“그러게 강우혁이 진짜 나빴는데. 그렇게 나쁜 남자를 다시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우혁이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서아의 손을 끌어다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충성하면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서아가 피식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머리가 좀 나빠서. 벌써 다 잊어버렸지 뭐야.”
우혁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서아를 품에 안았다.
“이상하다. 우리 서아 르 꼬르동 블루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인데. 머리가 나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소리네.”
서아는 입가를 끌어올리며 우혁의 눈을 응시했다.
“강우혁만 생각하면 갑자기 바보가 되는 병에 걸렸나 봐.”
“아하 그렇구나. 다행이다.”
서아를 품에 안은 우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두 사람의 몸이 바짝 밀착되었다. 너울대는 벽난로의 불꽃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는 이미 하나가 되어 엉켜 있었다.
포근한 러그에 등이 닿은 서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우혁을 향해 팔을 뻗었다. 우혁이 셔츠 단추를 풀며 뜨거운 눈길로 서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새도록 너를 안고 있으면 일 년 동안 너를 안고 있는 건가?”
“밤새도록?”
우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아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눈은 소리 없이 내리고 참나무 장작은 점점 거세게 타올랐다. 서아는 눈을 감고 우혁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아득한 쾌감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서아의 입에서 가늘게 새어 나온 신음이 타닥거리고 타오르는 장작의 소리에 섞여 들었다. 우혁은 서아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자신의 발바닥을 통해 뿌리가 뻗어나가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오랜 세월 동안 부유하듯 살아온 자신의 삶이 서아를 통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아이를 낳고 마당 가득 아이들의 웃음으로 채우며 가장으로 살고 싶었다.
엄마 아빠가 되어 육아로 지친 서로를 위로하며 한 뼘 더 자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적응을 걱정하고 운동회에 따라가 달리기도 하고 싶었다. 아이 문제로 서아와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뿌듯한 기쁨을 느끼며 살고 싶었다.
“서아야, 사랑해.”
순간 멀리서 카운트다운 하는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졌다. 타운 하우스 단지 안에서 파티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해피 뉴 이어!”
서아가 우혁의 이마에 입술을 대며 속삭인다.
“서아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아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지금보다 더 받을 복이 없을 것 같은데.”
“어이쿠, 욕심도 없어라.”
“어쩐지 더 욕심내며 안 될 것 같아. 오빠는 욕심나는 게 있나 보지?”
“나는 너랑 아이를 한 넷쯤 낳아서 우리 집이 들썩이게 키우고 싶어. 네가 디저트 사업 확장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얘들 키우면서 뒷바라지하고 싶은 욕심.”
서아가 러그 위에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와, 나는 무슨 복으로 강우혁의 외조를 받으며 사냐. 생각만 해도 좋다. 그런데 오빠는 일 안 해?”
“해야지. 알다시피 우리 일이라는 게 있을 때만 있잖아.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많은 게 우리 일이니 기다리는 동안 얘들이나 키워야지 뭐.”
서아는 애들이나 키운다는 우혁의 말에 키득거리고 웃으며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우혁이 서아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부모는 혼자되는 게 아니고 우리 둘이 같이 되는 거니까.”
같이 하는 거라는 우혁의 말에 서아가 몸을 옆으로 돌리며 웃었다.
“만들기도 같이 만들고 키우기도 같이 키우는 거니 우리 둘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네.”
“그렇지!”
멀리서 새해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