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대입 수험생이던 시절 학년주임 선생님께서 문자를 보내셨다. 학생들이 수능 백일주를 마시지 않도록 각별한 지도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고등학교만 들어가도 선생님에게 술 사달라는 소리를 하는 아이들이니 선생님의 걱정이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해 수능을 보는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혹은 엄마 뱃속에서 기상재해 중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는 1994년 폭염을 겪었다. 그런데 입시가 있던 해도 꽤 더워서 이 아이들은 출생이나 입시 같은 통과의례를 더위와 함께 보내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이는 수능 전 백일은 일종의 상징적 의미가 있지만, 다음날부터는 현실이라며 힘겨워했다. 그럼에도 평생 이렇게 온 힘을 다할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라며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과정에 얻는 성취감에 대해 말했다. 그때 나는 휴가지에서 읽은 김연수 작가의 책 <지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렸다.
마라톤을 하면서 김연수 작가는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아무에게도 이기지 않았건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결승점을 찍은 마라토너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이다. 자기와 싸우느라 휴대폰마저 해지시킨 아이는 설령 대학의 이름이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절대 지지 않았음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시련에 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어디 수험생뿐일까. 우리 지역에서도 불볕더위에 닭들이 몇 만 수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내가 근무하는 동물병원에 약을 사러 오는 축주분들의 하소연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젖소들은 종일 침을 흘리고 서서 제대로 먹지 못해 착유량이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더위를 이겨내고 나면 미국의 곡물 흉작으로 어마어마하게 올라갈 사료값이 기다리고 있으니 산 넘어 산이었다. 지지 않을 방도가 없어 보이는 것이 당시 축산 농가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축주들은 한낮 더위 속에 고압 분무기로 젖소 등을 식혀 주고, 더위에 더 취약한 소들에게는 영양제를 놓아가며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날씨 탓, 사료값 탓만 하고 있다가는 정말 지고 말 뿐이다. 역경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역경을 이기고 더 나은 삶을 만들고 누구는 그 역경에 좌절해서 포기하고 만다. 좌절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어려운 시기에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지지 않는 것이다. 꼴찌로라도 결승점을 통과한 마라토너가 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김연수 작가의 깨달음을 전해주고 싶다. 결과에 상관없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단코 지지 않은 것이다.
2023년 현재 축산 농가는 내가 이 글을 쓰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없을 만큼 어려워졌다. 한우 사육두수가 지나치게 늘어나 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졌고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사룟값은 곱절로 뛰었다. 그리고 2026년에는 미국산 소고기, 28년부터는 호주산 소고기 관세가 철폐된다.
과연 우리나라 축산 농가가 지지 않을 수 있을까 요즘은 그런 말을 꺼내기조차 민망한 시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