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김가장은 고된 회사 업무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집, 홀로 그를 반기는 입구 센서등.
'아무도 없나?'
인 줄 알았겠지만 그녀는 방에서 취침 중이다. 아마, 지난밤에도 *요통으로 잠 못 이루다 밤새 TV를 보고, 소파에서 쪽잠을 자다 다시 방으로 들어간 탓이다. 그는 슬쩍 안방을 들여다본다. 이불이 불룩한 걸 보니 그녀는 아직 침대에 누워있다. 그녀가 깰세라 조심히 옷방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는다. 부엌이든, 방이든, 안방으로 빛이 들어갈 법한 천장 등은 가급적 켜지 않는다. 다행인 건, 그도 간접등을 좋아하여 거실에서 형광등을 켜지 않은 지 이미 오래다.
'어디 보자'
'작은 방에 긴 머리카락 두 개, 부엌에는 음, 없고, 화장실 앞에 하나 그리고 소파 앞에 세 개.'
'오늘은 부엌에 안 왔군. 그렇다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말인데.'
밝은 회색톤의 바닥 장판 덕분에 자연스럽게 떨어진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오늘 하루 동선을 추리해낸 김가장은 마치 방금 집에 들어온 사람인양 그녀를 힘차게 불러본다.
'나 집에 와떠- 뿌-'
'부스럭'
그녀는 대답 대신 잠깐의 움직임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컨디션이 좋을 때면 금방 침대에서 나오지만, 허리 통증이 심한 날은 수 시간을 더 누워있는다. 김가장에게는 실로 자유로운 시.. 아니, 아무튼 김가장은 그녀와 먹을 저녁밥으로 두부 유부초밥을 시작한다.
김가장은 요리를 좋아한다. 현대 남편의 덕목 아닌가. 물론, 두부 유부초밥은 요리보단 조리에 가깝다
잠깐 두부 유부초밥을 설명하자면,
두부 유부초밥은 마트에 파는 두부와 유부초밥세트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굉장히 간편하면서도 번거롭고 건강한 식단이다. 유부초밥세트 안에 필요한 소스와 재료가 전부 있다. 일반, 유부초밥과의 차이점이라면, 밥 대신 두부를 으깨서 넣는다는 점. 그런데 유부 피안으로 두부 소를 넣는 게 좀 번거로운데, 유난히 번거롭게 느껴지는 날엔 두부 소를 유부 피에 넣지 않고 따로 먹는다. 마치, 따로국밥처럼.
두부 유부초밥에 대한 설명을 마쳤음에도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안방으로 들어가 식사에 대한 의향을 물어보니, 나중에 먹겠단다. 잠이 더 필요하니 조용히 나가서 자유 시간을 누리라는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음을 직감한 그는 재차 묻는 어리석음 대신 들릴락 말락 하게 '알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한 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연기처럼 고요히 안방을 빠져나왔다. 단,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이는 둘 사이의 불문율로 비록, 하나는 잠에 들었고, 하나는 자유로이 시간을 보내는 순간에도 단절이 아닌 소통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다.
김가장의 가슴은 이내 약간 몽글몽글해졌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외출로 수 시간 자유 시간을 얻은 그 시절의 해방감과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평일에 이런 귀중한 시간을 가진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쌓인 설거지도 김가장의 몫이지만, 그는 기꺼이 이에 응한다.
'헤이 클로바, 노래 틀어줘'
AI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켜고 선풍기는 자신에게 고정한 후 설거지에 임하는 김가장의 어깨는 봄바람을 맞은 셔츠 자락 마냥 가볍다. 맙소사, 평일 저녁에도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TV는 켜 두었지만 보지 않는다. 그저 BGS(background screen)으로 쓸 뿐.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 김가장은 글을 쓸 때 TV를 틀지 않는다. 그는 좋아하는 노래 모음의 노래를 듣거나, 피아노 위주의 뉴에이지 송을 랜덤으로 들으며 감성의 습도를 90% 이상으로 끌어올려 글을 쓴다.
하지만 그가 쓰는 글이 모두 감성적인 것은 아니다. 시, 소설은 물론, 대중문화, 아티스트 등에 대한 분석에 가까운 글이나, 자기 계발 류의 글도 있고, 꼰대스럽게 메시지를 전하는 시답잖은 글(분재 사장 시리즈)도 쓴다.
밤은 깊어가고 집 안엔 타이핑 소리가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득 채운다. 화면에 까만 글자가 많아질수록, 김가장의 복잡한 머릿속과 스트레스로 점철된 가슴은 조금씩 비워지고 있었다. '타닥타닥, 탁, 토도도도독 톡 탁' 실로 경쾌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스르륵'
갑자기 안방 문이 열리더니 그녀가 밖으로 나온다. 요통과 피로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난 그녀의 저녁 일과가 시작된 것이다.
"흐아아아함, 밥 먹었어?"
"어, 다, 당연하지. 좀 남겨뒀어. 허리는 좀 괜찮아?"
그는 당황한 기색을 겨우 모면하며, 기꺼이 그녀를 반긴다. 실로, 12시간 만의 만남이니까.
TV가 켜지고, 김가장은 조용히 노트북을 덮는다. 다시,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설거지도 다했고, 남은 것은 소파에 앉아 그녀와 TV를 보고 수다를 떨고 웃고 즐기는 것. 짧은 방학이 아쉽듯, 갑작스레 맞이했던 자유로운 (글쓰기) 시간은 종료되었지만, 삶의 동반자인 그녀와의 저녁 일상이 막을 열었다. 그렇게 또 다른 일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상 에피 1 끝
[각주 해설]
*요통: 그녀는 허리디스크로 3년째 고통과 싸우고 있다. 때문에 다니던 회사에 병가를 내고 수개월 후 다시 복직했으나 고통이 경감되지 않아 다시 휴직을 신청했는데 결국, 회사에서 더 기다려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