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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ney Kim May 28. 2022

초록을 쥐어준 그대는_잔나비

잔나비의 감성에, 그대에게 보내는 서간



복잡한 마음에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날이 있다. 내 마음 몰라주고 눈 부시게 파란 하늘과 한 톨의 근심 걱정도 없이 둥실 떠다니는 저 구름마저 얄미워지는 그런 날 말이다.


시험도 망쳤는데 내 기분은 커녕 저녁 한 입 먹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는 엄마, 집안일을 끝내고 애들도 겨우 재우고 나니 식탁 위 고지서들로 머리가 아픈데 소파에서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배우자, 회사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생일을 잊었다고 서운해하는 친구의 퉁명스러운 메시지와 주말에 뭐할 건지 물으며 보채는 연인의 전화, 결혼할 계획도 애를 낳을 계획은 더더욱 고민할 틈도 없는데 자꾸 물어보며 보채는 주변 사람들.


우리는 생각보다 복잡한 상황에 지층처럼 쌓인 다양한 종류의 압박과 스트레스를 어깨에 지고 머리에 이고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주말이라 조금 쉬려고 돌아봐도 마음은 이런저런 신경 쓸 거리들로 무거워 들 수 조차 없는 그런 날도 있다. 그럴 때면 우린 종종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는 걸까, 진정 걱정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는 걸까 그런데 돌아보니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실.. 세상에 우리의 쉴 곳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걸까.


잔나비 두 번째 소곡집


그즈음, 잔나비의 두 번째 소곡집이 나왔다. 1년 반 전 ‘가을밤에 든 생각’이 그랬듯 잔나비의 마법은 처져가는 일상에 오월의 초록 에너지를 주입해주기에 충분했다. 억지로 힘을 낼 필요도, 없는 용기로 두 주먹을 불끈 쥘 필요도, 마냥 바스려져가는 기운에 억지 긍정의 마음을 먹을 필요도 없다. 예술가의 역할이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극단의 감정을 경험하고 상상하고 표출하며 감성의 양극단을 오가는 중 가장 그럴듯한 진액을 추출해 대중에 공개하는 것이니 우리는 잔나비의 이번 앨범에서 그저 상큼하고 밝게 잘 포장된 초록의 에너지를 쭉쭉 뽑아마시면 그만이다.


빨래를 개다 그 시절이 떠올랐다. 고백하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성당 누나의 환히 웃던 옆모습. 비록 나를 향한 웃음은 아니었지만 그 웃음으로 다시 얼굴을 마주할지도 모를 다음 주를 기약하며 한 주를 설레며 지새던 그 때.


설거지를 하다 그날이 떠올랐다.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친구 때문에 마시지도 못하는 술 두어 잔에 취해 길바닥에 나앉아 상심한 마음으로 밤새 별이나 새던 이십 대 초반 극 청춘의 일기 한 장.



그땐 취업도, 사업도, 투자도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그 어느 것 하나 끼어들 틈도 없이 짝사랑과 실연의 아픔 만으로도 밤을 새며 얘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순수한 감정에 충실했다. 마음껏 아팠고 아픔을 즐겼고 슬픔으로 절인 마음이 어쩌면 멋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단순한 감정에 깊고 짙게 심취했다. 그렇게 솔직한 나의 감정에 스스로 반응했고 그 감성의 풀장에 얼굴까지 푹 담가 이틀이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어질어질한 채 비틀대며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살았다.


두 번째 소곡집은 신록이 한창 푸르게 세상을 가득 채색한 이때 너무나도 오래된 과거의 감성들을 차곡차곡 끄집어내어 거실에 두세 개, 이 방과 저 방에 하나 씩 그리고 주방에 까지 불러다 앉혔다. 덕분에 지층처럼 쌓인 근심과 걱정은 말똥구리 똥마냥 잠시 구석에 굴려놓고 잔나비가 꺼내 준 기억들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관찰했다. 분명 그땐 심각했는데, 그게 세상의 전부였는데,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 세상이 내 것인 줄 알았고, 상처받은 마음엔 세상을 다 잃은 듯 극단의 슬픔에 절었는데. 이젠 이렇게 불러온 추억들을 앨범에 도로 넣는 대신 그저 입가의 잔잔한 미소 틈에, 웃을 때 지는 눈가의 주름에 슬며시 끼워본다.


그래서 ‘초록을 거머쥔 우리’가 다시 일상과 전투하며 공격받고 상처받을 때 한 번씩 그 기억들을 꺼내 삶의 전술에 압도되지 않으리라.


잔나비는 분명 ‘슬픔이여안녕’이라는 곡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잃어버린 그 자리에’ 두라고 했지만 그들보다 조금 더 살아보니 ‘잃어버린 것들’이라고 생각한 감정이 굴러와 내게 오랜만에 안겨준 감성은 이젠 ‘웃으며 즐길거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초록을 거머쥔 순간’ 푸르게 물든 손으로 개는 빨래는 흥겨웠고, 설거지는 감미로웠다. 지난 아픔과 안녕한지는 이미 오래니까. 난, 우리는 그저 손대는 것마다 푸르러지는 손으로 마음이 허해질 틈이 없는 이 ‘두 번째 소곡집’을 계속해서 플레이할 뿐.



굉장히 오랜만에 긴 환절기다. 4월, 5월 두 달 내내 완연한 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봄날이었다. 하루도 쉴 틈 없이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한 마음이었지만 덕분에 여름을 맞이할 준비는 충분했다. 연두는 초록으로 초록은 다시 붉게 물들다 땅으로 가겠지만 바뀌는 계절이 가져올 새로운 감성을 기다리며 난 오늘 하루의 계절을 완전히 살아보겠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tree

https://blog.naver.com/onenenly/22272663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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