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크 찬스에서 삼점슛 시도는 참기 힘드니까.
나는 딱히 잘하는 운동이 없었다. 어릴 때, 키도 작았고, 힘도 약했다. 축구를 하면 나보다 어린 동생들하고 부딪히면 픽픽 쓰러졌고, 달리기를 해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친구 J가 운동을 너무 잘해서 나는 운동을 정말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도 좋아하는 운동이 생겼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친척형과 노는 것이 좋아서 함께 시작한 농구였다. 나는 형을 정말 좋아했다. 5살이나 많은 형은 항상 나를 잘 놀아줬다. 형네 집에 놀러 가면 맨날 형이랑 놀고 싶다고 울고불고 떼쓰다가 어머니께 혼나고 집에 가곤 했다. 그런 형이 하는 농구가 참 좋았다. 그렇게 농구를 시작했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체육이 전공이셨는데, 선생님의 남편분도 농구를 엄청 잘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의 남편분이 왼손으로만 해도 선생님은 이길 수 없다고 하셨다. 아내와 농구하는 모습은 아마 그때부터 나의 로망이 되지 않았나 싶다. 여하튼 그런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나의 농구에 대한 평가를 남겨주셨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드리블이 능숙하고 농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당시 농구를 즐겨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기도 했고, 슬램덩크 보면서 농구 연습을 많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수준은 레이업도 제대로 넣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운동을 잘 못하던 내가 중학교를 가니 그래도 중간 정도의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었다. 농구를 즐겨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어 체육대회가 되면 농구대표로 시합을 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그냥 인원을 맞추는 수준에 불과했다. 딱히 뛰어난 점이 없었다. 당시에 농구를 같이 하는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하면 나는 거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떤 날은 친구 J와 배수지공원에서 농구를 했다. 리바운드를 해야 하는데, 점프를 뛰지 않아서 계속 상대편에게 공을 빼앗겼다.
"장용! 점프를 뛰어!"
내 마음은 점프를 뛰고 있는데, 왜 몸은 땅에 붙어 있었을까. 참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나의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물론 중학생 때보다는 실력이 좀 늘었다. 반 친구들 사이에서 농구 잘하는 애로 불리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농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책도 사서 읽기도 하고, 당시 싸이월드에서 유행하던 안희욱의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서 연습을 하기도 하고 다른 반과 시합도 뛰기도 했다. 정말 농구가 재밌었던 시기였다. 수능 보기 전날에도 농구했고, 수능 본 다음날도 농구했다. 날이 좋으면 날이 좋아서 농구하기 좋은 날이었고, 날이 흐리면 날이 흐려서 농구하기 좋은 날이었다. 비 오는 날이 참 싫었다. 비를 맞으면서 까지 농구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학교 등굣길에 친구 Y를 만났다. 친구 Y가 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줬다.
"대학교 가면 농구하는 사람이 인기 많대."
"아 정말?"
'역시! 농구를 하길 잘했어!'라고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농구를 했다. 그렇게 대학교를 진학한 나는 농구동아리에 가입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용기는 아니었고, 나의 초등학교 동창인 L의 고등학교 동창인 C와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당시 기숙사에서 농구동아리에 대한 소문을 듣기로는 기합도 받고 폭행도 당하고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처음 시초가 사회체육과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화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입한 농구동아리 ACE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폭행이나 폭언도 없었다. 대신 농구를 하다가 공이 멀리 나가면 신입생들이 뛰어가서 공을 가져온다거나, 물을 떠 온다거나 하는 정도의 것들은 있었다. 나는 이 정도는 충분히 납득이 되었고 할 만했다. 덕분에 이런 행동이 몸에 배어 군대에서도 나름 선임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여하튼 동아리에 가입을 하고 나서 농구를 다시 배웠다고 해도 무방했다. 정말 기본부터 연습을 했다. 레이업도 연습하고, 자유투도 연습하고, 컷인도 연습하고, 수비도 연습했다. 특히나 왼손 레이업 연습을 많이 했다. 양손을 잘 다루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주말이면 학생회관 앞에 있는 농구코트에서 왼손 레이업을 연습했다. 동아리 연습 때는 속공을 연습했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되어 인천에 돌아왔을 때, 친구들에게 내가 배운 것을 공유했다.
"얘들아, 용준이가 선진 농구 배워왔다!"
선진 농구라니 참 웃긴 말이다. 그저 기본기 연습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선진 농구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우리들은 기본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여하튼 그걸 토대로 근처 공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시합을 해서 많은 승리를 거뒀다. 친구들에게 인정도 받다 보니, 굉장히 뿌듯했다. 대학교가 멀어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래서 아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어머니께서 가끔 전화를 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농구를 하고 있었다.
"어디니?"
"아, 저 농구했어요."
"농구하려고 학교 갔니?"
"네, 거의 그렇죠."
이런 대화가 지나간 후 전화가 끊어지곤 했다. 정말 농구하려고 대학교 갔나 싶을 정도로 농구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농구가 재밌었는지. 공강 시간마다 동아리방에서 농구공을 꺼내서 학생회관 앞에 나와 공을 던졌다. 던지다 보면 동아리 동기들을 만나기도 하고, 동아리 선배들을 만나기도 해서 심심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친구가 말했던 '대학 가면 농구하는 사람이 인기 많대'는 사실이 아니었다. 사실은 인기 많은 사람이 농구를 해야 인기가 많은 것이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도 농구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훈련병과 기무사 대기병, 그리고 기무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농구를 할 수 없었다. 중간에 맹장수술을 하는 바람에 대기병 기간이 길어졌고, 농구를 못 한지 3개월이 되어버렸다. 이등병 때는 이등병이라 생활관에서 해야 하는 일도 많았고, 눈치도 보였고 자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병 때는 다른 생활관 선임들에 눈에 들어 농구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생활관 돌아와서 엄청나게 혼났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상병이 되었을 때부터 자유롭게 농구를 했다. 논산훈련소에서 자대 배치를 기다릴 때 딱 두 가지 소원을 빌었었다. 첫 번째는 흙바닥이라도 좋으니 농구골대 있는 곳. 두 번째는 몸은 힘들어도 좋으니, 좋은 선임들이 있는 곳. 내 두 가지 소원이 모두 이뤄졌다. 물론, 모두 좋은 선임들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 내가 보고 배울 수 있는 멋진 선임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농구골대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소원은 체육관이 되어 있었다. 가끔은 혼자서 체육관을 쓰기도 했을 정도였다. 나에게 그런 행운은 없었다. 매주 주말을 기다렸고, 매주 주말 농구를 했다. 하루는 날을 잡고 농구를 했는데,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까지 농구를 한 적도 있다. 정말 농구에 미쳐있었다.
전역을 하고 나와 학교에서 다시 농구를 하게 되었다. 내가 신입생 때는 체육대회 때 농구를 하지 않았었는데, 전역한 이후로는 체육대회 종목에 농구가 추가되었다. 나는 우리 과를 대표해서 농구에 출전했다. 우리 과방에 농구 우승 트로피 하나 갖다 두겠다는 유치한 마음을 품고는 열심히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ACE에서도 잘하는 후배들이 있던 중국학과에게 밀려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그때부터 과 생활을 전혀 하지 않던 나를 알아보는 후배들이 늘어났다.
그다음 해에는 동아리 회장을 맡게 되었다. 'ACE 회장 장용준입니다.'라는 말이 괜히 좋았다. 나름대로 시도를 많이 했다. 광고과인 만큼 동아리 모집 포스터를 재미있게 만들고 싶었다. 동아리를 잘 운영해보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신입생들도 많이 받고, 연습도 체계적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 혼자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선배들은 연습시간에 늦게 와서 기본 훈련은 참여하지 않았고, 신입생들의 실력은 너무나 부족했다. 그 해 우리는 대학생활체육대축전이라고 하는 대회에 참여했다. 신입생들에게도 많은 기회를 주고 싶었으나, 경험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실력 차이가 많이 났다. 결과는 예선 탈락이었다.
하지만 체육대회 때는 달랐다. 우리 과 신입생들이 다들 키도 크고 실력도 좋았다. 무난하게 우승을 차지하고, 트로피를 우리 과방에 안착시켰다. 우승 트로피를 우리 과 대표로 내가 직접 받게 되었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 비록 작은 대회였지만 나에게는 첫 우승이었으니까.
4학년이 되어서 다시 참여한 대학생활체육대축전(이하 '축전')은 참 많은 기억이 남는다. 당시에 다른 학교에 강팀들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그 강팀들과 예선부터 만나게 되었다. 나는 S에게 우리는 어차피 예선 탈락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두 경기 뛰고, 같이 영화나 보러 가자고 했다. 그렇게 S도 함께 축전을 함께 구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강팀들이 같은 날 개최되는 다른 대회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축전'에서 우승을 하게 되면 다음 해에 전국대회를 참여할 수 있어 꽤 중요한 대회였다. 하지만, 그 팀들이 다른 대회를 출전하면서 우리의 대진이 변경되었다. 첫 경기에서 20점 차로 대승을 거뒀다. 목표가 예선 탈락에서 우승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경기가 준결승이었다. 역시 20점 차로 대승을 거뒀다.
"우리 이러다 진짜 우승하는 거 아니야?"
"우승 한 번 하자!"
진심이 절반 이상 섞인 농담을 던지며 우리는 결승전을 준비했다. 결승전은 꽤 힘들었다. 상대팀의 수비도 꽤나 튼튼했고, 공격력도 좋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작전을 수정하며 힘을 냈다. 그렇게 마지막 4 쿼터 1분 정도를 남기고 1점 차로 이기고 있었다. 그때 우리 팀이 자유투를 얻게 되었고, 하나를 넣었다. 두 번째 자유투가 실패했을 때, 우리는 아주 큰 위기를 맞이했으나 공격 리바운드를 잡아내면서 승기를 잡았다. 결국 4점 차로 승리하며 우리는 축전에서 우승했다. 체육대회가 아닌 농구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아직도 참 행복한 기억이다. 지금도 회상하면 기분이 참 좋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 동안 농구를 자주 못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농구였지만, 생업에 치여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그래도 농구를 놓을 수 없어 친구들과 주말마다 모여서 농구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조금씩 농구를 자주 할 때쯤, 친구 K가 농구 동호회에 가입했다. 나도 같이 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고, 동호회에 가입했다. 나는 미들슛이 꽤나 강력한 무기였다. 대신 단점은 3점 슛이었다. 3점 슛은 나의 약점이었다. 하지만 주짓수를 배우고, 최근에는 러닝을 뛰면서 전체적인 근력이 좋아져서 그런지 3점 슛을 쏘게 되었다.
근데 강점이 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기도 했다. 내가 3점 슛을 잘 쏘지 못할 때는 어차피 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전혀 욕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패스도 많이 하고, 좀 더 확실한 미들슛을 많이 시도했었다. 하지만 3점 슛을 쏘게 되자, 미들슛을 쏠 수 있는 찬스에서도 괜히 3점 라인 뒤로 물러나 3점 슛을 쏘기 시작했다. 패스를 하거나 더 좋은 기회가 많은데도 3점 슛의 달콤함에 그 기회들을 스스로 없애버렸다. 3점 슛이 전부 다 잘 들어가면 참 좋겠지만, 3점 슛이라는 것이 거리가 멀어지는 만큼 확률도 떨어졌다. 애매한 능력은 때론 독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 독이 되지 않도록 애매하지 않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내가 시도하는 3점 슛이 꽤나 확률이 높은 시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노마크 찬스에서 삼점슛 시도는 참기 힘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