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세 달 안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마지막 기억으로 삼아 눈을 감아야 할까? 드라마 ‘서른, 아홉’을 보며 상상했다. 등장인물 중 찬영이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실을 고한다. 그들이 소식을 접할 때마다 무너지는 표정은 하나같이 다르다만 슬픔이 극에 달해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은 동일하다.
난 만약 시한부 판정을 받을 시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해야 하나 골몰해 본다. 어떤 이는 가족에게, 또 다른 어떤 이는 애인에게, 또또 다른 어떤 이는 제일 친한 친구들에게 사실을 알릴 것이다. 아니면 혼자 묵언하고서 감당하다가 갈 수도 있다. 난 가장 먼저 제일 친한 친구 상아에게 알릴듯하다. 그러하고는 어떻게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아프지 않도록 전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댈 것 같다. 사실상 아프지 않음이란 없을 거다. 균열이 일다 못해 파괴되어 버릴 가족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훤하다. 그들을 아프게 한 내 몫은 죄가 될 수도 있겠다.
만일 죽는다면 내 장례식장에 찾아와줄 이들도 궁금해진다. 이따금 이런 상념에 사로잡혀 사람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담아보는 거다. 내가 혼이 된 상태로 장례식 방문객들을 살필 수 있을까? 사후세계란 게 진짜 존재할까?
난 내 장례식에 와주는 이들의 손을 스쳐지나고 싶다. 그들이 사는 동안 쥐었을 아픔, 고통, 슬픔, 좌절, 전부 내가 안고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 사람의 손엔 모든 게 있다 생각한다. 그래서 손금을 보는 걸까? 손금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하더라. 사는 동안 손을 사용해 참 많은 걸 잡고 놓는다. 닿았다 떨어진 것들. 잔해와 흔적은 필히 손안에 기록되는 거다.
난 죽기 전 사랑했던 이들에게 정말로 사랑하여 즐거웠다 하겠다. 덕분에 감정이란 감정은 죄다 느껴보고 멎을 수 있는 듯하다며 감사를 표하겠다. 슬퍼 우는 이들의 어깨를 꼬옥 안아주겠다. 나의 체온이 오래 가진 않기를 바랄 거다. 그게 적어도 그들을 살아가게 하진 않을듯하여서다. 때로는 떠난 이들의 기억이 사라졌으면 한다. 남겨진 것들이 감당하기엔 매우 가혹하단 판단에서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을 되새겨본다.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외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놀랍게도 온기가 되살아나는듯한 착각을 받았다. 난 솔직히 그때 외할머니가 불쌍하지 않았다. 엄마가 불쌍했다. “이제 엄마는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없어.” 하며 어린아이가 되어 울음을 터뜨리던 엄마가 불쌍했고 외할머니 댁 앞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붙잡고서 “너 인마 이제 누가 밥 주냐.” 미세한 떨림으로 울음을 감추며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아빠가 불쌍했다. 남겨진 이모와 이모부들이 불쌍했다. 추억을 간직하며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불쌍하여 불행해 보였다.
엄마는 여전히 외할머니를 그리워하신다. 아빠는 친할머니의 생신만 되시면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시고 담배를 입에 무신다. 이러한 것들이 가엾다. 애쓰는 것들은 아프다. 우린 아프기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닐 텐데. 우린 누군가를 아프게 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닐 텐데.
누군가를 해하는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 난 그게 설사 죽음이라 한들 너무하지 않다 생각한다. 누군가를 일부러 죽이는 것들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를 해하는 것들 역시다. 사랑하며 살아가기에도 모자란 세상인다. 한데 왜 뉴스에선 잔혹한 얘기들만 줄줄이 전해지는 것인지 분하고 애통하다.
현실이 무서워지는 날들이 있다. 차라리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기를 바라며 눈을 감는 날들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아끼고 싶지를 않아서 난 오늘도 사랑하고 내일도 사랑한단 말을 한다. 상냥한 사람들만 사는 세상에 존재하고 싶다. 겉과 내면에 생채기를 내는 인물들이 배제된 세상에서 살고 싶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두루두루 자유롭고 싶다.
난 내일 죽는다 하면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얼굴을 마주해야 하나, 이름을 적어본다. 굳이 핸드폰 속 대화 목록을 살피지 않아도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단 건 어쩌면 감사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여태 숨을 붙이는 일에 힘을 주는 역할일 것이다. 잘해야 한다. 잘해주고자 한다. 함께 오래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