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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석 Jul 29. 2019

조금은 더럽게 살자

전날 마신 술이 깨나 보다.


혓바닥부터 목구멍까지 말라붙어

가뭄때 물을 못댄 논바닥 같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기대했던 냉수가 없다. 쩍쩍갈라진 혓바닥을 달래줄

물이 없다.


물을 끓여본다.

결명자를 어렵게 찾아 한주먹 넣어본다.

덥다.

기다리다 못해 미지근한 수돗물을 한사발 마셨다.

얼음까지 딸랑딸랑 바치던 정수기를 얼마전에 없애버렸다.


어느 방송에서 정수기가 얼마나 더러운지에 대해 

억울한 죽음을 면키위한 상소문 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낱낱이 알려주었다.

- 상소문을 만든사람은 정수기 회사의 역모에 가담했다고 누명을 쓴 듯 했다. -


물론 전부를 믿은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를 배신감에 말없는 정수기의 목을 치고 싶었다.

결국 목은 치지 못하고, 유배를 보내버렸다. 




정수기를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와이프와 다 커버린 애들을 설득해야했고,

결명자차, 보리차가 얼마나 몸에 좋은지를 강변해야 했으며,

물끓이는게 힘들지 않고,

쫄쫄 애를 태우며 나오는 정수기 꼭지보다

벌컥벌컥 부워 마시는 물맛의 감성에 호소해야했다.


마침내 정수기를 양보한 와이프가 공기청정기 카드를 내민다.

요즘 세상에 집집마다 그것도 방방마다 다있는 공기청정기가 없는 집은

우리집 밖에 없다는 것과 대부분의 미세먼지 발원지가 중국이고, 

중국산 미세먼지는 특히 더 해로우며,

매달 가벼운 가격으로 렌탈이 가능하다는 것이

와이프의 논리였다.


맞다. 우리집에는 흔하디 흔한 공기청정기가 한대도 없다.


창문을 꼭꼭 닫고 사는 아파트에서 어린아이도 없는데

필요하면 날씨 좋은날 환기 한번씩 시키면 되지

황사마스크도 한두번 쓰면 버려야되는데, 

공기청정기 필터를 이틀마다 교체할수도 없고 하지도 않는데,

차라리 그 필터를 거쳐 나오는 공기가 더 안좋다는게 

또한 나의 주장이었다.



초등시절,

옆 짝꿍이 참 예뻤다.

하얀얼굴에 눈이 커다란 단발머리의 그아이는 다른애들한테는

새침해도 나한테는 지우개를 곧 잘 빌려주곤 했다.


겨울바람이 물러가고

따뜻한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은 그 아이의 머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빛이났다.


문득 쳐다본 그아이에 머리결 사이로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흡혈곤충인  '이' 였다.

- 요즘에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기야 멸종위기종이라는 말이 없으니,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다. -

한두마리가 아니었다.

겨울을 무사히 지낸 놈들이 봄볕에 슬슬 기어나온 모양이다.



그랬다. 그시절에는 선생님들이 정기적으로 머릿속 검사를 했고,

집집마다 DDT라고 하는 하얀가루의 초강력 살충제를 머리에 뿌려댔다.

머리속을 가루범벅을 하고, 

두세끼의 식사를 하고, 같은 이부자리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어머니가 신문지를 깔고, 

장날에 새로 장만한 촘촘한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내리면, 

신문지 위로 자유낙하를 하는 많은 군상들.



그놈들을 손톱으로 짖이겨 죽일때 들리는 "톡! 툭!" 소리,

철천지 원수를 죽이는 영화를 보며 느끼는 쾌감.

벼르고 벼르고, 어렵게 잡은것을 죽일때 느끼는 쾌감.


원수라는 말은 틀린말은 아니다. 나의 피를 빨라먹고 배를 불린 놈들이니, 


그렇게 잡아(?) 죽이고 나면, 더 커져보이는 주검과 그놈의 것인지 아니면, 나의 것인지

헷갈리는 유혈로 어느새 흑백의 신문지는 칼라판이 되었다.


한바탕 살생을 하고 엄마가 가져온 삶은 고구마에 김치를 쭉쭉 찢어 볼이 터져라 먹는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 손은 씻지 않았으리라.



2017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평균 82세란다.

2017년 기대수명 82세는 

2017년도에 태어난 아이에게 해당되는 이야기 이다.


내가 태어난 해의 기대수명은  58세 정도 란다.

난 이제 8년정도 남았다.  여자가 남자보다 6년을 더 오래산다고 하니,

와이프는 나보다 6년이나 더 정수기의 깨끗한 물과, 공기청정기의 맑은 공기를 마실거다. 


나의 그시절보다,  요즘 세상이 깨끗함에 더 민감해서 기대수명이 20년 넘게 차이가 나는걸까?

물론 의학의 발달, 식생활 등등 많은 인자들의 상관관계가 있을것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시절 기저귀도 안차고 온 마당을 기어다니며 닭똥이며 지렁이도 주워먹고,

군대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담배를 2갑씩 피워대도 아직까지 건강하다고 큰소리 치며

어제 술을 삐뚜러지게 같이 마신 직장선배의 나이는 56세이다.


내 기준과 같다면, 그 양반은 이제 2년 남았다.



너무 많은 걱정과  극성스러운 깨끗함,  지나친 민감함 속에서 사는거 같다.

세탁물의 종류대로, 청소하는 곳의 장소별로, 또는 계절별로....

온갖 종류의 세정제, 살균제, 소독제들 속에서 살아간다.


멸균실에 살지 못할 바에는 약간의 세균들 속에서 그놈들과 같이 살아야

면역력도 생기고 자가치유력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기야,  정수기든 공기청정기든 관리를 잘 하지 못하면 더러워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두고 이런 잡담을 하는

나의 선택적 편견 또한 깨끗함에 너무 민감하다는 불만과 모순이 되긴하다.


그냥 기대수명을 기대하며,  

조금은 더럽게 살아도 될 듯하다.



2019. 7. 29.    ㅅㅓㄱ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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