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정도의 주말부부 생활을 마치고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왔다.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인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주말부부로 보냈다.
혼자 지낸 시간도 그리 길지 않고,
주말이면 꼬박꼬박 집에 왔는데도
보따리가 제법 많았다.
딸아이가 쓰던 방을 정리해서
침대를 펴고, 책을 정리하고,
버리지 못한 옷가지도 쑤셔넣고 나니,
혼자 지내던 숙소랑 비슷하다.
갑작스런 환경변화는 또다른 스트레스를 준다는데,
그런 일은 없을것 같다.
나보다는 주중에는 홀가분하게 지냈던 와이프가 6년만에
돌아온 큰아들(?)이 더 신경 쓰일것이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한잔 타서 소파에 앉았다.
설거지를 마친 와이프는
집앞 커피숍으로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잠깐의 밤외출을 한다.
아들놈은 자기방에서 꼼짝을 안한다.
그나마, 새로 시작한 공부를 하는 모양이다.
거실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다보니,
회사숙소에 있을때나, 집에 있을때나 별반 차이가 없다.
TV를 켠다.
개그프로에 나오던 몇몇이 약발이 떨어진 유행어와 시들해진 인기를
실감 하였는지,
큰 덩치를 내세워 전국에 맛집이라는 곳을 찾아다니며,
밥공기를 몇개나 비웠냐며 서로 투덜대다가 밥상에 수북한 음식위로
또 다른 음식을 쌓아가며 히히덕 거린다.
같은 방송국, 중간광고에 '유니세프 기아구제' 캠페인이 나온다.
전화 한통화를 걸면 얼마를 후원하게 되며, 그 몇푼 안되는 후원금은
아프리카 굶주린 아이의 일주일치 식량이 된단다.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가수라는 남자는
자기집에서 자기새끼를 목욕을 시키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자기새끼 똥을 치우는 것을 많은수의 카메라맨들이 찍어
무슨 국가대표 결승전 마냥 생중계를 한다.
그 생중계의 목적을 난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
언젠부턴가 연예인들이 나와서 자기네들끼리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프로그램은 보지를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1조 이다.
'가정의 모든 권력은 TV 리모컨으로 부터 나온다'
주말에만 나에게 권력을 빼앗기던 이들이
평일 저녁에도 나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아빠 !. 아빠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치에는 관심이 전혀 없더니, 갑자기 왜그래?"
라며 아들놈이 진지한 눈으로 물어본다.
주권과 권력을 빼앗겨 자기가 보고싶은 프로그램을 못보게 되서
이런말을 하나 생각하다가,
아들놈 말처럼 뉴스채널을 돌려가며 보는게 사실이기도 하고,
뉴스를 보던중 어쩌다가 혼자말처럼 욕찌거리를 하는게 생각나
아들놈의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 맞는거 같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일본 여행에서 사온 20인치가 안되는
빨간색 TV가 있었다.
아버지는 작은 TV속 뉴스를 빼놓지 않고 보셨다.
박정희의 유신과 사선, 오선 당선결과를 보셨을거고,
'전땡뉴스' 까지 빨간색 TV로 빼놓지 않고 보셨다.
다음날 동네아저씨들과 모여 전날 9시 뉴스에 대해
몇시간이고 진지한 잡담(?)을 하셨다.
그 잡담속에서 '9시 뉴스' 를 놓친 아저씨들은 말발에서 밀렸고,
목소리도 작았다.
저게 무슨 재미가 있다고 저리 빼놓지 않고 보실까?
아슬아슬한 엔딩을 만들어
'다음주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라며
끝나자 마자 '일주일의 기다림'에 대한 걱정부터 하게 만드는
주말연속극도 아닌데,
어짜피 내일도 모레도 뉴스방송은 계속 나올건데,
그것도 7시, 9시, 마감뉴스까지 말이다.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젊으셨다.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많은 '뉴스의 통로'를 가질수 없었다.
아침에 배달되는 '조선일보' 와
저녁 '9시 뉴스'가 아버지의 유일한 뉴스 통로였다.
지금은 흘러넘치는게 인터넷 방송이고, 백단위를 넘어가는 TV채널이 있다.
TV뉴스도 마찬가지이다. 공영방송이다, 종편이다...
게다가, TV와 컴퓨터를 합쳐놓은 손바닥 만한 물건을 너나 없이
들고 다니는 세상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믿기 힘든 참말과 그렇듯한 거짓말이 뒤섞여 오물처럼 쌓이고,
매일매일 쌓여지는 오물에
먼저 쌓인 오물은 그 더러움과 자극정도에 따라
밀려나고, 머문다.
아버지의 뉴스보다
지금 나의 뉴스가
훼손되고, 오염된 것들이 많을까?
잠시 고민해 본다.
어버지가 보고, 듣던 뉴스는
아마도 오염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가질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뉴스에 대해 다른쪽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채널도 없었을 것이고,
오염되었을 수 있다는 의심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와 사회에 불손하다고
낙인 찍히는 시절이었으니....
그냥 조간신문에서 읽혀지고, 9시 뉴스에서 말해주는 그대로 사실이 되고,
그 무조건적 사실은 다음날 동네아저씨들의 잡담속에서 퍼져나가고,
퍼져나간것들은 한줌의 객관성도 없이
'조간신문의 편집장'과 '9시 뉴스의 보도국장'의 의도에 맞춰져
확증편향으로 굳어져 갔을 것이다.
그럼, 지금의 나는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정의롭고, 공정한 시대를 사는것일까?
뉴스와 뉴스는 흘러 넘치다 못해, 밀려들고
밀려드는 것들은 그것들을 만든 사람마다 다르게 말을 한다.
그 다르게 말하는것에 대한 맞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나보고 하라는 것인지....
나는 모를일이다.
그냥 정보수신의 채널이 하나인 시절에
그 하나의 채널이 알려주는 모든것을 사실로 그냥 믿고 사는것이
속 편할거 같다는 생각마져 든다.
하지만, '그렇게 그냥 믿고 산다면...' 이라는 가정은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더 크게 따라 온다.
나로인해 주권과 권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갑자기 바뀐 환경에 따른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리모콘은 가급적 잡지 말아야겠다.
2019. 10. 09. ㅅㅓㄱ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