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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May 14. 2021

[생각 19] 원래 잘하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엄마.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했는데도 맛이 없어."

"그럼 간장을 적당히 넣어봐."

"양조간장이라고 쓰여 있는 거 넣어도 돼?"

"아니 국간장. 국간장 적당히 넣어봐."

"적당한 게 어느 정도인데?"

"국물 보고 적당히!"



요알못은 양조간장과 국간장도 어렵지만, 제일 어려운 건 엄마 레시피의 '적당히'이다. 적당히 단어가 나오는 순간 오로지 내 감에 의지해서 넣어야 하는데, 감이 없는 사람에게 감 찾기란 로또 3등 이상 맞기보다 어렵다. 


엄마의 레시피를 전수받아 보려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의 적당히는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적당히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간 음식은 '김치'이다. 김치 담그는 날마다 쫄병 노릇을 하는 것도 십 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들어가는 재료를 아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엄마 김치를 전국에 알려도 모자랄 정도로 맛있다고 자부하는 자식이건만, 엄마의 적당히가 판치는 김치 레시피를 받아 가는 건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뭐든지 다 잘하는 엄마는 내 맘도 몰라라고 치부했다.






그저께는 아빠와 같이 벽걸이 TV를 떼어 TV장 위에 올려놓기로 했다. 생각보다 높게 매달린 TV에, 오래 TV를 보면 볼수록 부모님 뒷목이 아프다는 게 이유였다. TV를 직접 보기보다 앱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짤로 TV를 보는 나로서는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이제는 고릿적 옛날 TV가 되어버린 두꺼운 모니터를 받칠 TV 받침대가 배송되자마자 아빠와 나는 방 여기저기 연결되어있는 랜선과 TV에 연결된 셋톱박스에 연결된 선 13개를 구분하는 일부터가 난관이었다. 일일이 하나하나 이름을 써서 전선에 마크한 뒤, 모든 선을 뽑고 TV를 내려서 무사히 안착시키기까지 온 가족이 TV에 매달려 낑낑거렸다.


겨우 TV와 받침대를 연결해 TV장 위에 올려두고 대망의 전선 연결만 남았다. 진짜 랜선 파티가 열려 아수라장이 된 거실을 보자 엄마는 땀이 나니 먹을 과일 깎아온다며 진작에 달아나셨고, 아빠와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선을 하나하나 연결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주는 참외를 아기참새처럼 받아먹은 부녀는 인터넷이 연결되자 만세를 외쳤고, 다시 그 전선 뭉탱이를 TV 뒤로 숨기기 바빴다.


고생한 김에 올해 초 즈음부터 연결이 간당간당하게 끊어지던 랜선 하나를 아예 새로 교체했는데, 거실과 제일 먼 내 방에 랜선을 연결하는 일이라 벽을 타고 랜선을 연결하는 게 일이었다. 아빠가 저번에 설치하시는 모습을 봤으니 이번에는 내가 직접 해보라며 목장갑과 글루건을 건네주셨다. 음? 원하지 않던 일이 또 생겼다.


원래 있던 랜선을 뜯는데 몰딩 따라 연결되어 있으니 벽지 안 뜯어지게 조심하라는 부모님의 따뜻한 눈총은 덤이었다. 아주 따사로운 눈총을 받으며 랜선을 제거하고 원래 있던 모양보다 더 잘 안 보이게끔(!) 방문 사이 틈마다 글루건과 나사에 끼운 고리로 고정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빠가 할 때는 쉬워 보이던데 왜 나는 피 땀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겨우 벽을 따라 15M짜리 랜선을 이은 나는 다행히 데이지 않은 손을 건질 수 있었다. 드디어 내 방에도 인터넷이 다시 빠방하게 들어왔다. 현대 문명 만만세. 거미줄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글루 거미줄 잔해와 조각을 치우며 조금 현타가 온 표정으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이런 거 다 어디서 배웠어?"

"글쎄? 그냥 하는 거지 뭐."

"근데 왜 다 잘해?"

"처음부터 잘하는 게 어디 있어. 다 하다 보면 느는 거고, 늘다 보면 잘하게 되는 거야."


우문현답에 마저 글루 잔해를 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답에 엄마가 한마디 보탰다.


"그런 김에 아까 끓인 김치찌개 간 좀 보고 간 맞춰봐."

"? 엄마가 끓였잖아."

"그러니까 간 좀 보라고. 간 보는 것도 해봐야 늘지!"


황망한 표정으로 바닥을 치우고 손을 씻었다. 김치찌개 간 보는 무시무시한 과제 앞에 서서 돼지고기만 몇 개를 골라 먹은 것 같다. 대충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휘적이곤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사실 싱거웠다.) 점차 집안이 시트콤화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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