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유효기간

머리의 기억, 몸의 기억

by 효문

두어 달 전부터 짧은 영어 기사를 하나씩 읽고 있다. <어쩌다 어른>에 출연한 김미경 강사가 잠깐 영어로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받아서 바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성격상 일단 생각하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치명적인 단점은 지구력이 약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숱한 시작은 있었으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 도중하차 했다는 것이다. 참 다행스럽게도 나이가 들면서 빈약한 지구력은 조금 단단해진 것 같다.

정확하게는 지구력이 강해졌다기보다는 생활이 심플해졌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청년기에는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너무 많아서 뭔가 하나를 진득하기가 어려웠다. 이것을 하면 저것이 하고 싶고, 저것을 하면 또 다른 것이 하고 싶고... 그러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이런 나를 보며 엄마는 종종 혀를 차곤 했다.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저녁거리가 없다더니..."


갱년기를 겪으며 몸이 힘들어지고, 코로나가 겹치면서 집콕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덕분에 생활은 한없이 심플해졌다. 뭔가를 진득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본의 아니게 형성된 것이다. 처음 시작한 것이 달리기였고, 두어 달 전부터 시작한 것이 영어공부이다. 짧은 기사를 하나 읽는 것이니 공부라고 하기도 민망하지만 단어를 외우기가 쉽지 않다. 운 좋게 '쉬운 기사'를 읽는 날이면 '그 사이 나의 실력이 늘었나?' 착각을 하며 입이 귀에 걸리고, 의학 관련 기사가 걸린 날이면 여기저기서 단어의 지뢰가 터져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다. cardiovascular(심혈관계), diabetes(당뇨병), chronic bronchitis(만성기관지염)...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여백이다. 이런 날이면 정말 강렬하게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든다. 반백년을 살아온 세월의 힘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유혹을 꾹 누르고 억지로 기사를 읽고 꾸역꾸역 단어를 머릿속에 욱여넣지만, 자고 일어나면 완삭~ 내 머릿속에 성능 좋은 지우개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몸속에는 웬만해서는 지워지지 않는 성능 좋은 유성펜이 탑재되어 있는 모양이다. 몸에 새겨진 기억들은 긴긴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꽤 많다. 8살 무렵 오빠가 잡아주어서 배웠던 자전거 타는 법, 당연히 기억한다. 10살 무렵 태풍으로 물난리가 나서 집이 물에 잠겼을 때, 수영장 생겼다며 퐁당거리다가 혼났던 기억, 운동회날 먹었던 김밥의 맛과 중학교 졸업식 날 먹었던 짜장면 맛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날의 소리와 맛, 냄새들이 생생하다. 실제로 뇌과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냄새나 맛의 기억, 또 감정이 개입된 기억은 수명이 길다고 한다. 우리 두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편도체의 감정을 살피면서 기억을 취사선택하는데 뭔가를 보고 듣거나 경험할 때 '좋다, 신나다, 싫다, 슬프다'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면 그 기억은 오래 보관한다는 것이다.


초경을 하고 완경을 맞기까지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충격과 두려움으로 시작해서 때로는 귀찮았고, 때로는 괴로웠고, 아이가 찾아왔을 때는 환희로웠고, 마침내 그 여정을 다 마쳤을 때는 후련하면서도 쓸쓸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과 동반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식욕'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월경전증후군'을 겪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생리를 할 무렵이면 폭발하는 '식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식욕 폭발'은 완경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그날이 돌아오면 식욕을 부추긴다. 실체는 없어졌는데, 기억은 그대로 남았다. 내 몸은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사라지려는 여성성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청춘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아, 살짝 씁쓸해지려고 한다.


게다가 몸에 새겨진 식욕의 기억은 '뱃살'까지 덤으로 안겨준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좀체 빠지지 않고, 겨우 빼더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쉽게 다시 찌는 뱃살은 정말 반갑지 않은 선물이다. 억울하고 슬프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자연의 섭리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긴 하지만 정신승리는 해야겠기에 큰소리는 친다. 몸의 기억을 쉬이 지울 수 없다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덧입히면 된다고. 그래서 오늘도 문신처럼 몸에 새긴다. 달리는 동안 쏟아지는 땀과 차오르는 호흡을. 산책길의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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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방송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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