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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투 서울, 유기 공포와 회귀 본능 사이에서

데이비 추 감독. 리턴 투 서울

by 백승권

다시 버림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기대는 독이다. 하지만 어떻게 상상하지 않을 수 있나. 실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데. 그것도 친부모의. 프레디(박지민)는 두려웠다. 다시 버림받을까 봐. 다 커서 잠시 들른 한국, 무작정, 아니 본능적으로 자신의 원본을 찾기로 했다. 한국인의 육체와 프랑스인의 정신으로. 프레디는 갓난아이 때 자신을 프랑스로 입양 보낸 한국인 친부모를 수소문한다. 술자리에서 아무나 하고 합석하고 아무나 하고 자고 아무렇게나 방탕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프레디였지만, 친부모를 진짜 찾길 바라냐는 질문 앞에서는 한없이 망설여졌다. 나는 여기에 왜 와서 굳이 이 사람들을 찾고 있나. 다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기어이 찾아야 한다는 의지 사이에서 프레디는 방황하고 있었다. 늘 당당했지만 이때만큼은 머리와 몸을 분리하고 싶었다.


한국 드라마에서 잃어버린 부모와의 재회는 흔히 남북이산가족 찾기 이미지를 소환한다. 눈물범벅에 온몸이 풀린 채 끌어안고 어쩔 줄 모른 채 흐느끼며 제대로 들리진 않아도 모두가 그 의미를 수 있을 것 같은 절절함의 공감대. 프레디는 어떤 이미지를 기대했을까. 학습되지 않았으니 아마 백지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코리안 스타일 밥상과 식구들을 마주한다. 할머니, 고모, 아빠, 아빠의 부인, 그들의 자녀들... 프레디에게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 한국어를 쓸 줄도 말할 줄도 몰랐다. 언어의 장벽은 대화의 속도를 더디게 했다. 생전 처음 본 아빠라는 인간은 술에 취해 문자를 계속 보냈다. 오랜 죄책감으로 인한 너무 늦은 (이기적인) 속죄 의식. 프레디는 귀찮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맘에 드는 게 없었다. 엄마는 만나지 못했다. 그들과 같이 살지 않았으니까. 프레디는 서울에서 군산으로 다시 서울로 다시 프랑스로 다시 서울로 다시 군산으로 수년간 유럽과 아시아 대도시와 지방을 오간다.


느닷없이 가까운 이들에게 불쑥 화를 낸다. 자신을 버린 이들에게 제대로 화를 내지 못해서. 그런 자신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래도 그리워하는 자신이 짜증 나서. 생일. 사진이 날아온다. 촌스러운 한국인 아빠의 해맑은 웃음과 어색한 축하메시지. 프레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는다. 이런 거였어. 시시해도 좋은 거. 어쩔 수 없이 따스한 거. 내가 궁금했던 진짜의 감정. 이거였구나. 내가 기다린 게 이런 거였을지 몰라. 수년에 걸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인 아빠와의 울퉁불퉁했던 사이는 조금 느슨해진다. 그의 감정을 믿게 된다. 평생 미안하고 보고 싶었다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던 변명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리고 남은 건 한국인 엄마. 프레디는 두려웠다. 그녀가 자신을 끝내 거절할까 봐, 밀어낼까 봐. 자신은 출생부터 성인까지 평생 자신의 원본에게 거절당한 존재가 될까 봐.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은 얼마나 심연을 짓누르나.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하고 슬프게 만드나. 얼마나 길바닥에서 깨어나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을 후회하는 흉물처럼 만드나. 본 적도 없는 자신의 탄생을 후회하게 만드나. 하지만 무형의 힘이 프레디를 움직이고 있었다. 너를 낳은 사람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리턴 투 서울의 수많은 빈틈들은 이미지로 채워진다. 공간, 조명, 흔들림, 표정, 정지. 프레디 역시 이미지의 일부가 된다. 자막이 필요한 프랑스어보다 침묵의 표정이 더 많은 걸 표현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배운 것들이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태도의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내내 미아처럼 몸도 정신도 방황해야 했다. 생일이 싫었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자들에게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직접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프레디는 한국인 부모들을 지나 겨우 원점에 서게 되었다. 남은 인생의 경로가 프랑스일지 한국일지 다른 우주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거울 앞에 서게 되었다. 한 번의 생에서 이런 기회를 얻는 이는 매우 드물다. 끝나지 않을 듯한 방황은 이제야 명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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