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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파트에서 구하옵소서,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 콘크리트 유토피아

by 백승권

어차피 언젠가 우리는 죽는다.

심지어 어떻게 죽을지도 선택하지 못한다.

물론 일부는 스스로 실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좀 더 선택지가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한정된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판단한다.

이걸 선택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갈구한다.

현재는 만족스러운 적 없었고

미래의 어떤 선택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비교적 나은 결과를 원한다.

기준은 대부분 숫자로 표현된다.

더 높은 숫자를 소유하려고 발악한다.

자신의 과거보다 더 높은 숫자를 가지려고 하고

가까운 주변보다 더 높은 숫자를 가지려고 한다.

그 숫자를 가진 사람들끼리 뭉친다.

우린 이 숫자를 가지기 위해…

지금껏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어.

이건 내 삶의 성적표야, 또는 나보다

먼저 태어나 열심히 살아준 부모님이 준 숫자야.

운이든 탐욕이든 내 능력이야.

이걸 이 숫자를 높이려면 혼자 힘으로는 무리야.

뭉쳐야 해. 새로운 우리가 되어야 해.

담을 쌓는다. 선을 긋는다. 편을 가른다.

지면을 뒤덮는 거대한 우상이 탄생한다.

누군가는 저걸 쌓아 올리다

떨어지고 무너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새로운 열쇠를 받는 순간

그걸 떠올리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세상이 무너져도 여기만 멀쩡하면 그만이다.

여기는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계급의 탑, 아파트.

세상이 무너졌는데 계급이 무슨 소용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에 젖은 자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돌덩이를 부둥켜 끌어안는다.

멸망한 세상, 불쌍한 자들만 남아

자신의 과거와 싸운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여긴 신이 없고 구조 헬기도 오지 않으며

정치인은 얼굴에 주먹을 맞는다.

한 남성(이병헌)이 자신의 과거를 지키기 위해

이웃집의 불을 꺼주고

이웃을 대표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음식을 모으고 단결을 도모한다.

사랑과 범죄로 점철된 과거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부었고

완전히 사기당했으며 살인까지 저질렀지만

아무것도 돌려받을 수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며 전부 다 죽었다.

무너진 세상의 풍경은 그의 영혼과

심연을 찍은 엑스레이 같았다.

누구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실, 미래, 세상.

그는 그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아파트라는 콘크리트탑에 의식을 의탁한

주술인형이었다.

의미는 없었다. 분노와 증오의 잔여물이

시체에서 배출되는 가스처럼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서 인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외부에서는 난세가 탄생시킨 영웅의 정의로 보였지만

그에겐 그저 환상을 지키는 행위였다.

망상에서 깨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자신의 원형을 바라보는 기능을 상실했다.

그래서 비밀을 발설한 자를

벼랑 끝으로 집어던질 수 있었다.

또 다른 주술인형을 만들려고도 했다.

너에게 소중한 인간을 지키고 싶다면

남에게 소중한 인간을 가차 없이 죽여보렴.

아파트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재난 생존자들 전부를 밖으로 쫓아냈고

쫓겨난 대다수는 밖에서 얼거나 굶어 죽었다.

아이, 여성, 노인 가리지 않았다.

남은 자들은 다시 편을 가르고 선을 긋고

싸우고 죽이고 죽어갔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후

무너진 아파트 잔해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어떤 남자의 마지막

환상 같은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아파트에게 선택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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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