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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r 19. 2024

나는 아직 정신병동에 입원하지 않았다

넷플리스 오리지널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망각의 강물로

기억을 지우겠습니다


119를 불러야 될지 말아야 될지

한참을 몇 번을 망설인대요

이게 실제 죽음이 아니라

공황 장애라는 걸 아는데도

그 공포감을 못 이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발작이 올까 봐

하루 종일 불안한 거예요


엄마, 나도 아픈데

엄마는 간호사인데 왜

나는 간호 안 해 줘?


죽음에 무뎌지려고 하지 마


순간 저 차가 나를 치고 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해.

다른 사람들 기분 나쁠지

어떨지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꿈을 이루려면 그 꿈

근처에 있어야 된대요



나도 우울증, 정신질환, 조현병, 공황장애, ADHD 등 이런 진단 결과에 대해 전문의를 통해 정확하게 듣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지금은 논의가 전보다 훨씬 쉽고 태도가 나아졌지만 과거에는 미디어나 일상에서 인격 비하적인 유머나 기분 나쁜 농담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실제 저런 증상을 갖고 있는 분들에 대한 무시와 회피 정서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진지하게 자신의 상태를 살피기도 전에 사회적 인식이 신경 쓰였다. 내 경우에는 10년 넘게 회사 다니는 동안 N차에 걸쳐 정신적 혼란을 겪은 것에 대한 상태를 점검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추측과 망각이 아닌 지식과 정보를 통한 분석을 하고 싶었다. 객관적인 언어로 듣고 읽고 싶었다. 인바디처럼 정신도 숫자와 그래프로 상태가 표기되었으면 좋겠구나 싶었다. 가까운 동료가 장기 연애를 마친 후 상담했다는 이야길 들어 본 적 있었고 실제로 스스로의 상태가 위태롭게 느껴져서 가까운 병원을 검색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지 않았다. 정신적 고통이 어떻게 진도를 나가든 시간과 상황도 급변하고 있었고 거기에 대처하고 적응하다 보니 병원 방문은 후순위로 미뤄지고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다 감기가 낫듯 나아졌다. 감기와 다르다면 감기 증세는 평생 머릿속에 떠오르며 귀찮게 하지 않지만 정신적 고통은 인물과 대화, 당시의 감정 등이 계속 떠오른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생존자라 여기며 늘 누르고 있어야 했다. 고통의 기억은 멱살을 잡고 끌어올려 노려보며 정면대결을 신청한다고 물러나 다시 오지 않은 악당이 아니었다. 고통의 기억은 어떤 세제와 물리적인 압박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보이는 흉터였다. 문제는 그 흉터를 떠올릴 때마다 통증도 같이 떠오른다는 점이었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다가 다시 떠올랐다. 내게도 몇 가지 약한 자해의 습관이 있다. 오래전 48일을 정도를 연속 출근하고 야근하고 밝은 시간에 퇴근하다가 실제로 교보타워 사거리 근처에서 달려오는 차량에 몸을 던지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분노가 내 등을 떠미는 게 아니었다. 그냥 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의 앞으로 가서 부딪히면 끝나겠구나. 뭐가 끝날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없겠구나. 그때 나는 연애 중이었고 회사 밖에서까지 우울하거나 불행하지는 않은 사람이었을 텐데. 그냥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휘감았고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를 멍하니 수차례 멍하니 바라봤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직도 그때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 어떤 브랜드의 카피를 쓰고 있었는지도 기억난다. 당시 회사에서 5년 정도 일하고 이직했다. 지금 복기해 보면 그 후로 4년 동안은 어지럼증 외에는 (물론 이것도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우울증세라고 떠올릴만한 기억이 없다. 다른 회사에 다시 일이 터졌다.  


팀장급들과 사이가 좋았던 역사가 별로 없다. 그들에게도 내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번째 거대한 우울 증세는 실질적으로 내가 아닌 동료들이 당하는 처참한 광경과 함께 찾아왔다.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폐쇄된 공간에서 특정 인물들에게 칼이 찔리고 있는데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도 같은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도 피를 너무 쏟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주변의 동료들도 같은 지경이었다. 그들의 눈코입에서 매번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특정 인물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으로 시간과 공간, 신체와 정신을 결박하고 죽지도 못할 고문을 죽을 때까지 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 부조리와 부당함을 견디고 있어야 한다는 걸 납득하기 어려웠고 임계점에 달하자 '반응'을 했다. 그들은 반응에 격노했다. 아니 어떻게 우리의 권력 행사에 거부권을 들려고 할 수 있지? 하나, 둘, 셋... 시간과 공간 차이가 있지만 각자 다른 캐릭터가 각자 다른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미 잊었거나 당시에는 어쩔 수 없거나... 어쩌구저쩌구 말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지금 이 글에서 발언권이 없다. 그들 덕분에 내 카피라이터 커리어는 다양한 곡선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을 겪으며 낙차 큰 커브도 스트라이크에 적확하게 꽂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로 지는 기분이어도 10:9로 역전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무엇보다 실력을 검증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인정받고 싶던 분야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가공할 성과와 함께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때의 성과는 지금까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금 망설였던 결정의 방향을 뒤흔들 만큼 썼던 카피들은 지금도 어떤 기록이 되었다. 커리어와 별개로 그들을 겪으며 다양한 심연의 마모, 균열을 겪어야 했다. 내 입장에의 부조리, 폭언, 폭력, (여성동료에 대한) 성차별 등에 저항했고 그들 입장에서 나는 무슨 또라이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래전 일이고 새벽별보다 많았던 야근일수로 야근택시들이 기다리는 기다리는 고객이 된 시절이었다. 고성과 폭언을 직간접으로 그때처럼 자주 들었던 적도 없었다. 그때의 어두운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만큼 밝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지만 어둠과 파편은 여전히 열이 날 때마다 보이는 문신처럼 각인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겪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경험들이 많았다.


세 번째로 우울증세를 자각한 경험 역시 회사다. 회사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처음 겪는 고난을 당하는 곳이기도 했다. 나 역시 어떤 관점으로는 가해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한다. 하지만 내 허물을 향한 심증은 늘 어둡고 침침하며 영영 미확인이다. 지금 글로 옮기는 것들은 아무리 내면의 온갖 필터링 시스템을 다 거쳤어도 탁함이 가시지 않는 기억과 감정, 경험들이다. 세 번째는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일이라 다양하게 끄집어낼 수 있다. 고성과 압박의 반복이 당시는 (보이지 않는) 헛웃음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는데 나중에 잔상에 오래 남았다. 이해하기는 그만뒀는데 인간의 양가적인 면을 제대로 깨닫게 된 기회였다. 내가 현상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알 수 있었다. 감정이 텅 빈 상태가 이어졌다. 어떤 포인트가 된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일정 시기가 지나자 무감정과 무감각의 시기가 이어졌다. 감정이 내면에서 돋아나지 않았다. 분명히 외부적인 환경과 자극이 있을 텐데 내면의 에너지, 동력이 완전히 메마르거나 멈춘 것 같았다. 그때 처음 입을 열어 지인에게 말했던 것 같다. 나 상담 좀 받아야겠다고. 어떻겠냐고. 제 발로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것도 용기다... 내 이야기와 감정, 심정 어떤 거든 말만 하면 일정한 비용을 받고 들어주며 적절한 코멘트를 해주거나 가이드를 주는 전문가가 있을 것이다... 지금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닐까... 스스로 아무리 되뇌고 자기 합리화하고 자학을 거부하고 감정 소모가 큰 타자 혐오를 멈추고 이 난리 피우면 뭐 하냐... 절과 산을 불태우고 타국으로 바다를 건너는 배를 타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불타고 말 것이다... 전문가에게 뭐라도 털어놓아보자... 이랬는데. 휘청휘청 휘적휘적 흘러가다 보니 타이밍을 놓쳤고 환경의 변화를 이뤄냈다. 참... 뭐랄까... 브루스 베인과는 다르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가파르게 굴곡진 감옥벽을 오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참 그때는 밑에서 엄청난 에너지로 응원하는 세력들이 있었지. 그래서 티끌이나마 다시 오르고 다시 떨어져도 다시 오르고 기어이 올라가 밑에 있는 자들에게 밧줄을 던지는 성취를 거둘 수 있었지. 나는 밑을 보면 암흑이었다. 떨어지는 시간도 장소도 모르겠고 그저 우주 최고의 암흑물질로 빨려 들어가 영영 형체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직을 했다. 당시 가해자가 숙련된 고문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다만 더 일찍 사슬을 끓는 시기를 만나지 못했고 최선을 다했지만 매번 늘 최악이었으며 생각해 보면 준비도 되지 않고 방법을 몰랐고 무엇보다 해당 조직의 요구사항과 나라는 개인이 가진 조건이 달랐던 것 같다. 거기서는 밤에 혼자 걸었던 생각이 자주 난다. 차에 뛰어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번 같은 코스를 혼자 오랫동안 걸었던 기억이 난다. 마주 오는 차량들의 불빛과 상점들, 늘 사람이 없던 어떤 버스정류장과 복잡하고 좁은 골목, 신호등이 빨리 바뀌지 않던 사거리 등이 떠오른다. 지난주에 그랬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차원이 다른 곳으로 이직이 이뤄졌고 그곳에서 길고 안정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저런 서너 번의 암울한 잔상들이 옅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기존의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관습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어려 번 시도해야 했다. 마치 그 상태가 내가 겪어야 할 당연한 감정과 경험의 상태처럼 되어버릴까 봐 신경 써서 경계했다. 고통과 좌절의 기억은 매혹적이었으니까. 그때를 이토록 구체적으로 기억한다는 건 그때의 자신을 자각했다는 것인데 나의 내면은 그때를 마치 어떤 돌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상태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막아야 했다. 그땐 돌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때가 아니라고. 결박해야 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등장하는 여러 환자들의 경우를 보다가 새삼 떠올랐다. 폐쇄된 공간에 물을 가득 채우고 당장 익사하거나 질식할 듯한 고통에 대한 묘사가 섬뜩하면서도 생생해서 개인적 경우와 유사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다치거나 병에 걸려서 약 먹고 치료받는다는 말은 듣기엔 좋고 편해 보이지만 사실 아직은 잘 와닿지 않는다. 경중을 떠나 여러 사례는 다양한 서적과 텍스트로 읽어보았지만 실제로 약을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보면서 나도 정신병동의 입원환자가 될 수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저런 상황에서 어떤 디바이스로든 글을 쓸 수 없게 된다면 더 힘들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정신병동이든 대기업이든 치킨집이든 대장항문외과이든 아침은 오긴 올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침이 아니다. 아침은 아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불속에 있을지 달리기를 할지 새벽버스를 탈지 음식을 할지 고민에 잠을 못 이루고 있을지 그런 게 문제일 것이다. 어떤 아침은 지긋지긋했다. 출처 모를 담배연기를 맡으면 찾아서 제거하고 싶기도 했다. 아침이 문제가 아니었다.




*

퇴고히다 보니

정신과 상담 받고 싶었던 경험이 하나 더 있었다.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되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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