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 감독. 너와 나
그날 이후 세월호는 하나의 관점이 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만들어진 미국 영화에 찍힌 낙인과 외형적으로 유사하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세월호와 연관된(창작자의 의도는 다 알 수 없어도 그렇게 보이는) 한국 영화(또는 극화된 상업 영상 콘텐츠)는 영화 자체로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라는 사건의 파장으로 뒤덮인다. 2년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https://brunch.co.kr/@sk0279/1239)이 그랬다. 한번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니 벗겨낼 수 없었다.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는 개봉 전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창작자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의도했는지 다 파악할 수 없다. 다른 작품들과 달랐다면 기다렸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나오고 곧 세월호 관련 설정과 장면들이 본격적으로 나올지도 몰라. 대체 어떻게 등장시킬 생각일까. 대체 어떻게 그 사건을 재연할 수 있을까. 이건 추모일까 기록일까 복수일까 사과일까 모두 다일까. 처음부터 세월호 연관성을 완전히 몰랐다면 소스라쳤을까. 마주 보고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함께 눈물을 펑펑 쏟았을까.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모든 장면에 세월호라는 워터마크가 도배되어 있었다. 감상의 다른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었다. 보는 내내 스스로에게 이건 세월호에 관련된 영화야. 언제 갑자기 참담한 공포와 경악, 절망과 한탄으로 바뀔지도 몰라. 각오해야 했다. 타이틀이 등장할 때부터 엔딩크레디트가 올라올 때까지.
혼자 남겨진 자는 먼저 떠난 자들의 수만큼 (또는 그 이상)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모든 경우의 수와 가능성과 시나리오를 다시 써보고 이미 발생한 비극의 진실로 돌아온다. 나는 남았고 모두 떠났다는 진실로. 모두가 있던 교실에서 혼자 엎드린 책상만 남았다는 진실로. 앞으로 남은 삶 내내 못해준 말과 미안한 마음으로 괴로울 거라는 진실로. 떠난 자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세계에서 홀로 남은 자신이 그들의 목소리를 모조리 상상하고 복기하고 되풀이하고 자신에게 들려주고 답하고 대화하고 자신이 놓쳤거나 좋았던 부분을 발견하고 다시 떠올리고 다시 되살리고 다시 아무리 다시 해도 실제 다시 들을 수 없는 존재의 흔적을 내내 헤집는다. 살아서 미안한 사람이 된다. 일부러 원해서 남게 된 것도 아닌데 같이 떠나지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평생 미안하고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 사람이 된다. 떠난 자들이 어디선가 교실과 버스와 동네에 혼자 남은 자를 걱정할까. 그것은 모른다. 하지만 남은 자가 교실과 버스와 동네 등 모든 곳에서 떠난 자들을 그리워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은 결과 속에서 가장 궁지와 구석에 몰린 사람이 된다. 너와 나 중에 하나만 남는다. 너와 나가 하나가 되었더라도 너와 나 중에 한 사람만 남게 된다. 남은 한 사람 속에 떠난 한 사람이 영원히 기거한다고 해도 한 사람이 전처럼 너와 나가 될 수는 없다.
너와 나는 결론적으로 세월호를 세월의 무게에 깔려 잊게 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같이 잊게 될지 다시 떠올리게 해 준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에 (가능성 여부를 막론하고) 세월호를 잊게 된다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게 될 것이다. 내가 그날과 그날 이후 본 것들과 이를 통해 느낀 것들(분노, 절망, 살의, 실의 등)과 영향받은 것들과 재생산된 것들과 소비한 것들과 이런 것들이 엮여 나의 일부가 된 것들을 상실할 것이다. 세월호는 되돌릴 수 없는 기억과 자주 흔들리는 일상의 뚜렷한 지분을 지닌 나와 내 생의 일부가 되었다. 세월호만 도려내어 기억에서 지울 수 없다. 뇌를 꺼내어 잘게 부수지 않는 이상 세월호는 앞으로도 일상을 자주 뒤덮는 하나의 기후현상이 될 것이다. 세월호를 잊는다면 말 그대로 부분기억상실처럼 생의 중간과정을 전혀 복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모든 장면에 가득 담긴 박혜수 배우와 김시은 배우를 보며 내내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영화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