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아일린
너도 분명 찬란한 꿈이 있겠지. 다른 세상을 꿈꾸겠지.
자살 또는 살인. 레베카(앤 해서웨이)를 만나기 전 아일린(토마신 맥켄지)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그리고 레베카를 만난 이후 아일린의 삶엔 하나가 더 추가된다. 동경. 아일린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엄마는 죽고 퇴역 경찰 아빠는 알콜중독자, 아무 곳에서나 실탄 든 권총을 꺼내는 미치광이, 딸에게 성추행을 일삼는 당장 죽여도 여한이 없는 짐승 새끼였다. 그런 인간과 담배를 같이 피우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눠야 하는 게 아일린의 삶이었다. 아빠를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는 게 아일린의 잠재적 시나리오였다. 아빠의 총을 법적 관리를 위해 건네받을 때 아일린은 상상했다. 총구가 자신의 턱으로 향해고 격발과 동시에 자신의 머리통이 폭발하는 상상. 단 것을 입 안에 욱여넣거나 엄마옷을 입고 자신을 바라보는 게 결핍을 채우는 초라한 방식이었다. 감옥 행정이라는 지루한 임시 업무, 떠나고 싶어 돈을 모으고 있었다. 눈앞에 레베카의 등장은 신의 계시였다. 마침내 지옥은 끝나고 새로운 챕터가 열릴 거라는.
교도소에 부임한 심리학자 레베카는 아일린의 심연을 단숨에 간파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아일린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단계로 아일린의 원하는 것을 채워준다. 다정하고 스타일리하며 세련된 매너를 갖춘 어른 여성. 지금껏 아일린의 삶에 존재조차 할 수 없는 신화적 인물이 레베카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광채로 휘감는 레베카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고 같이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스킨십을 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추근대는 남성을 뭉개버리는 강인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일린의 눈앞에서 완전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레베카는 아일린의 저주받은 삶을 구원하러 온 혁명가의 아우라를 시종일관 뿜어내고 있었다. 한동안 아일린의 삶은 빛과 온기가 가득할 수 있었다. 아빠를 죽이거나 스스로를 죽이지 않아도 당분간은 버틸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해 주는 레베카가 있어서 아일린은 숨을 쉴 수 있었다. 꿈을 꿀 수 있었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게 감격에 겨울 정도였다. 심지어 성탄절까지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초대받다니. 레베카는 정녕 신인가. 아일린에겐 그랬다. 레베카의 이상한 집에서 괴상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레베카가 사기꾼이고 아일린이 갑자기 저지른 살인까지 합리화할 정도로 오랜 결핍에 둘러싸여 있는 자라고 해도 아일린이 레베카에게 느낀 순수한 열망을 그저 속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난 그럴 수 없다. 레베카가 다시 찾아와 아일린에게 같은 수작을 부리며 유혹한들 아일린이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아일린은 살인과 자살을 꿈꾸던 삶에서 거대한 롤모델을 발견했다. 지금껏 마주한 어느 인간도 레베카만큼 눈부시지 못했다. 아일린이 그런 경험을 다시 할 수 있다면 속았다는 억울함이 제어장치가 될 수 있을까. 온전히 존중과 사랑받는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아일린은 백번이라도 더 속고 천 번이라도 더 범죄에 동참할 것이다. 아일린은 완전한 충족감을 얻었고 이보다 더 강한 동기부여는 없다. 아마 레베카가 원했다면 아일린은 동네사람 모두라도 기꺼이 죽였을 것이다. 자살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영화는 상처받은 사람이 얼마나 쉽게 유혹당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한없이 밝고 연약한 과정을 통해 그동안의 상처가 얼마나 검붉고 지독했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혼자가 되었더라도 아일린은 매일 밤 레베카의 꿈을 꿀 것이다. 그 꿈에서 자신이 얼마나 낯설고 행복한 존재였는지 되뇌고 눈물겹게 그리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