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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

by 백승권

우리가 우리를 잠시 잊더라도

과거가 우리를 절대 잊지 않아


미래의 변수가 불가항력이라면

과거의 순간들 역시 마찬가지


해석과 기억이 엇갈리더라도

최후의 교집합이 화석처럼 견고하고


혼자의 망상이 아닌

증언과 정황이 명확하며


순서가 엉켜있더라도 존재했고

녹취 파일이 없어도 대화 기록이 또렷하며

침묵 속에서도 아른거리는 역사


지금 치열하다면 그때도 그랬어

지금 안간힘을 쓰고 있다면 그때도 그랬어

지금 뭔가 쉽지 않다면 그때도 그랬어


그러니 현재가 막막하다면 차라리 눈을 감아

과거가 눈에 불을 켜고 길을 찾아줄 테니

형언할 수 없이 모든 날 불안에 휩싸여도

과거가 견고하게 엉킨 매듭을 끌러줄 테니


과거는 움직이지 않아. 수정도 조작도 소용없어

과거는 알고 있어.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

과거는 기억해. 우리의 말과 글과 표정을


과거는 어제가 아냐. 차라리 내일과 더 닮았어

우린 지나간 시간이 아닌 하나의 시간 위에 있어

계속 이어져 있으니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분절할 수고조차 들일 필요 없어

아무리 공을 들여도 우린 과거와 현재조차

어디에 점선을 그어 나눠야 하는지 절대 알지 못해

그건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서


그러니 우리가 과거 어느 시절부터

함께 했다면 지금도 함께야

머리의 겉과 속이 하얗고 투명해져도

뼈와 심장이 풍화되어 작은 빛에 날려도

다른 사람들의 뒷모습을 우리로 착각해도


우린 여전히 하나의 시간 위에 같이 있어

내가 이 생각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평행우주를 다녀왔는지 당신은 모르겠지

그래서 다행이고 알면 숨이 찰까 걱정할 테니


단편적 감각의 교차와

얇고 가느다란 차원을 넘어

우리는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미래도

과거로부터 시작되고 연결된

조금 더 넓어진 지도와

영영 끝나지 않을 영화


우리가 장면 밖으로 사라지는 날이 와도

우리의 이름은 엔딩 크레딧에 쓰이겠지

우리가 누구였는지 서로에게 어떤 역할이었는지


우리는 불멸의 시간에 각인되었어

시간의 수명이 우릴 소멸시킬 때까지

우리는 이걸 기워 서로에게 계속 입혀줄 거야

우리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망각의 추위로부터 얼지 않고

떨지 않도록 막아줄 거야


우리가 우리이기 전에는

우리에게 이런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었지

우리가 우리가 된 순간부터

모든 의도와 원인과 결과는

우리를 벗어나지 못해


믿음을 뒤흔드는 불안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안전할 거야

우리는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이미지와 텍스트, 감각과 경험의 총합을 통해

이걸 늘 확인하게 될 거야


우리가 우릴 잠시 잊더라도

과거가 우릴 절대 잊지 않아


달, 조수, 파도 사이에서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멈추지 않는 것들이 있고

우리도 그럴 거야


미래의 우리가 이 예언을 같이 읽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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