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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실험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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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상황적 심리적 물리적 육체적으로 취약하다고 누군가 반드시 나타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울 필요는 없어요. 무관심이나 무대응이 아닌 (무작정 다가서는 게 아닌) 스스로 극복할 기회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몇 줄로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고 그만큼 무수한 변수와 케이스가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 아니에요. 내가 그런 사람인가 의문이 들었어요. 나는 상대가 약해졌다고 판단되었을 때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내 영역을 확보하는 사람인가. 그에게 어떤 포지션을 부여받고 싶은가. 고맙다는 인사를 받거나 의지의 대상이 되려고 하나. 아니면 진심으로 그 사람의 상황을 깊고 정확히 이해하고 인간의 도리로서 돕고 싶은 것인가. 마지막이 가장 이상적인 방향이라는 걸 알지만 나는 취약한 상황을 이용하려 특정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건 아닌지 자각과 의심이 들었습니다. 상대가 이런 의도를 모를 리 없고 진심이 아니라면 절대적으로 밀어내었을 텐데 모든 이들이 이런 의지와 실행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intermission)


ii

사랑이란 단어를 많이 써서

고마워 미안해 처럼

익숙하게 만들려는 작은 실험


정확히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사랑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글을 봤어

재밌는 생각이야 사실과 근접해 보이고


이제 와서 사랑을 멈춘 들 그동안의

사랑이 무효가 될 순 없겠지. 잔향이

너무 진해서 사후세계까지 따라갈 거야


사랑과 연결된 내면의 스위치와 전구가 수억만 개인데

알아서 켜지고 꺼지고 심지어 수동 모드는 없어

많이 켜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어느새 어두워지면

거울을 깬 손으로 스스로 목을 조르기도 하지

(자기 파괴는 지겨워요, 마지막 문이라 잡고 있을 뿐)


사랑은 중력이 작용하는 현실세계에서는

스티커에 가깝지만 개인의 정신세계 차원에서는

유리 같은 상상력이 결합된 탐욕 또는 도구에 따라

기이하게 변형할 수 있는 원석에 가깝지

이런 정의조차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고


사랑에 대해 무력감을 느낄 때가 좋아

대책은 없고 괴로운데 그걸 자꾸 원해

이렇게 라도 환상에 억압당하고 있는 걸

그런 자신에게 초라한 연민을 보내는 게

진화가 불가능한 불타는 숲에서 나가길

거부하고 있다는 게, 가끔은 이대로 다

끝나도 괜찮겠구나 하는 환각 상태조차

이해가 들 정도야, 깨어나고 싶지 않지, 이게 잠이라면


과녁판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해

화살이 어디서 날아올지 몰라

그런데 기다려 몸이 뚫리기를

화살촉이 빨강과 파랑을 찢으며 면을 부술 때

고통과 함께 계속 날아오길 바라고 있어

충격과 두려움, 긴장과 훼손, 떨림과 자극

사랑인지 중독인지 교집합인지 쌍생아인지


여기까지 쓸게요

곧 내려야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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