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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Jan 01. 2022

비로소 적성을 찾은 엄마

 난 참 많이 투덜거렸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엄마가 다 시켜주질 않았다고. 양궁선수도 되고 싶었고 영화감독도 되고 싶었고 발레리나도 되고 싶었다. 하루 이틀 반짝 바람이 분 것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동경하고 알아보고 좇았던 꿈인데 아무리 졸라봐도 엄마는 시켜주지 않았다. 시켜주지 못했던 거다. 풍족하지 못했던 살림이었으니까. 예고나 외고를 가고 싶었는데 엄마 곁을 떠나는 건 언감생심, 공립학교만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속상해서 EBS 중국어 회화만 죽어라 들었는데 독학이 원래 그런 것인지, 한국어 대화문은 다 기억에 남는데 그때 들은 중국어는 한 문장도 제대로 외우질 못했다.

 엄마가 아예 아무것도 안 시켜준 것은 아니다. 큰맘 먹고 피아노를 한 대 사 주었으니 피아노는 꽤 오래 다녀야 했다. 중간에 관두면 안 된다고 했다. 한 번 배운 것은 끝까지 해야 한다며. 운동이 하고 싶다고 하니 가장 적은 비용으로 할 수 있는 태권도만 배울 수 있었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선택지를 주고 또 지지해 주던가. 다시 태어나면 교육열이 높은 집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되어 생활비를 받아 들고 북경에서 혼자 지내며, 드디어 내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매일 마늘장아찌와 맨밥만 먹으며 모든 생활비를 교육비에 탕진한 내 이야기는 당시 친구들 사이에도 유명했다. 대학교를 다니며 태극권 과외와 중국 악기 비파 과외를 받으며 어학 학원에 가서는 중국어, 영어, 일본어 세 과목을 듣고 한국어는 한 마디도 안 쓰려고 인터넷도 안 깔고 중국 친구들과만 어울린 욕심쟁이였다. 매일 잠도 잘 못 자며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과연 이 욕심 많은 유전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는가. 사실 내가 이만큼 하고 싶으면, 엄마도 그만큼 하고 싶었던 거다. 그 하고 싶은 거 많은 딸들, 맨날 돈 내놓으라고 한 딸들이 징그럽게 대학원까지 마치고 나니 엄마가 드디어 숨을 돌렸다.

 엄마가 오랫동안 운영하던 가게를 그만두고 일을 쉬게 되면 우울해할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생각이었고, 엄마는 가장 먼저 집 앞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우리가 쓰고 남긴 피아노가 한 대 있으니, 그걸 비로소 한 번 쳐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은퇴 후 백수가 된 엄마가 가장 벼르고 있던 것이 피아노였나 보다. 어린이들이 주 고객인 피아노 학원에 엄마가 갔더니 엄마와 비슷한 연배의 원장 선생님이 부담 없이 놀러 와서 친구 하자고 했다고 한다. 아이들 어릴 때는 꿈도 못 꾸고 60대가 되어서야 이제야 학원 문을 두드린 엄마가 안타까웠나 보다. 피아노에는 큰 재능이 없었던지 그 후로 엄마는 국가 교육과정, 문화센터, 학원 등을 부지런히 쫓으며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더니 인문학 수업, 노래 학원, 문학수업, 영어수업을 골고루 들으러 다녔다. 코로나가 터지며 수업을 예전처럼 다닐 수 없다고 식구 중 가장 서운해했던 것도 엄마다. 최근에는 엄마가 미술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우리는 처음으로 엄마의 미술 실력이 꽤 괜찮음을 알게 되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쏙 들어오는 그림이 있길래 나는 한 점 구매하기로도 했다. 엄마는 늘 긍정적이고 밝다. 그런 엄마의 스타일이 그림에도 반영되어 내 집에도 걸어놓고 싶을 만큼 따뜻한 작품이 나온 것이었다. 물론 굉장히 수준이 높다고는 말 못 한다. 엄마 작품이니까 내 눈에 더 좋아 보였던 거겠지. 미술작품을 걸어놓으면 그 그림을 그린 작가의 기운도 함께 집에 들어온다데 엄마의 긍정 기운이면 나는 언제든 환영이니까.


 동생의 전공이 미술이다. 우리 모두 의아해했다.  연필을 잡을 근육이 생길 적부터 매일 도화지가 남아나지 않도록 그림을 그려대는 동생을 보며, 얘는 누구를 닮아서 미술을 이리 좋아하나 했다. 농담처럼 엄마는 어릴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외할아버지는 아홉 남매를 키우는 농부였다. 미술 공부는커녕, 대학공부시키는 것도 힘겨워하는 집에 대고 적성, 소질 운운할 사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는 꿈이라는 것을 꾸지도 못한  교복에 단팥빵 하나 입에 물고 만화책을 읽던 소녀였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당시 소녀들이 어른이 되는 최종 수순이었으니까. 처녀  엄마는 직장일이 바빠서 결혼하면 실컷 하고 싶은 공부  해야지 생각했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자신의 교육비에 돈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우리에게 뭔가를 배울 기회가 있을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겨우 일곱   나를 피아노 학원보낼 적부터.


 그런데 내가 또 은혜를 잘 갚는 극성 딸 아니던가. 엄마 작품이 엄마 카톡 프사에 하나씩 올라오는 것을 보고 인스타그램에서 작품을 올리는 미술작가들의 피드들처럼, 엄마도 그림스타그램을 해볼 것을 추천했다. 작품 수가 많아지면 엄마 홈페이지도 만들고 온라인 전시회도 열어주고 기회가 된다면 자그맣게라도 오프라인 전시회도 열어주기로 했다. 엄마 지인들도 부르고 홍보도 잘해서 잊지 못할 멋진 전시회를 만들어 줘야지. 무엇이든 목표가 있으면 더 구체적으로 열심히 하게 되니까. 다행히 엄마는 예술혼을 활활 불태우며 신나게 현재 상황을 즐기고 있다.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는데 지금은 인생도 길고 예술도 길다고. 참 엄마다운 긍정적인 말이다. 나도 엄마의 나이가 넘어서도 엄마처럼 새로운 흥미도 찾고 살아있음을 충분히 느끼며 살아야지. 엄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며 내가 지금의 엄마 나이를 넘어서도 엄마처럼  잘 지내는 것을 실컷 봐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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