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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앞에 선 사람들

소방관

by 빡작가 Mar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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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국 곳곳이 불길에 휩싸였다.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순식간에 울주, 영덕, 포항까지 번졌다. 강풍이 불씨를 이고 날아가듯, 불길은 산을 넘어 마을을 삼켰다. 배를 타고 방파제를 넘어 피신한 마을이 있었고, 나무가 엉켜 쓰러져 구조조차 어려운 마을도 있다. 가축은 쓰러졌고, 집은 그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사상자도 생겼다. 어느 마을에서는 마을 이장이 주민들을 확인하겠다며 마을로 다시 들어갔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자기 집보다 남의 안부가 먼저였던 그 이장의 죽음 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

 불 앞에서 사람은 너무나 작아진다. 그 말이 실감이 났던 것은, 내가 열다섯 살 무렵의 겨울이었다. 깊은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잠들어 있던 우리 남매를 깨운 건 어머니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불이야! 어서 나가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되지 않은 채, 우리는 어머니가 내미는 겉옷을 걸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니,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손을 꼭 쥔 그 차고 떨리던 손의 감각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길 건너 솜공장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도 내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시뻘건 불덩이가 튀는 소리, 타닥타닥 나무가 타는 소리,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 마치 지옥문이 열린 듯한 공포가 몰려왔다. 불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고, 그 불덩이가 금방이라도 우리를 삼킬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다리는 떨렸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그 와중에 다섯 살 막냇동생은 구경이라도 난 듯 “불이다!” 하고 외쳤다. 천진난만하게 눈을 반짝이며,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오히려 더 무서웠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그 순수함이, 어른이 되어가던 나에겐 낯선 공포였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양팔로 끌어안고 나에게 “앞장서라”라고 했다. 우리는 추위와 공포 속에서 무작정 골목을 빠져나왔다. 불길이 등을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날의 불은 꺼졌지만, 나는 아직도 그 밤의 냄새와 소리, 그리고 그 손의 감촉을 기억한다. 그 불빛, 그 연기, 그 냄새. 그날 이후, 나는 불이 무섭다. 그건 단순한 화재가 아니라,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든 붉은 기억이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어릴 적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동네의 한 집에서 불이 났고, 밤하늘에 번지는 불빛에 온 동네가 술렁였다. 겁에 질린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길가에 서 있었던 시간이 겹친다. 불은 언제나 삶을 한순간에 바꿔놓는다.

 그 기억이 이번 산불 소식을 들을 때마다 되살아난다. 무너진 마을을 보며, 아이들을 안고 피신했을 누군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단순히 ‘불이 났다’는 뉴스 한 줄이 아니라, ‘삶이 불타버렸다’는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불 앞에서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소방관들이다.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안에 아이가 있어요!”라는 외침에, 한 소방관은 아무 망설임 없이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 연기로 가득한 방안, 숨죽인 아이를 찾아 품에 안고 나오는 그 모습은, 그저 드라마 속 한 장면이 아니었다. 현실에서도 누군가는 그런 선택을 매일 하고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트라우마를 겪는 동료의 손을 조용히 잡고 말없이 함께 걷는 모습이 나온다. 불을 끄는 일만이 아니라, 무너진 마음조차 함께 붙드는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진짜    영웅이다.

 이번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은 평생 모은 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정든 땅이 재가 되어버린 슬픔 속에 있다. 그런데도 서로의 손을 붙잡는 이웃들이 있다. 밥 한 그릇 나누며 울음을 삼키는 사람들. 그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

 불은 많은 것을 앗아간다. 집도, 시간도, 사람들의 웃음도, 꿈도 그러나 불이 닿지 못한 곳이 있다.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던 그 마음, 목숨 걸고 뛰어든 그 용기, 다시 시작하려는 그 다짐이다. 이장님처럼 남을 먼저 생각한 사람, 이름 없이 희생된 소방관들, 그리고 삶을 잃었지만, 기억을 남긴 이웃들. 남은 잿더미 속에서 다시 삶을 일구는 사람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도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

 불은 삶을 태웠지만, 사람은 그 속에서 사랑을 지켰다. 그 사랑이 희망이 되어 다시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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