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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r 25. 2024

알콩달콩 밥 먹는 재택근무

지긋지긋한 코로나가 지나고 2023년이 되었다. 아들은 여전히 일주일의 반을 재택근무 하는 중. 아들의 사무실은 거실이 되었고 나의 사무실은 내 방이었다. 집에서 일하는 식구가 있으면 세 끼 밥을 챙기는 게 큰일이 된다. 하지만 아들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선 같이 밥 먹는 시간이 소중하기만 했다.  


아들표 파기름 라면


아침 먹고 돌아서면 금방 점심때. 그날따라 매우 가볍게 먹은 탓인지 배꼽시계가 울리고 있었다. 점심은 또 뭘 먹나. 아들은 라면을 먹고 싶단다. 옳다구나, 그럼 니가 잘하는 파기름 라면을 끓여보거라. 나는 명령(을 가장한 부탁)을 하사했다. 일전에 먹어보고 '장인의 맛'으로 인정한 바 있다. 녀석도 순순히 그러마 한다. 왜냐면 엄마보다 지가 하는 게 낫거든.


슬슬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파를 볶는 진한 향이 방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주방으로 나갔다. 이미 파기름은 다 내었고 면이 뜨거운 국물로 입수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파기름 만드는 비법은 나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 대충 듣기론 올리브유를 잔뜩 넣고 파를 볶는다던데 굳이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딴 건 몰라도 파기름 라면만큼은 영원히 녀석에게 얻어먹을 작정이거든요. 흐흐흐. 음흉하고도 원대한 계획 아닌가. 어쨌든 이후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면이 익으니까 그릇에 건져낸다. 다음 달걀 푼 걸 국물에 휘휘 돌려 넣는다. 마지막으로 국물을 면 위에 붓는다. 끝.



김치만 꺼내어 식탁에 앉았다. 이럴 수가,  과연 전문가의 맛이로다! 나는 몇 번이나 감탄을 했다. 은근한 불 맛에 오묘한 파 맛이 더해졌다. 면도 탱글탱글 씹는 맛이 살아있네. 여기 고품격의 라면이 탄생했도다. 면발 하나, 국물 한 입까지 싹싹 비웠다.


"다음엔 해물라면 어때? 제주도 서우봉 아래에 아주 맛있는 해물라면집이 있어. 해물이 완전 수북하고 다 먹을 때까지 면발이 붇지도 않더라. 아 랍스터 라면은 어떨까? 고급 지지 않니?"


" 엄마, 그건 랍스터 낭비지. 그래봐야 라면이야."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장인답게 칼같이 단호한 놈, 냉정한 놈. 그래 내가 너무 나갔다. 츤데레 아들의 정성과 기술이 듬뿍 들어간 라면은 그냥 라면이 아니다. 그건 '사랑'이지! 비법 같은 건 절대 묻지도 캐지도 않으련다, 쭉 받아먹을 거니까. 내 인생 투 두 리스트 1순위에 적어둔 걸 너는 모를 걸, 크크크.


술 권하는 녀석


집에 일주일 넘게 굴러다니는 와인 반 병이 있었다. 와인과 함께 먹을 안주 거리를 사러 이마트에 갔다. 우린 냉동 감자튀김과 도넛, 토마토, 허니버터칩, 라면,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카트에 담았다. 메인으로는 돼지목살을 볶기로 했다.  


고추장과 청양고추를 넉넉히 넣어 매콤하게 고기를 볶았다. 토마토는 굵게 썰어 올리브유를 두르고 살짝 구웠다. 그사이 아들은 감자를 에어프라이어에 돌렸다. 국적불명의 식탁이 차려졌다. 먼저 레드 와인 반 병짜리를 털었다. 병이 비자 아들은 곧바로 화이트 와인을 땄다. 달지도 시지도 않고 맛이 딱 좋았다. 대충 골랐는데 성공.


출처: 픽사베이


"너 휴가 간 일주일 동안 엄마 1킬로그램 뺐다! 니가 없으니까 저녁 가볍게 먹고 아주 좋았어. 살이 잘 빠지더라고."

"차암, 쓸데없는 짓을 하셨네요. 어차피 다시 찔 것을."


아들이 기분 나쁜 듯 말했다. 아니 이 놈은 실제로 미간을 찌푸렸다. 잦은 야근으로 운동부족에 시달리는 아들도 날이 갈수록 살이 붙는 중. 자기 혼자 찌는 건 억울하고 엄마도 같이 쪄야 한다는 게 아들의 지론이다. 즉 다 같이 먹고 죽자는 프레임.


"너가 맨날 치맥 하자 하고 아이스크림 사 오고 하니까 엄마가 자꾸 살이 찌잖아."

"어허, 같이 먹어주는 효자 아들이 어디 흔한 줄 알아요? 감사하게 찌셔야죠!"


궤변을 늘어놓는다. 와인 몇 잔에 나는 취기가 돌았다. 이십 대엔 소주를 쌓아놓고 마시던 무한주량의 소유자였다만.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나의 주량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이젠 캔맥주 하나면 충분한 소심한 음주인이 되었다오.


와인이 끝나자 아들은 캔맥주를 가져왔다. 와인 잔에 공평하게 한 잔씩 따랐다. 나는 이쯤 이미 판단력이 흐려졌다. 더 마시면 다음날 괴로울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고 음식도 거의 다 먹었다. 그만 그릇을 치우려는데 아들이 또 다른 맥주 하나를 들고 온다.


"엇, 맥주가 또 있었어? 엄만 너무 마신 것 같은데?"

"얼마나 마셨다고 그러셔요, 자자 마지막 잔이야. 여기 허니버터칩이 남아 있어요."


녀석의 꼬임에 넘어가 또 한 잔을 들이켰다. 술 권하는 아들, 뭐냐. 이것이 저녁식사인가 회식 자리인가. 도합 와인 반 병에 캔맥주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허술한 체력이거늘. 아마 엄마에게 그 정도는 가뿐하리라 생각했겠지. 니가 여전히 엄마를 모르는구나.


다음날 아침 나는 9시까지 침대를 떠나지 못했다. 남편과 아들은 일찍이 출근하고 없다. 어쩐지 빼놓은 살이 도로 붙은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체중계 위에 슬쩍 올라갔다. '으악!' 비명이 터져 나온다. 체중은 도루묵이다 못해 오히려 더 늘었다. 아들, 너는 내 다이어트의 적군이 틀림없다. 앞으로 너의 방해를 철벽방어하는 게 관건이렸다... 잘 될까???        


엄마표 등갈비 김치찜


아들에게 두 가지 소원이 있었다. 첫 번째는 엄마표 등갈비 김치찜. 그럼 두 번째는? 역시 등갈비 김치찜. 그게 뭐라고 여름 내 미루다 시원한 가을이 되어서야 해주었다. 오랜만에 하는 요리여서 먼저 레시피를 검색해 보았다. 오호라 요즘은 김장김치를 한 쪽씩 갈비에 돌돌 말아서 조린단다. 이거 재밌네.


출처: 픽사베이


등갈비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끓는 물에 데쳤다. 다시 깨끗이 씻어 물기를 털어 고기 준비. 김치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냈다. 생협이 담그어준 (즉 생협에서 산) 김장김치는 딱 세 포기가 남았다. 한 포기를 꺼내 꼭지를 잘라내면 김치도 준비 끝. 줄기 부분부터 시작해 갈비를 감싸 돌돌 말았다. 하나씩 완성되는 돌돌이들. 이쁜걸. 모양새부터 합격이다.


예전엔 커다란 냄비에다 김치와 갈비를 겹겹이 깔아서 조렸다. 일단 양이 많았고 갈빗살이 쏙 벗겨지도록 익히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여름에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한참 끓여야 해, 그래서 너무 더워, 그래도 참아야 해, 그러니까 기운이 다 빠져.  


내가 참고한 '요즘 레시피'는 딱 한바닥만 깔더라. 30분이면 완성이란다. 한 끼 먹을 만큼만 한다는 게 요점. 훨씬 수월할밖에. 전에는 내가 참 무식했구나. 무조건 한꺼번에 잔뜩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실은 아들이 워낙 잘 먹기도 했고요. 그땐 어지간해선 양이 차지 않았다오.


지금의 나는 머리를 좀 쓰기로 했다. 냄비 두 개와 궁중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돌돌이들을 딱 한 겹만 올렸다. 그 위에 양념한 김치 국물을 붓고 끓였다. 정말 30분 만에 갈비가 잘 익어버렸어! 하나씩 떨어지는 등갈비 김치찜은 그릇에 담기도 먹기도 편했다. 아들은 활짝 웃으며 외쳤다.


"바로 이 맛이야!!!"

"또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해. 이젠 날도 시원하고 엄마가 다 해줄게."

"다음 주에 등갈비찜 한 번 더!"


아이고, 등갈비 김치찜이 그렇게 좋아? 나는 전보다 살이 더 실한 등갈비를 새로 주문했다. 네이버 블로거의 덕을 보았기에 또 레시피를 조사했다. 다 비슷한데 양념 국물에 새우젓을 넣으라는 방법이 눈에 띄었다. 새우젓이라면 돼지고기와 김치 모두에게 찰떡궁합 아닌가. 아 감이 온다.


새우젓을 한 숟갈 넣었더니 맛이 조화롭고 풍성했다. 빈 곳 없이 꽉 찬 맛이랄까. 아들은 두 끼를 연속 등갈비찜으로 먹었다. 지난주보다 더 맛있다고 난리였다.


"엄마에겐 아직 김장김치 두 포기가 남아 있느니라. 또 무엇이 먹고프냐?"

"어머니, 그럼 다음엔 두부김치 부탁합니다."


어째 김치와 돼지고기 조합에서 벗어나질 않네. 김치전, 돼지고기 김치찌개, 김치만두, 등갈비 김치찜, 두부김치. 아들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음식이다. 아이일 때도 청년이 되어도 엄마에게 바라는 건 그저 맛난 요리. 실컷 먹을 수 있고 해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기 전까지 실컷 해주마.




대문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연재 브런치북>

월, 화, 수 : 얼떨결에 시엄마

목, 금, 토, 일: 베트남이 춥다니요


<완결 브런치북>

그래서, 베트남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제주살이는 아무나 하나

무작정 제주, 숲길과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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