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럭셔리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돈'을 잃는 것과 관련한 큰 교훈을 경험한 여행이다.
사회생활을 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7박 9일 해외로의 자유 여행을 계획했다. 목적지는 바르셀로나, 리스본 2군데였다. 처음 해보는 자유여행이었는데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하는 해외여행은 나와 맞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한 곳에 머물면서 많이 걷고, 갔던 거리, 갔던 장소를 반복적으로 스치며 숙소로 걸어 돌아오는 길에는 마치 이 동네에 익숙해져 있는 현지 거주자가 느낄 법한 기분을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막 대학교 2학년이 된 여동생에게 외국이라는 세상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비록 많은 돈을 모은 건 아니었지만, 2인 몫의 비행기 티겟, 숙박, 식사, 관람 등 모든 여행경비를 모두 내가 부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행경비를 '압축'할 플랜을 짰는데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모은 돈을 좀 더 쓴다면, 좋은 숙소에서 쾌적하게 자고, 많은 맛집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겠지만 동생에게 '대학생'이 누릴 법인 여행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적은 비용, 많이 걷기'가 내가 정한 여행의 컨셉이었다.
그래서, 인천공항에서 바르셀로나 공항까지 2번 경유해서 21시간이 걸리는 중국 '남방항공'을 예약했다.
내 기억에 1인당 비행기 값이 85만 원 가까이 되었던 것 같다.
숙소는 근처 관광 스팟으로 이동이 용이한 위치에 있는 백패커들이 이용하는 호스텔 여성전용 도미도리 6인 1실을 예약했다.
바르셀로나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토스트를 챙겨 나와 점심에 먹고, 배고프면 맥도날드에서 끼니를 때웠다.
너무 먹는 것에 야박한 여행을 할 순 없으니, 두세 번은 좋은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이 때는 구글맵으로 여행하던 때가 아니었던지라 동생과 나는 커다란 바르셀로나 관광지도가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펼치고 접으며 길을 찾아다녔다.
바르셀로나 첫날은 가우디 건축물 중심으로 관광을 했다.
카탈루냐 미술관과 몬쥬익 분수대가 있는 plaza de cascades를 가서 전망을 구경하고, 정처 없이 발 닫는 대로 이곳저곳 걸어 다니기도 했다. 동생과 나는 지하철을 거의 타지 않고 1시간 거리는 그냥 걸어 다녔다.
보케리아 시장에서 해산물 튀김을 간식으로 사서 항구 근처에 앉아 바다 구경을 하기도 하고, 해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이 때는 가우디를 제외한 관광지를 따로 알아보지 않고 발 닫는 대로 온 동네를 걸어 다녔는데 걷는 동안 우리 주변을 둘러싼 이국적인 정취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바르셀로나 도시 자체는 3일간 머물렀는데 다른 하루는 당일치기로 기차를 타고 '살바도르 달리'의 도시인 '피게레스'를 다녀왔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좋아했기에 바르셀로나 여행계획을 짜면서 피게레스를 알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바르셀로나 기차역에서 2시간이면 피게레스에 도착했다. 피게레스에 도착해서 길을 걷는 동안 달리와 관련된 작품들이 곳곳에 눈에 보였다. 그중 우리는 가장 기대했던 달리 박물관에 입장한 후 무려 4시간을 박물관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만큼 박물관 안에는 달리의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달리 그림 박물관 바로 옆에는 달리가 디자인한 보석 전시관도 있었다.
피게레스에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역무원이 표를 검사하더니 문제가 있다고 했다. 내가 산 기차표가 편도행이라는 것이다. 난 분명 기차표 살 때 Return ticket이라고 이야기하고 구매했는데 의사소통이 잘못되었나 보다. 역무원은 우리에게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바르셀로나행 표를 끊어 다음 기차를 타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계획에 없었던 Girona(히로나) 역에 내렸는데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까지 3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냥 동네 구경이나 할 겸 기차 플랫폼 밖으로 나가서 구경했는데 고즈넉한 옛 모습을 간직한 거리의 모습을 보자 우연히 이곳에 내리게 된 뜻밖의 상황이 마음에 쏙 들었다.
돌아가는 기차표를 구매할 때 재밌었던 에피소드가 있는데, 매표원이 동생에게 청소년 요금의 티켓을 끊어준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서양인들 눈에 동양인들이 어지간히 어려 보이긴 하나보다 싶었다.
여기까지가 나와 동생의 아름다운 추억의 바르셀로나 여행이다. 아직 리스본으로 이동하기 전이니 여기까지 들어간 두 사람 몫의 총비용은 고작 300만 원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어쩌다 이게 천만 원짜리 여행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사실 바르셀로나 여행을 하는 동안 일이 발생했다. 이 글을 읽는 해외 여행 하는 모든 분들이 이 부분을 꼭 주의하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남긴다.
모두 알다시피 유럽은 소매치기로 악명이 높다. 지갑, 카드 소매치기만큼 주의해야 하는 것이 바로 휴대폰 소매치기이다.
바르셀로나 여행 3일 차인 금요일인 때였다. 오후 5시경에 숙소로 돌아왔는데 가방이나 바지 주머니에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싸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만졌던 것은 맥도날드에 있을 때였다. 그때 동생이 콜라를 바닥에 쏟아서 정신없기도 하고 살짝 짜증이 올라와있는 상태였다. 맥도날드에서 나와서 횡단보도를 건널 때 사람이 많았는데 평소에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소매치기를 경계하느라 감각이 예민하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때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며 걸어갔다. 그때 내 옆에 붙어서 걷던 누군가가 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가져갔다는 느낌이 왔다. 동생 휴대폰으로 일단 부모님께 휴대폰을 소매치기당한 것 같다고 알리고, 한국도 통신사 콜센터가 운영하지 않은 시간대이고 주말이기도 해서, 한국 기준으로 월요일이 되면 고객센터에 연락해서 해외 서비스 이용을 중단시켜달라고 요청해야겠다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휴대폰을 잃게 된 것은 아까웠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휴대폰은 사진, 문자, 통화하는 용도 이외에는 해외여행에서 쓸 일이 없었고, 동생 휴대폰이 있으니 여행 시 긴급 연락이 필요하거나 할 때가 생겨도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 여행과 리스본 여행을 끝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날 저녁, 부모님과 통화를 하는데 부모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00야, 여행은 잘 다녀왔니? 너 그때 바르셀로나에서 휴대폰 소매치기 당했잖아. 엄마가 월요일 오전 9시 되지 마자 바로 통신사 콜센터에 연락해서 바로 로밍서비스 정지시키긴 했는데 그 3일 동안 휴대폰 훔쳐간 놈이 여기저기 국제전화를 엄청 썼나 봐.. 너 여행하는 중에 알리면 여행 망쳐버릴까 봐 엄마가 이제야 말해. 통신비가 너무 많이 나왔어... 충격받지 마"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1일 최대 로밍 한도를 정해놓고 통제하는 서비스가 있던 때가 아니었다.
해외를 몇 번 왔다 갔다 했었기에, 로밍 통화 비용이 얼마나 비싼지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엄마의 말을 듣는 동안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3일간 이놈은 분명 쉴 새 없이 종일 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이 국제 전화를 사용하도록 해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통신비가 너무 많이 나왔어... 충격받지 마"라고 말할 때 이미 내 마음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금액을 산정했다.
엄마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한 천만 원 나왔어?"
내 물음을 듣고 엄마는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라며, "육백오십만 원 정도 나왔어"라고 했다.
"음.. 그래. 하아.." 내 한숨소리를 들은 엄마는 "너무 큰돈이지? 엄마가 삼백만 원 부담하고 네가 나머지 부담하고 이렇게 할까?"라고 했다.
이미 일어난 일에 감정이 휩쓸도록 두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건 완전히 내 과실이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고 마음을 정리했다.
"아니 엄마, 내가 다 부담할 수 있어. 내가 처리할게."라고 했다.
통신사 대리점에 방문해 통화 이력을 뽑아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아프리카부터 동유럽, 서유럽, 미국 온갖 나라를 대상으로 끊임없는 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내가 뽑은 A4용지만 8장 가까이 되었다.
내 과실이긴 했지만 통신사의 안일한 보안 서비스에 굉장히 실망했다. 왜냐하면, 이전에 내가 국내에 있을 때 어느 날 카드사에서 전화가 와서 혹시 지금 해외에 계시냐고 묻고는 방금 해외에서 카드 결제 시도가 있었는데 국내에서 카드 사용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이상 결제 시도로 감지되어 해외 결제 거부처리를 했다고 했다.
어떤 고객이 하루 동안 수십 개 국가에 하루종일 국제전화 로밍을 사용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다.
국민 신문고에도 글을 올리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금액은 한 톨도 감액되지 않았다.
더 억울한 건 그 650만 원은 VAT제외 금액이라 내가 부담해야 하는 금액은 7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이것도 통신사에 연락해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LG유플러스, 잊지 않고 있다)
사회생활 3년 차에 모은 돈이 얼마나 된다고 천만 원을 홀랑 여행에 까먹어 버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아 둔 돈이 있기에 내 과실을 스스로 다 책임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검색해 보니 나 같은 봉변을 당한 사람이 여럿 있더라. 그 사람도 나처럼 온갖 시도를 다 해봤더라)
그다음 해인가 통신사에 1일 정액제 로밍 상품이 나왔다.
그래도 로밍은 불안해서 주로 유심을 사용하고, 요즘은 휴대폰에 금융정보부터 털어갈 게 워낙 많다 보니 여행 갈 때는 모든 은행과 카드의 계좌 정지, 분실신고를 위한 연락망을 가지고 다닌다.
살다 보면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금융투자로 돈을 잃기도 한다는데 나는 사회초년생 때 해외에서 소매치기로 큰돈을 잃는 경험을 했다. 이것도 인생의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아주 값비싼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