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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몽양 Mar 16. 2021

9. 나를 잃어가는 것 VS 엄마가 되어가는 것

나도 엄마가 되고 있다

오래 유지해오던 긴 머리를 잘랐다. 출산 후 딱 100일이 지나자 머리카락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빠지기 시작했고, 어차피 관리도 못할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기도 했다. 예전에는 외출 전에 고데기로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넣고, 드라이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머리를 감아 말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축축한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의미 없이 묶어 놓느니, 잘라서 실용성이나 높이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최신 유행하는 단발 커트 스타일을 찾아보며 어떻게 자르면 최대한 손질 없이 일상 속에서 우아함을 잃지 않을까 고민하긴 했지만. 


오랜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커트는 간단히 끝났다. 커트를 마치고 나니 조금은 어색한 모습의 내가 거울 속에 비쳤다. 그렇지만 긴 머리일 때는 느껴보지 못한 가벼운 느낌이 좋았다. 가볍게 털어서 드라이하면 별도로 손질할 필요 없이 모양을 낼 수 있다고 하니 백 번 잘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아기를 낳은 뒤 지쳤던 마음이 조금은 신선하게 채워지는 기분도 들어서 출산 후 기분전환에도 도움이 된 것 같다. 다만 잘려 나간 머리카락만큼 나를 잃어 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기를 낳기 전 엄마가 된 친구들의 얘기를 들었을 땐 사실 공감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왜 아기를 낳고 나면 엄마들은 일을 그만두고, 후줄근해지고, 어디 제대로 다니지도 못할 가. 나는 아기를 낳더라도 일을 그만두지 말아야지. 가끔은 아기를 맡기고 놀러도 다녀야지. 내 인생에 아기가 1순위가 되지 않을 거야. 내 외모를 꾸미는 데도 절대 소홀하지 않겠어. 이런 내 생각들은 아기를 낳고 난 지금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내 출산 전 다짐을 지키지 못한 데 있어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오히려 출산 전 나의 무지한 생각들을 반성했다. 


요즘 워킹맘이 흔하다 보니, 아기를 낳고도 회사를 충분히 다닐 수 있겠다 생각하기 쉽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아기를 나 아닌 누군가에게 맡기고 출근한다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작은,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한참 필요한 아기를 떼어내야만 하는 엄마의 심정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한 차례 유산을 겪으며 퇴사를 하게 된 후로 지금까지 복직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다시 예전처럼 회사에서 치열하게 회의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성과를 내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나의 인생을 살고도 싶지만, 이제 막 ‘엄마’를 배운 아기가 품 안에서 포근하게 잠드는 모습을 보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듯싶다. 


여행은 꿈도 못 꾸는 일이다. 친정이나 시댁에 아기를 맡기고 백화점에서 두 시간 정도만 쇼핑해도 아기 얼굴이 어른거려 핸드폰 속 아기 사진을 찾아보게 된다. 그렇게 다짐했건만 아기를 낳고 난 뒤 남편보다도, 나 자신보다도 아기가 1순위가 돼 버린 것이다. 아기가 잡아당겨 티셔츠 목은 자꾸 늘어나고, 바지의 무릎도 튀어나온다. 게다가 외출할 일이 적어지니 후줄근해지는 수순이다. 아기가 뽀얗게 포동포동 예뻐지는 만큼 엄마는 푸석푸석 손끝이 허옇게 까진다. 컴퓨터 키보드나 두드릴 줄 알던 손은 설거지며 빨래며 살림하느라 상해 간다. 


다만 정성 들여 만들어낸 이유식을 먹지 않겠다며 칭얼거리거나 잠을 자지 않겠다며 한참을 떼써도 엄마를 보며 환하게 웃는 햇살 같은 미소 한 방이면 힘들었던 모든 것이 잊힌다. 아마 우리 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워 내셨을 거다. 이제 그 마음이 어땠을지 너무나 공감이 되어서 가끔은 슬프기도 하다. 아기를 품에 안고 노래를 불러주며 잠을 재우는 내 모습에서 엄마를 떠올린다. 나로 인해 엄마가 잃어버린 것, 또 아기를 위해 내가 잃어가는 것. 좋든 싫든 간에 서서히 나도 엄마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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