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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밤은 어떤 의미인가요?

1부: 아싸, 재미난마을 이야기

by B급 사피엔스

향락과 혼술과 평화와 밤.

by 늘보


‘밤’ 하면 내겐 술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낮에도 술을 찾을 순 있겠지만, 밤만큼의 느낌과 농밀한 밀접성은 그 차이가 원자를 설명할 때 예로 드는 야구장(원자)과 야구공(원자핵) 만큼이나 크다.


향락의 밤. 계절이 지나가는 거리에는 취객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취객들 사이로 맛집들을 다 헤일 듯하다. 때는 약 20여 년 전, 이곳은 논현동 한신포차 사거리. 주 5일 근무제가 정착하기 전이라 토요일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거리였고, 나 또한 친구들과 갖은 이유로 건수를 만들며 소주 탑 꽤나 쌓았던 곳이다.


한번 시작된 술자리는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르고 1차, 2차, 3차로 스무스하게 넘어갈수록 어둠은 물러가고 아침이 밝아오기 마련이었다. 급기야 오전에 길거리의 행인들을 바라보며, 해장국과 함께 해장술로 마무리하는 날도 여럿 있었다. 뭐가 그리도 좋았었는지 그때는 친구들과 오직 술 마시는 게 유일한 흥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흥청망청 향락의 밤을 불태웠다.


혼술의 밤. 그로부터 약 10여 년 후, 이곳은 동네의 호젓한 선술집. 바 같은 긴 테이블에 앉아 주인장과 간혹 대화를 주고받으며, 술을 혼자 홀짝인다. 어느 동네에 살더라도 혼자서 조용히 술 한잔할 수 있는 아담한 선술집을 몇 군데씩 물색해 놓았다. 아지트 같은 아늑한 공간감이 있으면 딱 내 스타일이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시끄럽고, 손님이 많은 대형 술집 들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술집 스타일도 메뉴도 조금씩 바뀌었다. 급기야 언제부턴지 혼자 마시는 혼술이 진정 나를 위한 음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혼자 마시는 술을 즐겨하게 되었다. 혼자 마시다 보니 술자리도 빨리 끝나고, 술도 많이 마실 수 없다. 이래저래 장점(?)도 있고, 그렇게 또 10년 정도는 나름 차분해진 혼술의 밤을 보냈다.


평화의 밤. 갑자기 '웬?' 하겠지만 미사를 보다 보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서로서로 고개를 숙이며,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는 시간이 있다. 과거 나는 이 시간에 가장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사를 건넸었다. 평화는 모두에게 소중한 것이니까.


이런 것과는 별개로 정작 우리 집의 밤은 그리 평화롭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모험을 떠나듯 평화로운 밤을 찾아 새로운 길을 떠났고, 참 교육의 산실인 삼각산재미난학교(실제 존재하는 학교 이름이다)를 발견해 사는 곳도 수유동으로 옮기게 됐다. 그리고 그동안 이어졌던 ‘총성 없는 아우성’도 드디어 반감기를 맞이했다.


이곳에 정착 후 늦은 밤이 되면, 간혹 아이는 베개를 들고 슬그머니 아빠 옆으로 다가와, 쫑알쫑알 그날 있었던 이야기들을 누워서 읊어준다.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혼자 히죽히죽 웃다가 등을 살살 긁어주면 이내 스르륵 잠이 든다. 그러다 보면 나도 아이랑 같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기도 한다. 엄마랑 사냥놀이를 기다리는 치치는 이런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하품을 하며 ‘야옹~ 냐옹~’ 할 뿐이다.


그간 내가 향유했던 밤은 향락과 혼술의 밤을 거쳐, 평화의 밤으로 바뀌었다. 과거에 비해 밋밋하다 할 순 있겠지만 가족과 함께 평화를 맞이하는 밤은 바나나맛 우유처럼 부드럽고 달달하다. 이것저것 다 겪어보고 나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평안히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좋은 밤이란 걸 알겠다.


오늘 밤,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평화를 빕니다.”






모두 잠든 후에.

by 동그리


낮은 아이의 시간이다. 분주하고, 바쁘고, 요란하다.

요란한 낮이 여유로워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둘째까지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여유’라는 것이 생겼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내 이름보다는 아이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되었다.

‘OOO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 새로운 부캐의 탄생.

아이를 등교시키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 친구의 엄마도 만나야 하는 정신없는 하루. 그러다 모두 잠든 밤이 오면, 조용히 나만의 세계가 열린다.


그곳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잔소리쟁이 엄마도 없고, 종종종 바쁘게 움직이던 나도 없다.

오롯이 나만 남는 시간.


큰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무렵, 나는 가구 리폼과 DIY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는 아직 몸집이 큰, 뚱뚱한 TV를 쓰던 시절이었다.

거실장 위에 올려놓은 TV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멀쩡한 거실장을 재활용센터에 내놓고, 문짝 달린 오래된 원목 TV장을 들여왔다.


원목 TV장에 사포질을 하고, 바니쉬를 바르고, 하얀색 페인트를 칠했다.

낮에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작업은 늘 밤에 이루어졌다.

아이가 잠들면 조용히 라디오를 틀고 붓을 들었다.

새벽 1시, 2시까지 페인트를 칠하며 라디오를 듣는 시간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놀이 시간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완전히 나로만 채워진 시간.


하지만 둘째를 갖고 나면서 이 고요한 밤은 한동안 사라졌다.

그러다 둘째가 두 살쯤 되었을 무렵, 다시 나만의 시간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베이킹이었다.


나는 쿠키, 케이크, 빵을 굽기 시작했고, 특히 브라우니를 자주 만들었다.

큰아이가 등교하고 나면,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산책했다.

아이가 잠들면 근처 카페에 들어가, 깰 때까지 한두 시간 정도 머물렀다.


일주일에 두세 번 그렇게 드나들다 보니 단골이 되었고, 어느 날 내가 만든 브라우니를 사장님께 드렸다.

사장님은 맛있다며, 한번 팔아보지 않겠냐고 하셨다.

육아에 지쳐 있던 나는 그 말에 다시 힘이 솟았다.


그날 이후, 내가 만든 브라우니가 가게 진열대에 올랐다.

좋은 초콜릿과 버터를 사용하고, 정성껏 포장도 했다. 반응은 꽤 좋았다.

브라우니를 시작으로 호두파이, 레밍턴, 오징어 먹물빵(샌드위치용)까지 만들게 되었다.


돈이 많이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만든 것을 누군가가 기꺼이 돈을 주고 사 먹는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다 사장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가게가 문을 닫게 되었고, 그렇게 1년 반의 시간도 조용히 끝이 났다.


이제 아이들은 어느덧 스물한 살, 열다섯 살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사포질을 하거나, 브라우니를 굽진 않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여전히 조용히 나만의 세계를 연다.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글쓰기 모임에 올릴 글을 쓰고, 동동이의 털도 빗겨 준다. 아이의 재잘거림으로 가득하던 낮은 지나가고, 이제 각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낮 시간이 한결 여유로워졌지만, 이상하게도 여전히 밤이 되어야 진짜 내 시간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밤은 여전히 재미있는 놀이 시간이다.






풀빛 푸른 ‘은’에 밤·여물다 ‘율’

by 백호


결혼하고 꽃송이와 백호, 둘이서 지내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지 않은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아빠는 건강이 안 좋아져서 투병 생활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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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나와 띠동갑으로 두 바퀴 차이가 났다. 약 2년간의 투병 끝에 2014년 4월 22일, 아빠는 돌아가셨다. 2014년은 우리 가정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에 참혹하고 가혹한 한 해였다. 아빠의 부재는 나에게 매우 큰 슬픔이었고 그 슬픔에 흠뻑 젖은 채 꽤 긴 시간을 흘려보냈다.


1년 뒤.


꽃송이가 임신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쁜 소식이었다.

병원에서 임신을 확인하고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들었다. 신기한 듯 사진을 보던 중 흰 테두리에 적힌 출산 예정일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2016년 4월 22일. 하늘나라로 간 아빠가 우리에게 보낸 마지막 선물 같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을 가슴으로 삼키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


아이의 태명은 ‘콩콩이’(꽃송이가 임신 전에 두유를 많이 마셨다.)

너무나 조심스러웠기에 임신 안정기에 들어서기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출산이 다가왔고 자연주의 출산을 원했던 꽃송이 덕분에 콩콩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병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갓 태어난 콩콩이를 가슴에 안고 심장과 심장을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속삭였던 가슴 뛰는 따뜻한 기억이 있다.


4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벚꽃 눈이 흩날린 후 수수꽃다리꽃(라일락)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콩콩이를 기다리던 시간 때문인지, 매년 수수꽃다리꽃이 피는 곳을 찾아 진한 꽃향기를 맡으려 숨을 더 크고 깊게 들이마시곤 한다.


콩콩이를 기다리고 또 꽃송이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갈 때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을 지을까?’ 고민했다. 교회 관련 이름이나 돌림자, 한글 이름, 사주에 따른 이름은 필요 없었다. 내가 고민해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꽃송이와 이야기 한 건 ‘율’이 들어가고 중성적인 느낌의 이름이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은율이 어때요? 이은율."

"괜찮을 것 같아요."


한자를 찾아보니, 풀빛이 푸르러지는 뜻을 가진 '은(誾)'과 밤이 단단하게 여물다는 뜻의 '율(律)'을 찾았다.


‘풀빛 푸른 때에 태어나 단단하게 여물어 가는 아이’


풀빛 푸른 봄에 태어나, 밤이 단단하게 여무는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내실을 다지고 단단하게 여물어가기를 반복하며 굵고 알찬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은율’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렇게 은율이는 이름의 뜻대로 매년 단단하게 여물며 살아가고 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른 시간 속에서 주변의 많은 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활동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며, 뛰어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야무진 손놀림으로 접고 만들고 그리는 것을 즐기고, 자연 속에서 생명을 존중하고생물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몰입해서 스스로 배우고 연습하며 잘하는 아이로 성장하고 있다.


아이의 성품과 성향에 따라 성장해 가는 면도 있지만, 은율이의 고유한 빛깔대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안전한 삼각산재미난학교에서 돌봄과 배움이 어우러진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율이가 지금 모습대로 커가길 바란다. (욕심일지는 좀 더 내 마음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지만) 그리고 따뜻하고 선한 영향력이 지닌 사람으로 커가길 소망한다.


'너가 살아갈 세상살이, 그 옆에서 지지하고 응원하며 함께 걸어갈게. 너의 힘을 단단하게 키워가며 너만의 삶을 만들어 가길. 아빠가.'


+ 4월 22일은 은율이의 생일이자 아빠의 기일이기도 하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하고 그윽하게 그리워한다.

++ (초중등대안) 삼각산재미난학교 구성원들은 별칭을 사용한다. 아내는 꽃송이, 나는 백호이다.






어느 날 맛밤이 내게로 왔다.

by 완자


필시 나는 오랜 기근이 닥쳐와도 허기짐 모른 채 잘 살 것이다. 밤, 고구마, 옥수수, 감자, 토란, 도토리, 콩 등등. 이 모든 구황작물을 편애 없이 사랑한다.


우리 집은 고구마의 계절이 오면 둔기가 놀라고 갈만한 무거운 무쇠 솥에 고구마를 매일 같이 구웠다. 아침마다 엄마는 고구마를 굽고 아부지는 갓 구운 고구마를 꺼내 뜨거운 껍질을 벗겨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그릇에 올려 두셨다. 즉, 나의 아침밥이 완성된 것이다. 고구마가 나오는 계절이면 매일 아침 군고구마를 먹었다. 일 년의 절반 이상 나의 아침식사메뉴는 군고구마였으므로 집안은 늘 군고구마 냄새로 가득했다. 가족들은 이런 꾸준하고 한결같은 식성에 질렸는지 아무도 군고구마를 먹지 않았다. 결혼과 함께 무쇠 솥과 결별을 선언한 후 다소 걱정이 앞섰으나 최근에는 CU에서 군고구마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밤이 나오는 계절엔 밤을 한 솥 삶아 엄마, 아부지가 마주 보고 앉아 밤을 까셨다. 마치 열악한 환경의 가내수공업현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깐 밤은 타파통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고 그렇게 완성된 타파통은 하루 길어야 이틀을 못 넘기고 빈 통이 되었다. 역시 이런 나에게 질려 아무도 삶은 밤에 손을 대지 않았다. 공수에 비해 소비가 너무 빠른 탓에 전혀 타산이 맞지 않는 작업이었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은 이렇게 늘 적자를 감수하는 것일까?

가을은 가내수공업의 극 성수기였다. 아침엔 고구마를 굽고 저녁엔 밤을 삶는다. 단조롭고 번잡스러운 공정들이지만 부모님은 아무 불평 없이 딸을 위해 고구마를 굽고 밤을 삶아 주셨다. 고구마와 밤을 같이 삶으면 쉽지 않겠나 생각하겠지만 삶은 고구마는 좋아하지 않는 본인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미각을 가진 터라 고구마는 항상 무쇠 솥에 따로 구워 주셨다. 가끔 무거운 뚜껑을 열어 젓가락으로 쿡 찌르며 속까지 잘 익었는지 확인하면서.


우리 집 아이 역시 엄마의 식성 영향으로 밤을 좋아한다. 어쩌다 군밤 파는 곳을 발견하면 아이가 조를 틈도 없이 이미 한마음이 된 우리 둘은 군밤을 사기 위해 발걸음을 멈춘다. 하루는 아이가 수영강습이 끝난 시간이 지나도 집에 오지 않았다. 한참 있다 돌아온 아이는 선물을 사 왔다며 맛밤 4봉지를 내밀었다. 정월대보름을 맞이해 견과류를 구경할 겸 마트에 갔다가 엄마 생각이 나서 사 왔다는 것이다.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들었다.

또 흐르지 못하게 살짝 웃었다.

새벽에 잠이 안 온다며 그림 그리고 놀자며 엄마를 흔들어 깨우던 4살 아이는 정월대보름에 부럼을 챙길 정도로 훌쩍 컸다. 중학교 1학년이면 세수하고 이 닦는 것 정도는 세트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매일 아침 아이와 입씨름을 하지만 아이는 내가 전혀 보지 못하는 다른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들 말하지만 정월대보름 날에 둥근 맛밤이 환히 웃으며 내게로 왔다.






밤, 너는 자유다.

by 진달래


[스페인, 너는 자유다]라는 전 KBS 아나운서 손미나의 여행서가 있다. 아나운서 손미나에서 여행작가 손미나로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책이다. 10년도 훨씬 전 어느 날인가 서점 구경을 하다가 책 제목이 눈에 딱 띄어서 집어 들었고, 서서 읽다가 스페인과 손미나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결국 책을 사고야 말았던 기억이 있다.


“밤, 너는 자유다.”


이 순간 밤을 떠올리니까 나는 왜 대뜸 이 말이 떠오를까.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하루 중 내가 좋아하는 세 가지 시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점심시간, 퇴근시간, 취침시간이라고.


이 셋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단연코 취침시간이라 할 수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씻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두 다리 쭉 뻗고 누웠을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푹 잠만 자면 되는 것이다. 이 심리적 안정감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나는 잠을 자면서 하루 동안의 긴장과 피로를 다 풀어낸다. 이렇게 밤잠은 나를 무장해제 시켜준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시간은 퇴근시간. 나는 법원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법원에 기분 좋은 일로 오는 사람은 딱 한 종류, 집을 사서 소유권이전등기를 하러 오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 또한 등기소가 대부분 법원 본원에서 분리되어 외부로 나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 법원에서 근무를 하다 보면 방문하는 민원인들 모두가 하나같이 화가 나있거나 불안해 보이거나 긴장되어 있다. 그들이 낸 소장이나 신청서를 읽다 보면, 정말로 드라마나 영화보다 현실 속에서 더 비현실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남을 실감하게 된다. 하루 종일 이런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나 또한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점심시간은 일과 분리되어 잠깐 동안의 달콤한 휴식을 제공하고, 퇴근시간은 일에서 벗어나 나의 시간, 나와 가족의 시간, 나와 친구들의 시간이 되는 출발점이 된다. 다행히 법원의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어느새 퇴근시간인 경우가 많으니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장에서의 퇴근이 집으로의 출근 같은 생활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저녁준비를 해서 먹고, 아이의 하루를 점검하고, 숙제를 봐주든 뭘 하던 아이가 잠들 때까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돌아보니 잠시 잠깐이 아니었나 싶다. 학년이 올라 갈수록 아이를 돌보는 시간은 점점 줄더니, 올해 중학생이 된 딸아이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세심한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는 무관심한 척해주는 것이 더 좋은 배려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오늘 저녁엔 무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레어온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8시 30분 정도가 된다. 나는 11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다음 날이 원활하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 된다. 보고 싶었던 넷플릭스 드라마도 있고, 영어회화를 공부하려고 설치한 휴대폰의 유료앱도 있고, 또 읽으려고 가지런히 꽂아둔 책장의 책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얼른 내 작은 서재로 가서 노트북을 켠다. 요즘 가장 마음이 끌리는 것은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시작한 글쓰기 모임에 내기 위한 글을 한편씩 써 내려가는 것이 재미있다. 오늘은 무엇을 소재로 써 볼까?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할까? 그다음은 무슨 내용을 쓰지? 어제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며 비문과 어색한 표현을 고치고, 내가 써놓고도 정확한 의미가 헷갈리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기도 한다. 비록 에세이 형식의 생활글이지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지만, 나는 글쓰기 초보자이므로 조심조심 한줄한줄 써 내려간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한 편의 글을 단톡방에 올리고 나면 그 뿌듯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리고 문우들이 달아주는 칭찬의 댓글과 공감의 표시들은 부끄럽지만 나를 더 춤추게 한다.


손미나가 안정적인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뒤로하고 스페인이라는 이국에서 생활하며 느꼈을 자유로움을 나는 요즘 직장에서 퇴근하고 내게 주어지는 ‘밤’, 나의 작은 서재에서 느끼게 된다. 그래서 “밤, 너는 자유다.”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 이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되어 보세요.

by 쪼코


Let’t go! 하트 13! 누가 친구야!


술 한 잔을 더 하기로 합니다. 알콜이 살짝 부족해요. 다른 이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었나 봐요. 술집마다 사람이 가득합니다. 포장마차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다행히 빈자리가 있어요. 선배들이 파란색 테이블을 두 개를 붙입니다. 그 사이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앉았어요. 소주와 맥주 두어 병, 오뎅탕, 해물파전을 주문합니다. 옆 자리 손님들 목소리가 커요. 우리도 만만치 않고요. 정신이 없습니다. 그 때에요. 포장마차 입구 천막이 살짝 들리더니 우백 선배가 들어옵니다. 선배가 온 게 당연한 모양입니다. 다들 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나만 요란스럽게 애가 탑니다. 입모양으로 말을 건네요. 너무 오래간만이야. 우리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선배는 조용히 앉아 더 조용히 웃습니다.

물었습니다. 그것이 최선이었냐고.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거냐고.


숨을 죽이고 달립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달리려니 힘이 더 들어요. 골목에 골목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아무리 아무리 달려도 오빠가 안 보입니다.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늦어지면 안 되는데. 들키지 않아야 하는데. 제비 뽑기로 오빠가 뽑혔다고 빨리 알려야 합니다. 어느새 어슴푸레하던 날이 밝았습니다. 태양이 머리꼭지를 달굽니다. 마치 누군가 나를 겨냥해 열을 쏟고 있는 것처럼 뜨거워요. 이제 별 수 없습니다. 날아야겠어요. 급해요. 들키더라도 오빠를 찾아야 합니다. 다리에 힘을 주고- 힘을 주고-겨우 10센티미터 정도 떴습니다. 어. 아닌데. 이게 아닌데.


네. 내게 밤은 꿈입니다.


꿈을 자주 꾸는 편입니다. 내 꿈은 언제나 현실에서 출발해 판타지의 근처를 서성입니다. 그날 배운 카드놀이를 밤새도록 하고요. 하늘나라로 먼저 간 선배를 만나기도 합니다.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나선 트로츠키에게 냅다 따져 묻고요. 지붕 위에서 거주하는 종족으로 살아본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지붕을 걸어 다니기보다는 대개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간단한 일은 손목을 떼어내 손만 보내 처리해요. 그러다 보니 지붕 위에 분리된 손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매해 한 사람을 뽑아 제물로 삼는데, 내가 아끼는 사촌 오빠가 걸렸어요. 피하라는 말을 전해야 합니다.


밤이 지나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옵니다. 포장마차에서의 그리운 만남도, 하늘을 나는 순간도, 손목을 분리해 일을 처리하던 기묘한 경험도, 숨이 막히도록 달리고 또 달리던 긴박한 장면들도 모두 꿈입니다. 하지만 꿈에서 느낀 긴장, 그리움, 호기심, 공포는 현실의 몸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그 몸으로 낮의 현실을 살아내고, 밤의 꿈으로 들어가길 반복합니다.


네. 아직 덜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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