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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내게 전하고 싶은 감사함이 있나요?

1부: 아싸, 재미난마을 이야기

by B급 사피엔스

본적도 바꿀 수가 있나요?

by 늘보


“본적 바꾸러 왔는데요.”


구청 직원이 나를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차남이신가 봐요?”

“어.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보통 본적 바꾸러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차남이세요. 장남들은 특유의 내 뿌리, 핏줄 이런 성향이 강해서 본적을 거의 안 바꾸시거든요.”

“아, 네네”

”내 집 장만하셨나 보다” 구청 직원은 나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했다.

“어? 네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보통 차남들이 서울에서 살다가 내 집을 장만하면, 본적을 옮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얼굴에서도 표가 나요. 기분 좋은 표정이”


이런 게 짬밥일까? 중년을 넘겨 보이는 공무원분과 십 년도 전에 나눈 대화다. 세월에서 얻은 공무원의 내공은 실로 대단하다.


요새 ‘영끌’이란 단어처럼, 그때는 ‘전세대란’이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전세보증금이 몇천에서 몇억까지 올랐다는 뉴스도 있었다. 전세 만기가 3개월가량 남았을까? 임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긴장된 손으로 전화를 받은 내게, 임대인은 친절하게도 전세대란이 무슨 뜻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 나게 일깨워 주었다. 대출을 더 받을지, 이사를 갈지 고민이 한 가마니였다.


이사는 녹록지 않았다. 마땅한 매물도 없고, 부동산도 전세대란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전세보증금을 올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전셋값이 매맷값의 80% 비율을 넘어서고, 폭등이란 말들이 쏟아지는 이 시기에 초라한 멘탈을 붙잡고 은행에 쭈그리고 있었다. 상담 순서를 기다리며 뉴스와 상품 전단지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전셋값이 매맷값 80% 비율이면, 여기서 대출을 조금만 더 받을 수 있다면 집을 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집을 산다는 건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별안간 스친 생각이었다.


은행에서는 주택담보대출이라 했다. 금융 지식이 1도 없는 내겐 낯설고 어려운 상담이었다. 가장 황당했던 건 대출서류들을 접수한 후 심사를 받아야 가능 여부가 확인된다는 것이었는데, 대출서류 중에는 매매 계약서도 포함돼 있었다.


“아니, 대출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매매계약은 덜컥 어떻게 해요?”


애매모호한 설명은 은행들의 만국 공통어였다. 그만큼 여러 은행을 발품 판 끝에, 가까스로 만난 세상 친절한 참은행원이 눈높이 교육을 해주었다. 담보대출이 처음인 것 같은데, 승인이 안 될 것 같으면 애초에 창구에서 접수를 하지 않는단다. 창구에서도 나름의 판단 후 심사를 요청하고, 그러면 대부분 승인이 된단다. 그런데도 간혹 거부되는 경우가 있어, 심사를 받아봐야 한다고 안내한단다. 거부되는 경우도 추가로 채무가 발견되거나, 제출 서류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했다. 처음으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만난 순간이었다. 세상 친절한 참은행원에게 칭찬으로 응수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안내를 안 해줄까요?”

“그게요, 아마도 대부분은 이 정도는 다 알고 오신다고 생각할걸요? 또 솔직히 정부 대출은 대행만 하는 거라 실적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되고요.”


참은행원이 모범사원으로 승승장구하길 바라며, 돌아가는 길에 ‘전세대란발 발끈 러시’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세든 매매든 대출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고, 2년마다 한 번씩 보증금은 올려야 되니, 초!장기 적금 드는 셈 치고, 집을 사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고군분투 은행과 부동산을 들락거리며, 집을 구하고, 계약을 하고, 바로 옆 동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찌나 가까웠던지 이사 차는 짐을 싣고 10미터쯤 이동 후 시동을 껐다.


동주민센터에서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는데, 문득 ‘본적’도 바꿀 수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은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 본적으로 남아있어, 바꿀 수 있다면 이번 기회에 바꾸고 싶었다. 혹시나 하고 본적 주소도 옮길 수 있는지 물었다.


“네, 본적 이전은 신분증 가지고 구청으로 가시면 돼요.”


한참 오래전 일이다. 대출금 상환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도록 ‘토닥’이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카드 고지서와 자매지간이라고나 할까? 가끔 뉴스에서 ‘이사 철’이라는 보도가 나오면, 잊고 있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칭찬에 인색한 와이프도 한마디를 건넨다. 평생 동안 칭찬받을 일 하나 했다고.






장롱면허.

by 동그리


아빠는 택시드라이버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개인택시를 운전하셨다.

조금 더 어릴 적, 국민학교 4학년 때 무렵에는 고속버스를 몰고 다니셨다.

가끔 아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5시쯤 집 앞 정류장 지나간다. 나온나.”

동생과 나는 서둘러 신발을 신고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얼마 후, 아빠가 몰던 버스가 멈춰 서고,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거 가지고 가라.” 산지에서 직접 구해오신 과일 꾸러미가 우리 손에 안겼고, 아빠는 다시 핸들을 잡고 떠나셨다.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동생과 나는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아빠가 멀리까지 다녀오실 때면 며칠 만에 집에 들어오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빈손인 적은 없었다.

어떤 날은 초콜릿 한 상자, 어떤 날은 빵이 한 상자.

한두 개가 아니라, 늘 박스째였다.

“조금만 사 오라니까.” 하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아빠 때문에 살이 자꾸 쪄.” 하는 내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아빠는 늘 박스째 사 오셨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빠는 고속버스 운전을 그만두고 개인택시를 몰기 시작하셨다.

삐까뻔쩍한 새 차가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섰고, 우리는 팔공산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새 차 냄새.

팔공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구불구불했지만, 차는 부드럽게 달렸다.

창밖에는 짙푸른 산 그림자와 반짝이는 계곡물이 이어졌고, 아빠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따라 낮게 흥얼거리셨다. 그날의 아빠는 조금 자랑스러워 보였고, 우리는 그런 아빠가 좋았다.


아빠는 다시 긴 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내기 시작했고, 우리는 자랐다.

언제까지고 내 곁에 계실 것 같던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운전 안 할 거야. 절대로 안 할 거야.’

아빠의 사고 이후, 운전은 두렵고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해,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지금은 안 해도, 언젠가 필요하다. 지금 시간 있을 때 배워둬라.”

그렇게 따게 된 면허증은 십 년 동안 장롱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자라면서 운전할 일이 하나둘 늘어났다.

결국 다시 도로주행 강습을 받고, 운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남편이 운전해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장거리 운전도 번갈아 할 수 있으니 한결 수월하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가 그때 운전학원에 등록해 주지 않았다면, 내가 스스로 면허를 따려고 했을까?

아마......그러진 못했을 것 같다.

겁이 나면서도 면허를 따둔 그때의 내게 고맙고, 조용히 학원을 등록해 준 엄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별일 없이 운전해 오고 있는 걸 보면, 어쩐지 아빠가 곁에서 조용히 도와주고 있는 것만 같다.


“오른쪽, 왼쪽 잘 살피고, 노란 신호등은 빨리 가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속도를 줄이라고 있는 겁니다.”

도로주행 연습 때 강사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오늘도 운전을 한다.






나만의 일상.

by 백호


아빠의 마흔아홉 해에 심장 인공판막 수술을 했다. 담당 의사가 가족에게 수술의 위험성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을 때조차, 그 모든 과정이 현실 같지 않았다. 수술전날, 아빠와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서던 순간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수술 과정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일조차 힘겨웠다. 의사의 말은 마치 영화 상영 전 예고편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수술 후 10여 년이 지나자 후유증이 찾아왔다. 부정맥으로 생긴 혈전이 몸속을 떠돌다 뇌혈관을 막으면서 불가역적인 뇌졸중이 발생한 것이다. 몸 안에 폭탄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 가혹한 상황이었다. 아빠는 응급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천안에 사는 엄마와 동생이 병간호를 전담했다. 나는 그들에게 늘 큰 부채감을 느꼈다.


아빠가 입원해 있는 동안, 금요일 학교가 끝나면 기차나 버스를 타고 천안으로 향했다. 주말 동안 아빠 곁을 지키며 엄마와 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덜어내려 애썼다. 그리고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나면서, 내 병원 생활도 끝이 났다.


지금 나는 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원래는 농담을 잘하고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런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가끔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무심코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내게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빠의 투병과 결혼 후 겪은 난임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천안 병원을 오가며 만났던 기차역, 버스 터미널, 차창 밖 풍경은 그저 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대학병원 문을 들어서는 순간, 세상은 전혀 달랐다.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 곁을 지키는 가족들, 병문안 온 사람들,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들. 평소의 일상에서는 좀처럼 마주하지 못할 풍경이었다.


병실 복도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진 환자들이 가득했고, 중환자실 앞 대기실에는 초조한 눈빛의 보호자들이 면회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면회 후 밖으로 나오는 이들의 얼굴에는 안도와 탄식, 환희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생과 사가 넘나드는 그 공간에서 환자와 가족들은 무력감과 간절한 소망 사이를 오갔다. 나 역시 병원에서의 일상을 통해, 생명이 얼마나 존귀한지, 우리가 무심히 살아내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결혼 후에는 난임의 시간을 지나야 했다. 우리는 결혼하면 자연스레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현재는 당연한 가치는 아니다) 하지만 난임 병원에 가보면 그 ‘당연함’을 누리지 못하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그래서 결혼 여부나 아이에 관한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무심한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다. 그것은 내 언어와 행동을 스스로 검열하게 만든 경험이 되었다.


이런 삶의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소 무겁고, 붙임성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말과 행동을 더 신중하게 다듬어 준 시간이기도 하다.


'이것이 감사까지 할 일일까?’

그렇다. 감사하다.


삶의 경험은 내 모습뿐 아니라 내가 맺는 관계,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의 태도까지 바꾸어 놓았다. 흔한 일상에서 벗어나 있었던 나만의 일상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시간들이 보내온 가장 큰 선물인 아들을 만났다. 아들은 내 삶의 부속물이 아니라 온전히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절절히 느끼며 살아간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심장은 눈물을 펌프질 하듯 울컥 인다.


물론 본래 가지고 있던 밝고 유쾌한 기질을 잃은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동전이 한쪽 면을 보이면 다른 한쪽은 바닥을 향하는 것처럼, 삶도 무엇을 얻으면 다른 무엇을 내어주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깎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되돌아보며, 감사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날아라, 녹발이.

by 완자


결혼하기 전 남편과 아이는 낳지 않기로 했었다.

결혼 전부터 누누이 양가 부모님께도 이야기했었지만 어느 정도로 믿고 계셨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남편도 첫째가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저 아이들은 저러려니 하셨는지 모르지만 크게 반대를 하시지는 않았다. 여하튼 나의 의지는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나라는 인간 하나도 제대로 구실을 못하고 있는데 내 새끼를 키운다는 부담감이 컸다. 거기에 더해 친구들의 지친 육아모습에 지레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능과 불가능은 동전처럼 등을 마주한 하나라고 하지 않던가. 친구들과의 모임에 함께 왔던 친구의 딸이 북엇국이 든 작은 유리병을 귀여운 두 손에 꼭 잡고 고개를 15도에서 70도까지 꺾어가며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며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이렇게 귀엽고 소소한 순간, 순간을 함께하게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슬쩍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결혼하고 1년 후 속이 울렁울렁 대기 시작했다.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아이가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즈음 친정 식구들과 명절 때 모여 마작을 하곤 했다. (돈은 걸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난무하는 게임 시간이었다.) 길게 써놓은 규칙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습득하지 못한 상태지만 초록색으로 發자가 쓰인 패와 빨간색으로 中이 써진 패가 좋다는 것만 이해했다.


아이의 태명은 마작패 중에 좋다는 초록색 '發'패에서 따 와 '녹발이'가 되었다. 빨중이보다는 녹발이가 발음도 단연 귀엽고 한자 획수도 많아 왠지 문학적으로 느껴졌다. 녹발이는 태어나서부터 크게 손이 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얌전하고 온순한 성격에 음식도 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아이가 커가면서 편식도 심해지고 고집도 심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아이가 태어난 첫 해는 친정에서 맡아서 키워 주셨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고 녹발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일요일 밤에 다시 친정집에 맡기는 상황이 반복됐다. 맞벌이였던 우리를 위해 선뜻 친정부모님은 밤낮으로 아이를 돌봐 주셨다. 친정엄마의 작은 수첩에는 아이가 고개를 처음 가누던 날짜, 오늘 말했던 단어, 문장, 이유식 메뉴 등등 여러 가지가 적혀 있다. 나는 크게 엇나가는 행동을 했던 건 아니지만 마냥 부모님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듣던 아이도 아니었던지라 성인이 되고는 부모님의 상심이 크셨다. 그 와중에 내가 한 가장 큰 효도랄까 부모님께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당당함은 녹발이를 낳은 것이다. 흔히 말하는 부모님께 손주를 안겨드린 것이 나의 그간의 고집스러움과 까탈스러움의 반성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녹발이는 빠릿빠릿한 아이는 아니지만 정도 많고 순수해 아직도 외할머니 집에 가는 날엔 신이 나 아침 일찍 벌떡 일어나 준비를 하고 휘리릭 버스를 타고 사라진다. 할머니네 가면 맛있는 외식 및 할아버지의 용돈 투척, 신나는 티비타임이 기다리고 있다. 중2에게 아직 이 정도 조건이 매력적이라는 것은 부모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아이덕에 슬픔도 웃음도 많아졌다. 이렇게 순하고 착한 아이에게 왜 틱이 생겼을까 생각하면 까맣고 끝도 없는 터널 안에 있는 느낌일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1+1 행사 마지막 날이라고 온 가족이 달려가 탄산수를 두 손 가득 사 왔는데 이틀 뒤 다시 가보니 새롭게 1+1 행사가 시작됐다며 모두 속았다며 깔깔 웃으며 좋아하는 것을 보면 슬픔과 등을 마주한 것은 아마도 이런 것들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 날 봤던 친구딸의 북엇국 원샷 스킬처럼 작고 웃음 짓는 소소한 일상들이 깜깜한 터널 안에서도 한발 한발 내딛는 힘이 되게 해주는 것일 테다.






잘했어, 고마워~

by 진달래


“우리 동네로 이사 오세요. 정말 좋아요.”


이사를 계획하는 직장동료나 지인이 있으면 내가 늘 하는 소리다.


“어디 사는데요?”


그러면 난 주절주절 우리 동네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강북구 우이동 쪽에 OO여대 아시죠? 그 맞은편에 솔밭공원이라고 소나무가 아주 많은 공원이 있어요. 그리고 그 바로 옆에 OO아파트라고 저층 아파트가 있는데, 저는 거기 살아요. 아마도 서울 시내에서 집값이 가장 쌀 걸요. 단독주택도 많고, 평수 좋은 예쁜 빌라도 많이 있어요. 공기 좋고, 북한산 전경을 한눈에 볼 수도 있지요. 겨울 눈 덮인 북한산의 모습은 정말 감동 그 자체입니다. 여름에 우이동 계곡이랑 백련사 계곡은 또 얼마나 시원하게요. 여름에 따로 멀리 갈 필요가 없어요. 도시락 싸서 돗자리 하나 메고 조금만 걸으면 계곡에 닿아요. 아이들 놀이천국이죠. 어른들도 발 담그고 있으면 너무 좋고요.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경전철이 연결되어 있어 시내로 나가는 것도 편리해요.”


상대가 끊지 않으면 내 설명은 더 이어지지만 대부분 이쯤에서 끝이 난다. 전철이 아니고 '경전철’ 이 말에 우리 동네는 바로 서울에서 별 볼 일 없는 외곽지역으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그리고 아이들 학교와 학원 이야기로 접어들면 더 할 말이 빈약해지는데, 나는 명품학교 삼각산 재미난 학교를 당당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좀 가면 쌍문동에 ‘OO고’라고 서울대를 제법 보내는 학교가 있다고 얼버무리며 급하게 말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면서 속으로 ‘그들에게 우리 마을과 학교를 설명한다고 이사를 오지는 않을 거야.’라고 마을과 학교에 대한 설명에 꼬리를 내린 나를 변명을 하곤 한다. 물론 간혹 우리 마을과 학교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러면 마을 장터 이야기며 학교에서 아이들이 지내는 이야기까지 주절주절 나의 사설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말 살고 싶은 동네라는 대답을 끌어내기도 한다. 주말에 한번 놀러 와보겠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런데 아직 한 명도 이사 유치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나는 이렇게, 일부의 사람들이 정말 살고 싶은 동네이지만 바로 이사를 결정하지는 못하는 동네, 주말에 한 번쯤 놀러만 와보고 싶은 동네로, 6년 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이사를 결정했다. 무지했던 것일까? 무모했던 것일까?


베란다 앞에 뻗어 나온 소나무의 전경이 마음에 든다며 바로 계약을 한 우리 집은 그 소나무로 인해 일 년 내내 햇볕을 잘 볼 수 없지만, 나는 “자기야~ 별장에 온 것 같지 않아?”라며 관리사무소로 소나무 가지를 쳐달라고 전화를 하려는 남편의 휴대폰을 빼앗는다.


다른 지역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를 때, 뜀틀 넘듯 살짝 올랐다 내려앉는 눈치 없는 집값으로 다른 동네로 거주이전의 자유가 축소 었지만, “난 이제 이사를 간다면, 시골로 가서 마당 넓은 시골집 하나 사서 살 거야. 아니면 이 동네 쭉 살던지.”라고 말하며 애써 가볍게 무시해 주신다.


난 이런 내가 좋다. 역세권, 학군, 재개발 호재. 이런 거 거들떠보지 않고, 내 눈에 들어오는 동네, 내 마음을 사로잡은 집을 고민 없이 결정할 수 있었던 나. 비록 한 번씩 다른 동네의 집값을 떠올리며 부러움의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지만, 곧 고개를 힘차게 내저으며 ‘아냐, 이건 정상이 아니야.’하며 바로 정신 차리는 나.


봄날 벚꽃 흩날려 눈처럼 쌓인 골목길을 걸으며, 더운 여름 챙모자를 눌러쓰고 둘레길을 걸어 텃밭을 오가며, 가을비 촉촉이 내리는 솔밭공원을 산책하며, 겨울 눈 덮인 북한산을 바라보며, 이해타산 따지지 않고 이 동네로 굳이 집을 사서 이사를 온 순수했던 나에게 “잘했어. 고마워~”라고 가만히 속삭여 준다.






1박 2일.

by 쪼코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온전하게 행복할 수 있었던 1박 2일. 들여다보면 사진 속 사람사람마다 가슴 아린 사연 하나씩 안고 있지만. 다들 웃는다. 그 사연 촘촘히 함께 했다 하면 거짓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가족. 아버지 칠순을 빌려 서로에게 고맙다, 장하다 칭찬하며 안아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달까. 모두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2015.8.22(토)~23(일) 아버지 칠순 여행 메모 중


삼 남매가 의기투합했습니다. 아버지 칠순 기념 파티를 1박 2일 여행으로 기획하고 다녀왔어요. 2015년 음력 7월 8일. 여름 끝자락이었습니다. 바닷가 독채 펜션, 잔디밭과 수영장, 출장뷔페, 사진작가. 이동은 연예인 벤으로. 호사스럽다면 호사스럽고, 번거롭다면 번거롭고, 또 유별나다면 유별났던 여행입니다. 처음엔 아빠가 초대에 망설이셨어요. 뷔페도 아니고, 연고지도 아닌 곳에서의 파티가 어색하셨나 봐요. 그러다 점점 탄력이 붙더니 15명 내외로 생각했던 파티 규모가 30명을 훌쩍 넘어섰어요. 직계 가족 외에 아빠의 형제자매들, 엄마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또 자녀들의 자녀들. 사돈의 5촌이 함께 하는 1바악 2일!


굿즈도 준비했습니다. 아이디어는 그즈음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에서 빌렸습니다. 이서진이 ‘짐꾼’이라 쓰여진 티를 입고 나왔었거든요. 맞아요. 지금은 다소 흔해진 가족티. 그때만 해도 컨셉을 이해하는 업체를 많지 않았어요. 디자인은 둘째가 직접. 한 장 단위로 프린트해 주는 업체를 어렵게 찾았습니다. 티 윗부분엔 아빠 사진과 이름, 칠순 축하 멘트를 넣었어요. 아빠 티엔 가슴 부분엔 대문짝만 하게 ‘주인공’이라고 새겼고요. 참가자 옷엔 아내, 큰딸, 작은딸, 아들, 큰 사위, 손주, 누나, 동생, 동서, 처남, 처제 등을 프린트했습니다. 같은 조카, 처남이라도 사이즈가 달라요. 200일 갓 넘은 아가옷부터 투엑스라아지까지. 나름 파티 참가 굿즈인데 누구는 드리고 누구는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옷 준비를 한 달 전부터 했는데 여행 바로 전날까지도 파티 신청이 계속되어 옷 주문도 이어졌지요. 마지막 옷은 퀵으로 받았답니다.


파티 당일. 아빠는 형제들이 한 명 한 명 오실 때마다 귀하게 손을 잡고, 조금은 과장되게 인사하며 당신을 위한 파티를 즐기셨어요. 사진사에겐 흰색 모시 한복을 입고, 해안도로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을 남기고 싶다는 등 적극적인 디렉션을 주기도 했어요. 이런 아빠가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다른 가족들도 가족티를 드리면 경계가 풀리더라고요. 아빠와 기념촬영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파티에 참가했습니다. 주인공과 공식(?) 촬영을 마친 후에는 삼삼오오 흩어져 동생끼리, 처제끼리, 조카끼리 사진을 찍으며 본행사를 기다렸어요. 늦게 온 가족에겐 티부터 받아오라고 들뜬 목소리로 안내도 하고요. 어린이 청소년은 마당 수영장에 첨벙. 늦여름 햇빛, 바람, 잔디를 각자의 방식으로 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뿌듯한 시간입니다. 큰아이가 다섯 살. 둘째 아이 9개월. 육아 휴직 기간이었는데, 준비하면서는 정신없다, 정신없다 했어요. 평범한 잔치나 여행을 갈 걸 그랬다 후회도 하고요. 그런데 돌아보니 최고로 잘한 일이에요. 그날의 사진을 한 번씩 보면서 셀프 칭찬. 셀프 쓰담하곤 합니다.


잘했다, 이지현! 고맙다,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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