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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나요?

1부: 아싸, 재미난마을 이야기

by B급 사피엔스

뒷짐 지듯 염탐하기.

by 늘보


작년 이맘때쯤 호젓하고 조용한 삼각산자락 주변으로 유유네는 터를 잡았다. 첫인상은 삼각산의 맑고 깨끗한 정기 때문이라 그런지 동네가 좀 쌀쌀하게 느껴졌다. 참교육의 산실인 ‘삼각산재미난학교’ 입학을 위해(실제 존재하는 학교 이름이다), 14년 만에 이사라 낯설고 새롭다. ‘이 동네에는 뭐가 있나?’ 구석구석을 살폈다. 동네 마트, 식당, 미용실, 혼술 단골집 등 새로 뚫을 곳이 많다.


국민마트. 주변에 있는 가장 큰 대형마트다. 간단한 장을 보러 매일 같이 드나드는 곳이다. 150미터 정도 거리로 집에서 매우 가깝다. 놀라운 건 24시간 영업을 한다. 당연히 밤 11시 정도에 문을 닫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몇 개월이 지나서야 24시간 영업을 알게 됐다. 그 덕에 새벽이고, 이른 아침이고 생각날 때마다 참새 방앗간처럼 드나든다. 가장 자주 사는 품목은 두부와 애호박, 감자. 된장찌개나 고추장찌개를 자주 해 먹는 편이다. 요즘은 줄여서 ‘국마’라 부른다.


청수냉면. 가게 간판은 냉면집이지만 만두를 포장하러 자주 들린다. 단골인 편인 데도, 냉면을 지금까지 먹어본 적 없다. 김치 왕만두 5개에 4,500원. 가격이 세월을 거꾸로 가고 있는 듯한 가게다. 만두에 트러플 오일을 잔뜩 뿌려 먹는 걸 좋아한다. 담가 먹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김치만두와 트러플 오일의 조합은 묘하게 궁합이 잘 맞는다. 트러플 오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강추한다. 서로 전혀 다른 맛과 향이 충돌되어, 서로의 맛을 극대화시킨다.


이 지역의 랜드마크는 광산 사거리. 그런데 광산 빌딩은 없고, 사거리만 있다. ‘광산 빌딩은 어디 있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아이와 동네를 거닐고 있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대뜸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어~ 저기에 옛날에 어엄청 큰 광산 빌딩이라고 있었어. 아주 유명했지! 없는 거 없이 별거 별거 다 팔았어. 옷도 팔고, TV도 팔고, 뷔페도 엄청 크고,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했지. 떼돈 벌었지, 아마? 근데 망했어! 시대가 바뀌었잖아잉? 요즘 누가 그런데 가나? 다 백화점이나 마트로 가지. 그래서 문 닫은 지 한참 됐어. 지금은 그 자리에 저기 보이지? 건물 통째로 헐고 저 병원이 들어왔어. 그래도 하도 광산 빌딩이 유명해서, 이름만 광산 사거리라고 하는 거야”


속사포 랩처럼 순식간에 이야기를 쏟아내더니, 쿨하게 얼굴도 한번 안 쳐다보고 휑~ 갈 길을 간다. 광산 사거리의 유래와 광산 빌딩의 흥망성쇠를 아주 짧은 순간, 뜻밖의 장소에서 알게 되었다.


촌놈. 광산 사거리에 다다르면 모퉁이에 보이는 과일가게. 과일을 주르륵~ 늘어놓고, 야채며, 반찬이며 장 볼거리를 저렴하게 판다. 아이랑 산책하며, 종종이 가게를 들려 무엇을 파는지 살펴보고, 가끔 과일을 사다 먹는다. 촌놈은 금세 우리 집에서 유명한 가게가 되었다. 집에 과일이 떨어졌거나, 과일 이야기만 나오면 아이와 나는 동시에 우스갯소리처럼


“촌놈?” “촌놈에서?” “촌놈 가게?” 이런다. 이름도 재밌다. 촌놈.


광산 사거리에서 수유역까지 더 내려가 보면 ‘수유식자재마트’가 있다. 모든 물건이 크고 거대하다. 1.8킬로짜리 초거대 스팸 통조림도 있다. 아이랑 신기하게 쳐다보며, 들어 올려보기도 했다. 수유역에는 종종 들리는 교보문고, 아이가 친애에 맞이하는 아트박스, 온 가족의 생필품 천국 다이소도 있다. 동네 정보는 아이가 나보다 빠삭하다. 어디서 마을버스를 타고, 어떤 버스가 수유역 쪽으로 가는지, 외할머니 집으로 가는 버스는 몇 번인지, 타는 곳과 버스 노선을 줄줄 외우고 있다.


‘언제 이렇게 컸지?’

이사 올 때 가장 큰 걱정거리가 아이가 갓난아이일 때부터 자라고 골목대장처럼 누비던 동네를 떠나, 새로운 동네에 적응하는 것이었는데 어느새 동네 박사가 되어있다.


일 년 정도 지내보니, 삼각산이 반갑다. 주말에 아이랑 처갓집을 가거나, 도심으로 나들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멀리서 삼각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 말이 동시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집에 다 왔다~!!”






서울의 달.

by 동그리


“엄마, 밥은? 밥은 먹었나?

뭐라꼬? 안 들린다. 뭐라카노? 좀 크게 말해봐라.”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억양이 들려오면, 나도 모르게 바로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나를 빤히 보더니 묻는다.

“화났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닌데, 기분 좋은데.”

내 고향은 대구다. 대구 사투리는 말이 짧고 단호해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듣기엔 다소 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십 년 전, 직장 생활을 하던 때였다. 업무 통화를 마칠 무렵, 상대방(서울 사람이었다.)이 말했다.

“사투리를 많이 쓰시네요?”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네? 아, 네. 그렇죠. 대구 사람이니까요.”

내 말이 알아듣기 힘들었나? 사투리를 많이 쓴다니? 무슨 뜻이지?


그 말을 듣고 나니, 다른 지역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어데 가노?” 대신 “어디 가?”, “밥은 묵었나?” 대신 “밥은 먹었어?” 가능하면 사투리를 덜 쓰려다 보니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배우들이 어색한 사투리를 쓰는 느낌이랄까?

나는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나누고 나면 늘 같은 말을 듣는다.

“대구에서 오셨어요?”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엄마, OO이가 사투리 좀 쓰지 말래.”

“그래? 그래서 뭐라고 했어?”

“엄마, 아빠가 대구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어.”

“오! 잘했네. 맞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대답 잘했네.”


정말 그랬다. 사투리는 숨길 일도 아니고,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다.

편하게 살자. 편하게. 사투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서로 알아들으면 되는 것 아닌가.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숙아, 내다. 뭐하노? 날씨 좋제? 완전 봄이다. 봄.

아들은 잘 있나? 별일 없제? 나도 잘 있다. 맞나? 대구는 벌써 여름 된 거 아이가? 여는 아직 괜찮다. 대구보다는 기온이 낮다 아이가. 아직 쌀쌀하다. 대구는 금방 더워질 낀데 우짜노? 서울에 놀러 온나. 보고 싶다. 오면 성수동에 가보까? 분위기 좋은 데 많다. 대구도 많이 변했제? 서문시장 납작 만두랑 떡볶이 먹고 싶다. 여는 납작 만두 파는 데가 없다 아이가. 맛있는데 왜 안 파는지 모르겠다.

아들이 좀 자라면 좀 보고 사나 했드마는, 잘 안된다. 그쟈? 얼굴 잊어뿌겠다. 연락도 잘 몬 하고,

요번에 대구 내려가면 꼭 연락하께. 미안타. 잘 지내고, 또 연락하께. 서울 올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알았제?”






내 안의 공감은 행동으로 옮겨진다.

by 백호


교회 예배가 끝난 뒤, 꽃송이, 은율이와 함께 동네에서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고, 직원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키오스크로 주문을 마친 후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손님이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본 채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직원은 아마도 점주 같았고 키오스크로 주문하라고 안내했지만, 손님은 몇 번이나 냉장고와 키오스크 사이를 오가며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어떤 아이스크림을 고를지 결정하지 못한 채, 쿠폰을 들고 반복해서 움직이는 모습은 어딘가 낯설고도 당황해 보였다. 결국 직원이 직접 계산대에서 결제해 주신다며 손님의 휴대전화에 있는 쿠폰을 찍었다.


나는 약 10분간 상황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개입했다. 혹시 그 쿠폰을 사용할 수 있는지 물어봤더니 이미 사용된 쿠폰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서 그 손님을 키오스크로 가서 안내하며 설명을 해 드렸다.


다섯 가지 아이스크림을 고르셨길래, “이건 혼자 드시기엔 너무 많을 수 있으니, 하나만 고르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결국 한 가지로 선택을 마치고, 키오스크 주문과 결제도 그분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천천히 도와드렸다. 주문 후엔 번호가 호출되면 아이스크림을 받으면 된다고 안내했다. 그분은 내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 상황을 처음 본 순간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괜히 나섰다가 오히려 부담되지는 않을까 염려도 있었지만, 이러다 결국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고 그냥 나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선다는 것, 자립.

우리는 살아가며 자기 일을 해결하고, 다양한 변수에 대응하는 법을 배운다. 어떤 사람은 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해 익숙해지고자 노력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선 긴장하고 당황해 그 모든 과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 누군가 조용히 옆에 있어 주는 것,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내가 다른 시선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한 걸음 다가가 작은 도움을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날 또 한 명의 어르신을 보았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세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혼자 드시고 계셨다. ‘배탈이 나시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곧 ‘아마 이게 할머니의 소소한 즐거움이겠지’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가게를 나섰다. 문밖은 여전히 무더웠다.


나는 평소 잘 나서지 않는다. 조용히 있는 편이다.

하지만 ‘연민’이라는 회로가 작동하면, 내 안의 공감은 행동으로 옮겨진다.

지하철 계단 앞에서 무거운 짐을 든 어르신을 볼 때, 버스 안에서 몸이 불편해도 말하지 못하는 분을 마주할 때, 산에서 응급조치가 필요한 상황을 목격할 때, 혹은 추운 겨울 주취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말을 걸고, 필요한 행동을 한다.


새로운 공간에서, 낯선 관계 앞에서 나는 조용하지만, 때론 누군가의 곁에 다가가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도 인간력 튜닝 중입니다.–

by 완자


“컬러는 다 봤어요. 어차피 여름 거니까 조금 더 밝게 가도 좋을 것 같아요.

B/T 몇 개 더 보고 다시 이야기하시죠.”


여름 거라고? 우린 지금 F/W준비 중이 아닌가?

어느 업체랑 통화를 하는 거지?

전혀 못 듣던 업체명인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가? 회사 다니면서?

아니면 곧 그만두나?


여러 가지 궁금증이 들었지만 직접 묻기는 왠지 망설여졌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모른척하는 게 예의인가 싶었다. 어서 야근 끝내고 집에 가야지.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즈음,


"완자야, 나는 네가 참 어렵다."

......?

전화를 끝내고 조금 지나서 같은 팀 언니가 말했다.

특별히 그날 어떤 일이 있었던 것도 그동안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야근 직전에 사이좋게 라볶이와 김밥을 나눠먹은 사이이며 2년 가까이 한 팀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전화 내용 들었지? 회사 일 말고 아르바이트하고 있거든. 너도 업체 여러 군데 알고 있잖아? 좀 더 경력이 쌓이면 거꾸로 따로 일을 봐 달라고 하는 연락이 오기도 할 거야. "

......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팀장 언니보다 5살 어린 내가 그녀에게 어려운 존재라는 것과 그녀는 얼마 전부터 투잡을 하고 있다는 이 두 이야기의 연관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결국 알맞은 질문과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본의 아니게 침묵을 유지했다. 아마도 상대방은 오해하는 상황이 얇지만 켜켜이 쌓여 나라는 존재가 '어렵다'는 벽이 생긴 것은 아닌지 추정할 뿐이다. 말하자면 나는 어떤 점이 어렵다고 느끼세요?라는 질문조차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나는 다가가기 어려운 팀원인 채로 퇴사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어려운 존재라는 말이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해결되지 않는 과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새 학년 새 학기가 되어 아는 얼굴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교실에서도 파장이 맞는 친구를 용케 찾아내서 절친이 되곤 했는데 사회에서만큼은 안테나의 노화인지 번번이 비껴가곤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로 인해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때, 20년도 더 지났지만 팀장 언니의 말이 생각나곤 한다. ‘어려운 사람’이라는 내 등뒤에 붙은 라벨을 가능한 상대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조심히 주파수를 맞추며 대화를 이어간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안테나 성능이 떨어지지는 것이 문제지만. 그건 또 그런대로 우리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 좋은 신호라고 쳐두고.


가능한 정밀하게 튜닝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항상 안테나 성능이 좋은 것은 아니다. 혹시나 어색한 미소만 띤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고 해도 오해는 말아주시길. 낯설게 시작한 우리 사이도 수없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끝날지도 모르니까. 그날을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튜닝을 하고 있다. 당신과 나의 주파수가 맞길 바라며. 내 등 뒤에 달려있는 라벨이 떨어지는 날까지.






서울, 그 쓸쓸함에 대하여.

by 진달래


요즘은 40대에 하는 결혼이 흔하다. 30대 중반은 되어야 결혼적령기라고 생각하면서 20대에 결혼을 하면 적잖이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좀 웃기지만 그러고 보면 난 40대 결혼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겠다. 벌써 15년도 전에 내 나이 마흔을 꽉꽉 채운 12월의 어느 날 결혼식을 올렸으니 말이다.


40년을 부산에서 살았다. 부산에서 살면서 초중고와 대학을 다녔고, 직장도 거기서 다니고 있었으니, 부산을 떠날 일은 아마도 내 생애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흘러가기도 한다는 것을 결혼을 하고 부산을 떠나서 서울로 이주를 하며 알게 되었다.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곤 남편과 백일이 채 안된 말 못 하는 갓난아기 하나가 있었다. 그 외는 아무도 없었다. 딸은 젖만 주면 꿈나라로 가는 순하디 순한 순둥이였다. 하루 종일 내가 하는 일이라곤 자는 아이를 쳐다보다가 깨면 젖을 먹이고, 또 잠들면 그 아이 옆에서 같이 잠들거나 책을 읽는 게 전부였다.


학교 가기 전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최대의 한가함이자 최고의 심심함이고 적막함이었다. 바쁘게 살았던 과거를 생각하면 나는 이 시간을 기뻐서 팔짝 뛰게 좋아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퇴근하는 남편만을, 내게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남편이 한 번씩 회식이나 약속이 있어서 늦는다고 하면 심하게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 시절 남편도 많이 답답했으리라. 하지만 나 만큼이야 했을라고...


신혼집은 한 층에 여섯 가구가 사는 복도식 아파트였다. 서울에 올라온 지 한 두어 달쯤 지났을까. 나는 드디어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 얼레베이터 앞이었다. 나는 1405호. 그녀는 1401호였다.


“저기 아기가 얼마나 되었어요? 우리 딸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1401호 사는데 몇 호에요?”


다정하게 내게 말을 걸어주는 그녀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아 드디어 이 낯선 서울 땅에서 아는 사람이 생겼다. 나는 바로 답했다. 아이는 백일이 갓 지났고, 1405호에 살고 있다고, 그리고 나는 지금 무지하게 심심하며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녀는 이런 내 눈빛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자기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하였고, 우리는 서로 호감 가득한 인사를 나누고는 방향을 틀어서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드디어 그녀가 나를 초대했다. 인터폰으로 전화를 해서 별일 없으면 아기랑 같이 놀러 오라는 거였다. 자기도 심심하다며. 1405호와 1401호는 문 열고 크게 열 걸음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나는 바로 아기를 둘러업고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성큼성큼 걸어서 가서는 1405호의 현관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러곤 우리 집 현관문을 열어젖힐 때와는 사뭇 다르게 현관문을 조심스레 똑똑 두드렸다. 이웃집 아기는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같은 아파트 같은 층이었으므로 구조는 똑같았지만 그 집에는 많은 짐들이 있었다. 그녀의 딸은 70일 정도 되었는데, 셋째였다. 이미 위로 그 많은 장난감과 책들의 주인공인 오빠가 둘이나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가 나와 오래 계속 놀아줄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했다. 나는 차를 한잔 마시고는 약간은 실망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집으로 돌아와 아기를 앉고 서있는 내 모습과 텅 비어 쓸쓸해 보이던 1405호 우리 집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난 그때 내게 주어진 그 한가한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왜 그리 막막해했을까.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잠만 자는 아기를 쳐다보고만 있어도 행복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다시 내게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할 일이 참으로 많을 것 같은데, 막상 또 어느 낯선 곳에 나 혼자 뚝 떨어진다면 또 그때와 똑같이 되어버릴까?


다행히 1401호의 그녀는 부업으로 OO네트워크 사업을 하고 있어서, 나의 예상과는 달리 나를 자주 불러주었고, 또 우리 집을 찾아주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네트워크 사업 설명을 아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영양제며, 세제며, 정수기 등 집안은 하나씩 그 회사 제품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의 첫 서울 벗이 되어주었기에 나는 그 고마움을 그렇게 갚아나간 것 같다.


시간은 흘러서 나는 회사에 복직을 하고, 아이는 자라서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고, 그렇게 다시 예전처럼 바빠졌다. 서울 온 지 올해로 14년째이다. 내가 초창기 계속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 남편은 10년만 지나면 아마도 마음이 바뀔 거라고 했다. 자신도 그랬노라며.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콧방귀를 뀌어댔는데, 지금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두 번의 이사 끝에 지금 살고 있는 강북구 삼각산 자락의 재미난 마을을 만났다.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한 이웃들이 나의 다정한 벗이 되어주었다. 나의 텅 빈 마음을 꽉 채워주었다. 그래서 이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이상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다.


오늘은 나의 첫 서울 친구가 되어준 1401호의 그녀에게서 사업 설명을 열심히 듣고 물품도 구매했던 것처럼, 나는 이 마을에 어떻게 고마움을 전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본다.






쪼코파이.

by 쪼코


“나는 은경아라고 해.”


중학교 2학년 첫날입니다. 새로운 교실,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아이들. 새 학기마다 늘 그렇듯 머리도, 입도 긴장으로 멈춰 있었습니다. 큰 소리로 다가오는 인사에 사고도, 눈도, 손도, 목소리도 삐걱거리기만 했습니다. 끝내 경아의 인사를 받지 못했습니다.


‘나한테 왜 그래.’


나는 새로운 공간과 사람을 대할 때 긴장도와 경계가 높은 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말하자면, 확실한 대문자 ‘I’이지요. 하지만 반전!한 학기 동안 탐색을 마치고, 2학기가 되면 꼭 반장을 맡곤 했습니다. 낯선 순간에는 움츠러들었지만, 익숙해지면 또 다른 자아를 꺼낸 듯 살았습니다. 완벽한 E로요. 돌아 생각하니 가히 지킬 앤 하이드 수준.


성장하며 E의 성향이 강화된 건 ‘쪼코’라는 별명이 생긴 후입니다. 대학에 입학하며 얻은 이름인데, 원래는 ‘쪼코파이’였다가 줄여서 ‘쪼코’가 되었지요. 까맣고, 동그랗고, 작고, 귀여운 이미지를 담겠다며 선배들이 붙여 준 별명입니다. 이후에는 쪼코누나, 쪼코 언니, 쪼코 선생님으로 확장되며 저를 부르는 친근한 호칭이 되었습니다.


쪼코 이전에도 사람들은 나에게 별명을 붙이고 싶어 했습니다. 깜둥이, 깜치, 시커먼스 등. 그래요. 나는 동양인치고 까맣습니다. 이 별명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생득적 조건에 비하와 조롱을 담은 겁니다.


참 시커멓네! 한국인이 맞니? 탄 게 아니라 본래 그렇다는 거지? 속 살도 시커멓니? 손바닥은 하얗구나! 어마나, 경계가 이리 선명하다니!


불쾌합니다. 어렸을 땐 그 불쾌함을 설명하고 대응할 방법을 몰라 울었어요. 대충 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울었습니다. 해석하자면 I인 내가 가진 최선의 표현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어른들은 머쓱해했고, 아이들은 사과했습니다.


어디에나 피부색에 대해 ‘기어이’ 한마디 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쪼코’는 의도 없는 악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까지만. 당신이 내 피부색을 언어화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쪼코’라는 별칭은 상대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아무리 의도가 없더라도 무례가 될 수도 있었던 말을 달콤하게 전환해 주는 장치, 어색할 수 있었던 순간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장치가 되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처음’이라는 낯섦이 덜 무겁게 느껴지고, 오히려 경쾌하게 시작될 때가 많았습니다. ‘쪼코’라는 별칭은 종종 상처를 주는 말 대신 건네줄 수 있는, 관계를 지켜내는 완충제 역할을 합니다.


난 여전히 새로운 공간, 관계에 놓이면 마음도, 몸도 굳습니다. 하지만 ‘쪼코’라는 완충제를 손에 쥐고 긴장을 헤쳐 나가던 경험 덕분에 새로운 공간과 관계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설렘과 낯섦을 여유롭게 즐길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고, 되어 가고 있다고 자평합니다. I에서 E로 변신할 시간이 여전히 필요하긴 하지만, 내 안의 I와 E를 적절히 운영할 줄 알게 되었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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