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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고 싶은 하루와 그 하루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1부: 아싸, 재미난마을 이야기

by B급 사피엔스

돌아보고 싶은 하루.

by 늘보


아이가 5살 때니까, 딱 10년 전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에 입학한 해니까 정확히 기억한다. 봄기운이 살랑이는 5월 즈음의 오후였다. 놀이터에서 아이랑 시소도 타고 그네를 밀어주며 놀고 있었다. 올해 입학한 체능단은 재밌게 다니는지 궁금했다.


"유치원은 어때? 친구도 많은데, 어린이집 보다 재밌어?"

이런 식의 질문을 했었다. 아이는 그네를 흔들흔들 타며 흥얼대듯이 말했다.

"놀 시간이 없어요."


의외의 대답. ‘놀 시간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지? 놀 시간이 없으면 아쉽게 말할 법도 한데, 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 아리송했다.


"놀 시간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풀이해 보면 대략 이랬다. 어린이집에서는 노는 시간도 많고, 밥 먹고 낮잠도 자고, 만들기 하는 시간도 많았는데, 유치원은 수업들이 꽉 차 있어 쉬는 시간이 부족하고, 그래서 노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살짝 아쉬운 듯 씩씩하게 또 강조하며 말했다.


"밥 먹고 노는데 시간이 없어요"


아이들의 단축 화법은 참 신비롭다. 이 말은 점심시간이 그나마 길게 쉴 수 있는 시간이고, 그때 블록들로 이것저것들을 만들고 노는데, 그 시간마저도 어린집이 보다 짧기 때문에 노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아이는 블록으로 비행기나 소방차, 덤프트럭을 만들고 입으로


"쓩~" "부웅~~"


소리를 내며, 노는 걸 참 좋아했다. 말하는 것도 여물지 않은 5살 꼬맹이가 놀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났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들었던 것 같다.


'벌써 너도 바쁨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구나'


아이 입장에서 유치원은 바쁜 곳이었다. 왠지 아이가 벌써부터 사회생활의 첫발을 뗀 느낌과 약간 아쉽기도 짠하기도 했다. 앞으로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지금보다 더 바빠질 텐데. 시간은 점점 줄어들 텐데. 노는 시간이 없어 보여도,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 가장 많을 텐데…


10년이 지났어도 이날의 모습은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처럼 뚜렷이 기억난다. 이날을 생각하면 그 시절 잔상들이 함께 떠오른다. 아이랑 같이 목욕탕을 가고, 목욕이 끝난 후 바나나맛 우유를 한 개씩 손에 쥐고 빨대로 쪽쪽~ 빨아먹었던 기억.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한 손은 아빠 손을 꼬옥 쥐고, 한 손은 주먹을 쥔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스스로 뿌듯하게 웃던 모습. 이 모습을 본 동네 상인들이 귀여워하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던 기억.


그땐 아이가 정말 어렸었는데, 정작 그때는 그렇게 어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항상 오늘 보는 아이가 어제보다 더 커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른이 된 내가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의 나인 것처럼.


이날이 이따금씩 떠오른다.

따뜻했던 봄,

주말의 어느 날,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서 보냈던 평범하고 한가로웠던 오후.


바쁘다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이미 바쁜 일상을 맞이해 버린 5살 꼬맹이의 모습이.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by 동그리


매주 복권을 산다.

집 근처 복권 가게에서 이천 원짜리 복권 다섯 장을 샀다

일등도 나오고, 이등도 여럿 나왔단다. 왠지 당첨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상상을 해본다. 주택담보대출금을 중도상환하고, 차도 바꾸고, 백화점에서 봐 둔 목걸이와 반지 세트도 사고, 제주도에서 두 달 살기도 해야지.’


매주 하는 상상이지만, 매번 기분이 좋아진다.

집으로 돌아와 동전에 기운을 담아, 신중하게 하나씩 긁는다.

번호 여섯 개를 후다닥 긁고, 마지막 당첨 번호는 괜스레 한쪽 눈을 감고 천천히 긁는다. 네 장 연속 꽝이다. 에잇, 글렀다. 마지막 복권은 대충 긁는다.


어? 만 원. 이제껏 당첨된 금액 중 가장 큰 금액이다. 기쁨도 잠시,

‘이왕이면 0이 몇 개 더 붙었으면 좋았잖아.’ 만 원이라도 돼서 다행이라는 마음은 사라지고, 아쉬운 마음에 투덜댄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둘째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집까지 거리가 멀어, 이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학교 근처, 평소 눈여겨보던 집이 전세로 나와 남편과 함께 보고 온 후, 우리 집을 전세로 내놓았다.

언제 사람들이 보러 올지 몰라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생전 손대지 않던 베란다까지 정리하며 후회가 밀려온다. 진작 치우고 살걸.

필요도 없는 물건은 왜 이렇게 많은지,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지만, 현실은 맥시멈 라이프.


집은 리모델링한 터라 사람들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쉽게 계약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우리가 찜해둔 집이 계약되면 이사 계획을 접기로 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며칠 전 집을 보고 간 젊은 부부가 다시 보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왔다.

느낌이 좋다. 그 부부가 오기 전, 다른 부부가 먼저 와서 별다른 질문도 없이 쓰윽 훑어보고 갔다.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젊은 부부는 꼼꼼히 집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돌아갔다. 두 번이나 봤으니 좋은 소식을 기대했다.


전화가 왔다. 계약을 하고 싶단다. 가계약금을 보내겠다며 계좌번호를 물었다.

계약이 되었다. 그런데 계약을 한 부부는 무심히 쓰윽 훑어보고 갔던 그 부부였다.


이삿날도 정해졌다. 하필이면 ‘손 없는 날’이다. 비용이 만만치 않다.

누구는 그날만 골라 이사한다지만, 우리는 날짜를 굳이 따지지 않기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이삿날을 바꾸긴 어려우니 긍정 회로를 최대치로 가동한다.

‘손 없는 날’을 검색해 보며 가족 모두에게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암시를 건다.


집이 정리될수록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원했던 색으로 채워진 정든 공간.

아이들을 키우며 쌓인 자잘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의 풍경들과 사람들이 눈에 더 담긴다.

이사 후 복권을 사러 가야겠다. 손 없는 좋은 날이니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그 순간, 아이의 시간을 따라 걷다.

by 백호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자기 등보다 큰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아이.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스마트폰으로 찰칵, 그때의 시간을 꺼내 본다.


은율이가 2학년이 된 따뜻한 봄날의 어느 아침.


은율이는 1학년 등교 첫날부터 재미난학교 교사인 나와 함께 등교했다. 그래서 늘 다른 아이들보다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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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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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와 함께 출근 겸 등교를 하던 길, 우리 학교는 학사가 두 곳인데, 나는 4각산에서, 은율이는 2각산에서 생활한다.


마침 나도 4-5학년 통합반 나들이가 있는 날이라, 모임 장소로 가는 길에 은율이를 2각산에 데려다주려고 했다. 그런데 은율이가 불쑥 물었다.


"아빠, 2각산까지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가 봐도 돼?"


아직 한 번도 혼자 간 적이 없기도 하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어서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래? 길 알아? 혼자 갈 수 있겠어? 그럼, 혼자 가 봐. 아자^^ 이은율!"이라며 꼭 안아주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율이는 골목길을 빠르게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순간적으로 여러 감정이 들고 났다.


'따라갈까. 도착할 때까지의 초조함',

'나로부터 큰 걸음으로 성큼 멀어지는 느낌까지.'


급하게 은율이 생활 교사 키키, 교장 선생님 호랑이한테 연락해 무사히 도착하면 알려 달라고 말하며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은율이가 2각산에 도착하기까지의 5분 남짓의 시간은 마치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며 빛이 보이는 출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길고 답답했다. 키키의 '은율이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서야 내 마음은 평안해졌고 이 짧은 시간 동안 들고 났던 감정을 되돌아봤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스스로 서 가는 시간’을 동행하지만 조금씩 멀어져 가는 모습이 왜 이리 가슴을 찡하게 하는지. 부모로서 이런 순간을 경험하며 '어느새..'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참 고마웠다.


학교 끝나고 은율이 수영하러 갈 때 인터뷰 형식으로 손 마이크를 쥐어주며

“아침에 왜 혼자 가고 싶었나요? 그때 기분은 어땠나요?, 왜 그리 빨리 걸어갔나요?" 물었다.


"내가 길을 외워서 혼자 가 보고 싶었어. 근데 혹시 무서운 사람을 만날까 봐 빨리 걸어갔어. 2각산 도착하니깐 괜찮았어. 다음에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래. 아빠는 너무나 기쁘면서 가슴 한구석의 뭉클함이 크게 움직이고, 그 뭉클함이 머리로 전해지며 눈물이 잔잔하게 차오르는 순간이었어.'


많이 컸다. 이은율.

고마워.


너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가며

너의 시간을 걷고 달리고 있어서.


그리고


너의 시간을 옆에서 볼 수 있어서.

감사해.


+ (초중등대안) 삼각산재미난학교는 학사가 두 곳(2각산, 4각산)으로 나뉘어 있다. 학사 이름은 학교 구성원 공모전에서 정해졌다.






내일이 온다는 내 말에 거짓은 없건만.

by 완자


외할아버지는 당신의 나이가 무색하게 멋쟁이셨다. 할아버지는 그 시절 학교에서 교칙으로 금하던 AQUA NET 헤어스프레이를 항상 머리를 다듬으시며 사용하셨다. 정돈된 머리 위에는 점잖은 체크무늬 베레모를 쓰시고 모노톤의 알로하셔츠를 입고 외출하시곤 했다.


할아버지라는 단어의 뉘앙스에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과 유머로 가득 찬 분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들은 웃긴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그 얘기 참 재미있다며 껄껄 웃어 주셨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 주겠다고 하시며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라며 같은 이야기를 들으시고 또 한바탕 웃어 주셨다. 반면 할머니는 병약하셔서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오래 하셨다. 할머니는 잦은 병치레 후에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전혀 다른 사람처럼 웃음도 혈색도 잃으셨다.


할머니의 장례식 날, 땅속으로 관이 들어가고 흙이 덮이자 할아버지는 힘들게 한마디 내뱉으셨다.

"여보, 잘 가요."


하루는 할아버지 댁에 심부름을 갔다가 저녁인데도 불을 하나도 켜지 않은 채 식탁의자에 멍하니 앉아 계신 할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할머니의 빈자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고 할아버지도 많이 쇠약해지셔서 병원을 드나드셨다. 병원에 있는 할아버지께 전화를 했던 어느 날 "완자야, 네가 와서 나 좀 여기서 꺼내줘라. 사다리 가져오면 금방 나갈 수 있어."라고 하셨다. 그때는 웃고 말았지만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몇 달 후 길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으셨다. 그리고 가까운 병원의 중환자실로 실려 가셨고 가족들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는 면담시간이 정해져 있어 모두 함께 들어가 의식이 없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사춘기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극히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었을까. 친척들이 있는 그곳에서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내가 왔다고 말을 해야 할아버지가 아실 텐데. 어서 일어나서 같이 집에 가자고 말을 해야 할 텐데. 타들어가는 속과는 달리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면담시간은 끝이 났다.


종종 할아버지는 "내가 죽으면 산소는 자주 못 올 거야. 친가 산소는 자주 가도 다들 외가 산소는 잘 오지 못하거든." 그런 말을 하는 할아버지에게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걱정 마세요. 내가 자주 갈 테니까."라고 큰소리를 쳤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 큰소리쳤던 나의 대답이 공허할 만큼 할아버지의 말이 현실이 됨에 쓸쓸함과 죄송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었지만 나는 아직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이 생각난다. 그래서였을까. 할아버지는 잘 기억하라고 내 생일날에 돌아가셨다. 심지어 산소 가는 걸 너무 좋아하는 아들도 덤으로 주셨다. 아이는 산소만 간다고 하면 호미를 챙겨 들고 산소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날의 중환자실로 다시 갈 수만 있다면 할아버지 손을 잡고 큰소리로 말하고 싶다.

"할아버지, 여기 1층이라서 사다리도 필요 없어요. 얼른 일어나서 나랑 같이 집에 가요."라고.






어느 봄날.

by 진달래


딸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해서 제법 걸어 다닐 즈음, 그러니까 세 돌이 채 안되었지만 해가 바뀌어 네 살이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다. 나는 3년 남짓했던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을 앞두고 있었다. 지금 돌아 생각해 보니 그때 나는 몇 달 후면 아이를 두고 직장으로 출근하는 생활이 시작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없는 시간에도 아이가 잘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두 돌 조금 지난 아이를, 이제 ‘네 살이나 되었는데’를 속으로 되뇌며 하나씩 스스로 하기를 연습시키려 했다.


그 첫 번째가 혼자서도 잘 걷기였다. 그 시절 아이는 조금 걷다가도 다리가 아프다면서 안아달라 업어달라 떼를 쓰기가 일쑤였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봄날이었다.


돌 지나면서부터 아이는 엄지손가락을 유난히도 빨아댔는데, 엄지손가락이 허는 것은 물론, 앞니까지 시커멓게 변하는 것이었다. 동네 치과엘 갔더니 이의 뿌리가 상한 것 같은데, 아이가 어리니 수면치료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지인에게 믿을만한 치과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소개해 준 치과는 청담동에 있는 어린이전문치과였다. 내가 사는 노원에서 가자면 많이 먼 곳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시간이 아주 많았으므로 나들이 삼아 가보기로 했다. 지하철 7호선을 타고 한 시간 넘게 걸려 청담동 치과에 도착하였다. 어린이치과답게 어린이집에 온 듯 알록달록 잘 꾸며져 있었고, 간호사도 의사도 모두 친절했다. 진료를 받을 때도 아이가 진료를 받는 건지 노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재밌게 해 주었다. 선물로 반지며 풍선 같은 것도 주었다.


그리고 더더욱 좋았던 것은 승원이의 앞니가 시커멓게 변한 것은 손가락을 빨아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된 것일 수 있으므로 손가락을 못 빨게 하면서 좀 지켜보면 나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치료가 아니라 좀 더 지켜보자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모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나의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는 그 사건은 지하철을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는 사이에 벌어졌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서자 아이가 다리가 아프다며 업어달라고 했다. 나는 안된다며, 같이 손잡고 가자고 했다.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한번 안된다고 한 걸 운다고 들어주면 더 안된다고 한, 어느 육아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대로 울렸다. 좀 있으니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아- 주저앉는다고 지면 안되지. 단호해져야 해’라고 다짐을 하며,


“승원아, 너 안 가면 엄마 먼저 간다~”


이 말을 남기고 나는 한 발자국씩 내딛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커져갔다. 그래도 나는 굿굿하게 한 걸음씩 내디뎌 10미터 이상 아이와 떨어졌다. 다행히 봄볕이 따스한 한낮이었고, 아파트 단지 내에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꽤 떨어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상당한 시간 대치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계속 울면서 보도블록에 주저앉아 있고, 나는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며 답답한 표정으로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달려오면 안아주련만..... 왜 이리 고집 세게 앉아있을까. 네 살이면 혼자서도 잘 걸어야 한다고. 이제 몇 달 후면 넌 하루 종일 엄마 없이 지내야 해.’ 이런 말들을 속으로 삼켰던 것 같다. 그 대치 상황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10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울고 있는 아이와 심각한 표정의 내가 하염없이 대치하고 있던 모습만이 남아있다.


치과를 가는 거였지만 나름 강남 나들이라 최대한 예쁘게 단장을 했었다.

외숙모가 선물한 분홍색 트렌치코트와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었던 승원이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던 그날을, 마흔이 훌쩍 넘은 늦깎이 초보 엄마가 어이없게도 네 살 아이 독립프로젝트를 무식하게 들이대던 그날을,

이제 열네 살이 된 승원이는 기억할까.

감히 물어보지 못하겠다.


지금의 나라면 “엄마 안아줘” 하면 그 가벼운 아이를 하늘 높이 번쩍 들어서 안아주었을 텐데.

업어달라고 하면 바로 뒤돌아 앉으며 “어부바” 했을 텐데.


아이에게 쓸데없이 엄격해지려 할 때, 아쉬움과 그리움 가득한 그날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올라 실소를 지을 때가 있다.






걱정말아요. 그대.

by 쪼코


큰 솥 내.


한 박도 쉬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와 주방 쪽으로 향합니다.


아셨구나.


쭈빗거리다 솥을 꺼냈어요. 소고기 한 덩어리를 솥에 넣습니다. 타다다닥. 가스렌지에 불이 붙고. 이번엔 미역. 쏴아아. 볼에 물이 담기고, 미역을 불립니다. 평소보다 행동 마디마디가 끊어지고. 몸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가서 누워.


낮잠 자는 작은 아이 옆에 누웠습니다. 눈을 감습니다. 한 달 내내 내가 했던 일을 엄마가 내 주방에서 하고 있습니다. 기도로 밥을 짓는 것. 마음도 같겠지요. 기도와 밥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밥 먹어.


한 시간 조금 넘었나. 미역국 한 그릇에 흰 밥. 그리고 김치. 국물을 한 수저 떠서 넘겼습니다. 식도로 넘어가는 뜨거운 국물. 맛이 느껴집니다. 한 달 동안 뭘 먹었었나. 기억에 없어요. 물을 먹고, 김치를 조금 먹고, 밥을 한 수저 먹고. 그런데 이 미역국. 맛이 느껴질 뿐 아니라, 맛있습니다.


너, 엄마야. 정신 차려.


보통 때 같으면 말에 물기가 있을 텐데 단정하게 건조합니다. 엄마 눈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응.


미역국 한 대접, 밥 한 그릇을 다 먹었어요.


간다.


2015년. 큰아이 5살. 작은 아이가 8개월 때였습니다. 낮잠에서 깬 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젖을 먹였어요. 엄마가 울면서 나오는 젖은 쓰다는데. 아이는 꿀떡꿀떡 잘도 먹습니다.


그해 봄에 큰아이는 유치원에서 시력검사를 했어요. 장난을 많이 쳐서 제대로 검사가 되지 않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과에 가보라고. 안과를 예약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습관처럼 최악과 최선을 상상해 봅니다. 시력 교정용 안경을 쓸 수 있겠구나. 안경을 쓰게 되면 관리를 어떻게 하나-가 상상해 본 최악이었습니다. 시력 교정엔 타이밍이 있으니 서둘렀어요. 아이는 유난히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못합니다. 장난기가 많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을 순차적으로 쪼개 설명하면 곧잘 해내는 아이인데요. 이상합니다. 기본 검사를 간신히 끝내고, 의사와 면담을 했습니다. 다른 검사를 더 해 보기 해야 하지만 ‘황반변성’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망막에 이상이 있고, 시력 발달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자기네는 정밀 검사 기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라고요.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병원으로 갔습니다. 안저 검사를 하는데 또 한참 걸렸습니다. 두 번째 의사와의 면담. 젊었어요. 손을 벌벌 떨며. 네 손을 떨더라고요.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꺼냅니다. 1000만 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나는 희귀병이랍니다. 본인은 수업 시간에 배운 적은 있으나, 직접 환자를 만난 적은 없다고. 소견서를 써줄 테니 경험이 많은 자기 은사님에게 가보라고 했습니다.


망막층간분리. 안구과 관련된 질병으로, 바깥쪽 그물모양의 층(outer plexiform later)의 망막에 존재하는 감각신경 층이 비정상적으로 분리되는 특징을 가진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X-성 염색체 연관 열성유전이며 RS1이라고 불리는 retinoschisin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한다.


유명한 안과와 대학병원 몇 군데를 예약해 놓고 속이 타 공개된 국내외 논문자료를 뒤졌습니다. 외국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임상 몇 개가 있을 뿐입니다. 그사이 예약한 병원을 차례로 가보았지만 내가 찾아낸 논문자료 이상의 이야기를 해주는 의사는 없었어요. 진행 중인 임상을 물었으나,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고요.


이제 고작 5살인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건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 엄마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낌새를 차리고 동생들을 다그쳐 알아내신 모양입니다.


10년. 아이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보다 시력이 나쁘지만,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은 별로 없어요. 잘 안 보이면 가까이 가서 보면 됩니다. 옆 사람에게 물으면 되고요. 핸드폰으로 찍어 확대하면 됩니다. 자라는 동안 익힌 태도에요. 이 태도를 부드럽게, 안전하게 배우고 싶었습니다. 이 태도를 익히는 동안 아이를 보며 나도 안절부절하고 싶지 않았고요. 그래서 우리 가정은 <재미난>으로 이주했지요. 처음엔 가장 큰 이유였고, 지금은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면 흐릿해진 이유.


얼마 전엔 아이 눈에 다래끼가 났습니다. 많이 부어 시야를 가릴 정도여서 수술을 하니 마니 나는 심각한데,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그래도 다행이야. 생활에 거의 타격이 없어. 어차피 안 보이는 쪽 눈이라.


미역국을 두고 마주 앉았던 엄마와 내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그날 미역국이 준 슈퍼 울트라 에너지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고요. 잘 해내고 있다고요.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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