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아싸, 재미난마을 이야기
by 늘보
돌아오는 버스 안은 고요했다. 1박 2일의 피로감에 모두 곯아떨어졌다. 말똥말똥 깨어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콩닥콩닥 가슴이 뛰어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옆에 그녀가 있다. 어깨를 마주 대고 있다. 고개를 창가로 기댄 채 잠이 들어있다. ‘내 쪽 어깨에 기대도 될 텐데, 왜 창가에만 고개를 기댄담.’ 버스 가장 뒷자리 5열 중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 그리고 그 옆에 앉자 졸고 있는 그녀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몰래 뽀뽀를 한번 해볼까?’ 할까 말까를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이백 번도 넘게 했던 것 같다.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전부 내릴 때까지 딴청을 부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녀 곁에서 가깝게 있고 싶었다. 왜 안 내리냐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읽고, 꾸물거리며 마지못해 일어났다. 어떤 책에 이런 말이 있다. ‘영국 끝자락에서 런던에 이르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 그 방법을 몸소 체험하며 이동한 순간이었다.
단둘이 첫 데이트. 강변 테크노타워에서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극장에서 만난 그녀는 도시락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귀여웠다. 도시락 가방을 꼬옥 쥐고 있다니. 도시락 가방을 들어준다며 한사코 빼앗듯이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손에서 땀이 났다. 저녁을 먹고 이동할 때도, 극장으로 향할 때도 계속해서 잡은 손을 놓지 않자, 그녀는 손에 땀이 너무 나서 잠시 말리고 다시 잡는 게 어떻겠냐고 웃으며 말했다. 손바닥이 빨리 건조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손바닥을 입으로 호호 불고, 동시에 손목을 흔들어대며, 손바닥이 마르자마자 냉큼 손을 다시 잡았다. 그날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손바닥에서 그녀가 바르는 로션의 향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 향기가 사라질까 봐 샤워할 때도 그 손은 씻지 않고, 잠자리에서도 가슴 위에 반듯이 올려놓고 잠을 청했다.
중간고사 시험을 앞두고 학교 도서관에서 만났다. 자리를 잡고, 미리 준비한 기출문제를 프린트도 했으나 공부가 잘될 리가 없었다. 책을 보는 것인지, 공부하는 그녀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는 것인지, 무엇이 주된 행위인지 분간이 안 됐다. 점심 후 나른한 오후, 따뜻한 봄기운에 졸음이 엄습했다. 그녀는 졸리다며 살짝 엎드려 잠을 청했다. 이때다 싶어 냉큼, 피곤하면 우리 집에 가서 좀 자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검은 속내가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었을까? 봄 날씨가 아주 화창했다. 날이 너무 좋아 잠도 깰 겸 뚝섬역 주변을 한가롭게 산책했다. 항상 움직일 때는 손을 꼬옥 붙잡았다. 놓으면 잃어버릴 것처럼. 그녀의 미니어처 분신이 있다면, 가방에 호주머니에 어디든 쏘옥 넣고 함께 데리고 다니고 싶다고 했었다.
벌써 20년이 넘게 지났다. 그녀를 만났던 첫해. 우리가 만나고 함께 만들었던, 아름답고 행복했던 그 순간들로 오붓하게 손잡고, 시간 여행 다녀오고 싶다.
by 동그리
그를 처음 만난 건 2019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지만, 그날 우리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작고 경쾌한 몸짓,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발,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가벼우면서도 따뜻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던 그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얼마나 크게 바꿔놓을지.
그를 보고 돌아서 나온 후에도,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계속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건물 주위를 몇 바퀴나 맴돌며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그래, 결심했어! 그와 같이 가는 거야!’
그의 이름은 ‘동동이’다. 여러 가지 이름 후보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름이 가장 잘 어울렸다.
동동이는 이름처럼 매일 동동동거리며 나를 쫓아다녔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작은 그림자가 생겼다.
동동이를 데려올 때, 아이들은 산책을 꼭 자기들이 시키겠노라고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약속은 늘 그렇듯 지켜지지 않는 법. 처음 며칠은 신나서 돌아가며 산책을 나갔지만, 결국 동동이의 산책은 나의 몫이 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나가다 보니 동동이는 실외배변을 하는 강아지가 되어버렸다.
태풍이 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장맛비가 쏟아져도 우리는 무조건 나가게 되었다.
덕분에 매일 바람을 맞고, 햇볕을 쬐고,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요즘처럼 따뜻한 봄바람이 불면, 동동이의 촉촉한 코는 쉴 틈 없이 바빠진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고, 냄새를 맡는다. 마치 봄을 들이마시려는 듯이.
동동이는 스피츠과라 털이 길고, 이중모인데다, 모량도 많아서, 털이 많이 빠진다.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동동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다고 해도, 동동이 털은 평생 우리 곁에 남아 있겠지?”그 말에 둘 다 피식 웃었지만, 그런 날이 올까 봐 슬퍼진다.
아이들과 나만 강릉여행을 갔을 때, 동동이를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남편한테 맡기고 갔었다.
동동이는 그날 저녁, 거실에서 현관을 바라보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한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에서 동동이가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처음에는 파도 소리에 움찔할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어오면, 동동이의 부드러운 털 사이로 바닷바람이 스며든다.
파도 소리, 모래 냄새, 짭조름한 바람, 그리고 내 곁을 맴도는 작은 그림자.
그렇게 동동이와 함께 바닷가를 나란히 걷고 싶다.
by 백호
눈을 감고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머릿속 기억의 영사기를 천천히 돌려본다.
현재에서 과거로, 순간에서 장면으로 넘어가며.
가고 싶은 곳? 누구와? ‘나의 최애’라면 한 사람이어야 할까? 꼭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전거도 될 테고, 튼튼한 나의 두 다리를 소유한 나 자신도 될 수 있겠네.
물음에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가고 싶은 곳은 참 많다.
그중에서도 나는 문득 강원도 하늘 내린 인제의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을 떠올린다.
자작나무숲은 탐방로 입구에서부터 약 3km의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겨울이라 통제된 코스가 많았지만,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오롯이 내리막이라 무릎이 아팠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날은 아기백호와 꽃송이와 함께였다. 오며 가며 아기백호보다 어린아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아기백호를 데리고 굳이 이런 곳까지 온 내가 조금 무모하게 느껴졌지만, 아기백호는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스스로 걸으며, 눈 덮인 자작나무숲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담아갔다.
숲에 들어서기 전,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들을 보며 아기백호가 말했다.
“오~ 멋진데.”
그 말 한마디에, 내가 아기백호와 이곳에 온 이유가 모두 담겨 있었다.
아기백호는 눈을 만지고, 던지고, 미끄러지며 마음껏 놀았다. 꽃송이와 나는 혹여 미끄러져 다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아기백호는 함께 있는 백호와 꽃송이가 있어 별걱정 없이 놀지 않았나 싶다.
날씨가 춥지도 않고, 하늘도 맑았던 하늘 내린 인제의 자작나무 숲이었다.
밤이 되었다.
강원도 산골 깜깜한 밤에 갑자기 밤하늘이 보고 싶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여는 순간 콧속으로 들어오는 차갑고 시원한 맑은 공기는 도시에서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느껴지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반달 하나가 높이 떠 있었다. 그 주위로 산세와 어우러져 겨울 별들이 한 무리 한 무리를 지어져 있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기백호와 이 겨울 밤하늘을 함께 보고 싶다'였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아기백호에게 말했다. "별 보러 갈까? 하늘에 별이 많아."
아기백호는 망설임 없이 “응. 갈래.”라고 대답했다.
아기백호는 잠잘 준비를 다 해놓은 터라 잠잘 복장, 위에 외투, 모자, 양말을 착용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신발은 신지 마. 아빠가 안고 갈게. 따뜻하게."
아기백호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별 많지? 서울처럼 밝지 않아서 별이 잘 보여. 우와~ 아들하고 둘이 함께 별 보니까 좋다. 아들은 어때?" 아기백호도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좋아."
나는 또 말을 건넸다.
"물소리 들려? 내일 아침에 물 흐르는 것도 보러 가자.", "응."
"아들하고 안고 있으니 안 춥네. 아들은 추워?", "나도 안 추워."
그렇게 둘이 함께 별을 보며 짧은 대화를 나누고, 주변을 잠시 걸은 후 방으로 돌아왔다. 아기백호가 아빠 품에 안겨, 겨울밤 별을 올려다보며 나눈 그 순간이 아기백호의 기억에도 ‘찰칵’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남아주기를 바랐다.
나는 아기백호가 이런 감성과 경험을 하나씩 쌓아가며 ‘따뜻한 사람’이 되어가길 바란다. 그 따뜻함은 누군가가 정의하는 정답 같은 게 아니라, 각자 가슴에 품고 있는 저마다의 체온, 그 36.5℃만큼이면 충분하다.
<체온 36.5℃만큼>
+ 내가 장성한 후에도 아빠는 “큰아들, 작은아들~ 밥 먹었어?” 하고 나와 동생을 불렀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나도 아기백호에게 종종 “아들~”이라고 부른다. 어색하지만, 그 말속에서 나도 내 아버지의 기억을 듣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 나는 대안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다. 우리는 이름 대신 별칭을 사용하는데 나는 백호, 아내는 꽃송이다, 아기백호는 아이의 어릴 적 애칭이다. T.M.I이지만 원래는 아기꽃송이백호였는데 너무 길어서 줄였다는 핑계도 덧붙인다.
by 완자
취업 한 이후 딱 두 번 쉰 적이 있다.
한 번은 결혼 직 후, 머리에서 번개가 치고 다크서클이 윗입술을 지나 아랫입술까지 덮칠 즈음이었다. '불면증'이란 이런 것이다를 스스로 몸을 통해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달까. 밤 10시에 자려고 누워도 12시에 누워도 새벽에 누워도 과정과 결과는 늘 동일했다.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생각이 뒤엉키다 잠깐 잠이 들었다 싶으면 30분 후에 깨고 다시 깨면 또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생각들에 2-3시간 괴로워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출근 시간 1시간 남짓 남아서야 깊은 잠에 들었다.
병원에도 가보고 약도 먹어보고 CT도 찍어봤지만 뚜렷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렇게 현대의학도 고치지 못한 나의 불면증은 퇴사와 함께, 더 정확히 말하면 "퇴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자리로 돌아온 순간 싹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인체의 신비', '인간의 신비', '퇴사의 신비'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끔하게 나았다.
같은 시기 엄마는 허리가 아프셔서 걷는 것도 힘든 상태였다. 걷다가 길에서 주저앉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건강염려증이 있는 나와는 달리 엄마는 좀처럼 병원을 가지 않으신다. 그런 엄마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으셨는지 큰 병원을 찾았고 결국 수술을 결정하셨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때의 내가 백수였다는 점. 엄마 옆에 붙어서 간병을 할 수 있었다.
15년이 지나 두 번째 쉬고 있는 지금. 엄마는 무릎이 고장 났다. 엄마의 무릎이 고장 난 것은 물론 아주 오래 전의 일일 것이다. 병원을 찾을 때까지의 시간은 엄마의 수많은 고민을 담고 있다. 나이가 오십에 가까운 딸에게 차조심해라, 사람조심해라 하며 사소한 걱정을 매일같이 달고 사시지만 정작 당신의 일에는 무심하다.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행여 자식들이 걱정할까 당신의 아픔을 자꾸 축소하며 살아온 것이 못내 서운하다.
엄마와 병원을 오가며 예전과 같이 수다를 늘어놓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엄마의 발걸음에 자꾸 마음이 내려앉는다. 2년 전 이사 왔을 당시만 해도 편도 40분씩 걸리는 이곳에 버스를 갈아타시면서까지 종종 찾아오시곤 했다. 손주 얼굴도 볼 겸, 반찬도 줄 겸, 운동도 할 겸이라며. 하지만 엄마는 우리 집에 오지 않으신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결혼 전에는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다 큰 회사원을 버스정류장까지 차로 태워주시거나 맛있는 가게를 친구분들과 다녀오시면 얼마 후 나를 그 가게로 데리고 가서 맛을 보여주셨다. 어디든 데려다주던 우리 엄마는 이제 사랑해 마지않는 손주 집에 가는 것조차 망설일 만큼 무릎이 고장 나버렸다.
전과는 달리 여러 곳을 많이 다니지 못하고 시간도 좀 더 걸리겠지만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으실 때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야겠다. 맛이 없으면 맛이 없는 대로 재미있는 추억이 돼 줄 테니.
아주 오래전 한발 한발 내딛는 나의 걸음마를 따뜻하게 지켜봤을 그때의 엄마처럼 조금 느려진 엄마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기다리면서.
by 진달래
30년도 더 전 내가 스물두어 살 먹었던 것 같다. 그때 TV에서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유럽의 곳곳을 다니며 여행하는 대학생들을 찍은 다큐 영상물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1980년대까지 막혀있었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90년대의 많은 대학생들이 해외로 나섰던 것이다. 특히 앳된 여대생이 혼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씩씩하게 각 나라의 명소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나도 저렇게 자유롭게, 호기롭게 돌아다니고 싶었다. 도대체 저들은 어떻게 떠날 수 있었던거지? 인터넷도 변변한 여행 서적도 없던 시절이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자신이 없어서 친구 한 명을 꼬셔서 같이 가자고 해보았다. 3박 4일 지리산 종주를 함께했던 그 친구는 흔쾌히 같이 가겠노라 했다.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해외여행 설명회 같은 델 같이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대답만 화끈했고, 우리의 약속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흐지부지되었다.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면서 유럽여행은 그냥 오롯이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3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다.
딸을 낳고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서 쉬던 시절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봤었는데, 그때 읽은 책들 중에 여행책도 있었다. 제목도 작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분식집을 운영하던 엄마와 실직을 한 아들이 어느 날 의기투합해서 1년간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였다. 중국을 시작으로 해서 동남아시아를 여행하고 인도와 중동을 거쳐서 유럽까지 가는 경로였다.
아들은 해외여행의 경험이 있었지만 60대의 엄마는 여행도 처음이었지만, 해외여행 그것도 배낭여행은 온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힘들 법도 한데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가방을 끝까지 메고 다니던 엄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착하고 다정한 아들이 엄마를 위해 함께 가는 것 같았지만 긴 여행의 어느 지점부터인가는 젊은 아들보다 나이 든 엄마가 더 씩씩하게 앞장서서 그 여행을 즐기며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오래전 흐지부지 되었던 유럽 여행 계획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친구가 아닌 내 옆에서 꼬물거리며 자고 있는 딸과 함께 도모하기로 했다. 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계획부터 세우는 것이다. 계획의 시작은 여행 경비를 모으는 것. 나는 그날 이후로 매월 10만 원씩을 유럽 여행을 위해서 모으고 있다.
다음으로 언어. 통역앱이 기능도 좋고 유용하다지만 내 귀와 내 입만 하랴. 집 근처 도서관에서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잉글리시카페‘라는 영어회화 모임에 등록을 해서 학교 졸업 이후 입 밖으로 소리 내보지 않았던 영어말하기에 도전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영어라는 화두를 잡고 있지만 아쉽게도 드라마틱한 성장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그래서 다른 길을 모색했다. 바로 딸을 교육시키는 것. 딸이 초등 2학년이 되었을 때 아이를 앉혀놓고 말했다
“딸아~ 엄마랑 나중에 해외여행 가지 않을래?”
“응~ 좋아”
“그러러면 영어를 잘해야 해. 외국은 영어를 많이 쓰고, 영어를 쓰는 나라가 아니더라도 영어를 할 줄 알면 훨씬 편하게 다닐 수 있어. 엄마랑 영어공부 같이 해보자”
“응~ 알았어”
순진한 딸은 이렇게 영어를 시작했다. 자신 앞에 놓인 험난한 길은 알지 못한 채 엄마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기꺼이 승낙을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여곡절 많았던(실력 없는 엄마는 딸을 많이 혼냈고, 많이 울렸고 또 많은 화를 냈다.) 엄마표 영어는 1년이 채 안되어 마무리되었고, 우리는 진정한 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딸의 영어를, 우리의 유럽여행을 망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우리 마을엔 없는 것 빼곤 다 있었다. 재미난학교 학부모였던 해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딸에게 영어와 함께 공부에 대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는 좋은 멘토가 되어주고 있다.
엄마표의 조기종료로 딸은 이제 제법 영어로 말하기를 한다. 그리고 내가 못 알아들은 영어를 알아듣기도 한다. 이렇게 오륙 년 더 하면 유창하지는 않더라도 여행에서 길잡이 정도는 되어 주겠지.
다음으로는 체력. 나의 저질 체력으로는 국내여행도 장기간 가는 건 어렵다.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많은 곳을 돌아다니려면 체력은 필수이다. 요가에 이어 최근에는 달리기를 추가했다. 매일 아침 출근 전 40분 정도를 달린다. 여력이 된다면 헬스도 추가해 볼 생각이다.
이렇게 준비는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군가는 내일이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유럽을 30년도 전부터 꿈꾸다가 10년도 전부터 또 준비를 해오고 있다. 앞으로 6년이 더 남았다.
못해도 6개월은 딸과 함께 유럽의 곳곳을 여행할 것이다. 튀르키예, 그리스,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포르투갈과 스페인.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유럽엔 나라들도 참 많다. 국경을 걸어서도 넘어갈 수 있다고 하니 휴전선에 막혀 외딴섬 같은 남한 땅에서만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신기로울 뿐이다.
6년 후 그날을 위해 매월 저축을 하고,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고, 앱으로 영어공부를 한다. 딸과 함께 유럽의 거리를 거닐 그날을 위해......
by 쪼코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으면 멀미를 합니다. 멀미를 하는 것 같다가 아니라 진짜 멀미를 해요. 이야기가 자꾸 뒤집히고 앞뒤가 안 맞는데 속도감까지 있어 그런 듯합니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휘리릭 읽곤 해요. 그래서인가요. 궁금합니다. 루이스 캐럴이 세팅한 세계의 구석구석이요. 앨리스가 만난 모두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하지만, 겁이 많고, 생각이 많아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내가 토끼굴로 뛰어들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습니다.
포기하려다 생각합니다. 나의 최애 그녀와 함께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다고요.
호기심 많고 행동력이 넘치는 소녀 족장, 모아나요. 모아나는 고향 모투 누이 섬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모험을 떠납니다. 마우이를 만나야 합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바다 항해는 오래전 멈췄고, 모투 누이 사람들은 섬에서의 정착에 집중해 삶을 꾸려왔거든요. 하지만 모아나는 떠납니다. 두려움과 반대를 호기심과 결단력으로 이겨내죠. 이런 모아나와 함께라면 토끼굴에 뛰어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공작부인과 하트 여왕을 만나야겠습니다. 영화에서 거대한 게, 타마토아를 상대로 씩씩하게 맞섰던 장면처럼, 공작부인에게도 “지금 뭐라고요?” 하며 날카로운 일침을 날릴 겁니다. 크로케 경기는 도구와 룰 모두 바꾸거나 다시는 열리지 못하게 조치를 취할 겁니다. 체셔 고양이도 만나야 합니다. 늘 애매한 대답만 던지는 체셔와 대화한다는 건 사실상 언어 퍼즐 맞추기나 다름없을 겁니다. 혼자라면 주저하다 놓쳤을 퍼즐도 모아나와 함께라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며 끈질기게 물어볼 용기가 생길 것만 같습니다. 혹은 그냥 “됐고요, 방향만 알려주세요”라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요. 몸이 커지고, 작아지는 알약도 먹어볼 겁니다. 세상이 커졌다 작아졌다 할 때, 겁내지 않고 여유롭게 웃으며, 변화를 즐겨보렵니다. 참. 모자 장수의 차 파티에도 꼭 가봐야 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기묘한 차 문화와 모아나의 남태평양 바다 감성이 섞이면 어떤 파티가 될까요?
모아나와 함께라면 이상한 나라의 기묘한 세계도, 멀미 없이 웃으며 탐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모아나가 나의 최애인 이유입니다.
마음속에 작은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온라인 책모임 운영자로 시작해, 언젠가는 책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직접 운영해보고 싶어요. 직장과 병행할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모아나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일단 바다로 나가봐!” 하며 등을 떠밀었겠지요. 모아나와 함께한 이상한 나라 여행으로 내가 이런 용기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상상’합니다.
이런. 또 ‘생각’만 하고 있군요. 현실의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고민만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50대를 앞둔 지금도 이런 상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건, 나의 최애로 모아나를 꼽는다는 건 나에게 보내는 큰 응원이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모아나처럼 망설임 대신 결단을 선택할 날이 오기를, 이상한 나라가 펼쳐질 작은 토끼굴 속으로 뛰어들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