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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고 싶은 존재가 있나요?

1부: 아싸, 재미난마을 이야기

by B급 사피엔스

국민학교, 윤식이.

by 늘보


윤식이는 국민학교 친구라 말하긴 뭐 하고 동창 정도 느낌? 친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 녀석이 가끔 나를 괴롭히는 사이였다.


저학년일 때 거친 편이었던 윤식이는 말 없고 순하던 내가 만만해 보였는지 뒷자리에 앉아 귀찮게 또는 툭툭 치며 괴롭히는 편이었고, 나중에는 우리 집에서도 윤식이라는 이름은 모두 알게 될 정도였다. 우리 집은 시골에서 가게를 했던 터라 우리 부모님과 윤식이 부모님도 안면이 있는 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윤식이 엄마는 여러 차례 주의를 주셨다고 했지만, 학교에서 윤식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윤식이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성실한 편도 아니었다. 운동을 잘해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싸움도 곧 잘했다. 숙제를 항상 해오지 않아서 선생님에게는 약간 요주의 인물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몰라도 학년이 올라 반이 바뀔 때도 자주 같은 반이 되었다. 학년이 바뀌자 윤식이는 결석하는 일이 잦아졌다. 결석을 하는데도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괴롭히는 녀석이 안 보이니 오히려 좋았다.


윤식이가 학교를 나오다 말다를 반복하다 한 달을 넘도록 장기 결석이 길어지자, 담임 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말했다. 윤식이가 큰 병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니, 우리 모두 윤식이를 위해 기도를 해주자는 말이었다. ‘큰 병에 걸린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뛰어다니면서 축구를 하고, 싸우고 또 나를 괴롭힐 수가 있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들면서도 아무튼 학교를 자주 빠지는 이유가 그거였구나 싶었고, 기도는 또 진심으로 했었다. 나를 조금 괴롭히긴 해도 큰 병이라니깐, 많이 아프다니깐.


그 후로도 윤식이는 학교를 간간이 나오면 오랜만에 보는 나를 반갑다는 듯이 여전히 툭툭치고 건드렸다. 속으론 참 배신감도 들었다. ‘내가 진심으로 기도도 해줬는데, 이게 그걸 모르고 이러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또 얼마쯤 지났을까. 윤식이는 꽤 오랫동안 학교에 오질 못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신문을 펼쳐 보이며 읽어주셨다. 다들 한 번씩 읽어보라고 했다.


신문에는 환자복을 입은 윤식이 사진이 있었고, 백혈병에 걸린 불쌍한 윤식이를 도와달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윤식이네는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병원비 감당이 어려웠던 윤식이네 부모님은 신문에 기사를 내 도움의 손길을 바랐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전교생에게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았다.


연민이라는 감정이었을까? 이상하게도 나는 종이상자로 모금함을 만들고, 일요일 동네 시장 입구에서 모금함을 들고 서있었다. 눈에 잘 띄도록 보이스카우트 옷도 입었다. 바짝 긴장되고 부끄러웠지만 시장에 있는 가게들을 한 곳씩 방문해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모금함도 내밀고, 시장을 한 바퀴 돈 후에는 다시 입구로 돌아와 오일장이 끝날 무렵까지 계속 자리를 지켰다. 나를 본 동네 또래들은 내가 왜 윤식이를 위해 모금함을 들고 있는 건지, 윤식이랑 친했던 사이였는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금함은 다음날 학교 선생님께 전달해 드렸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윤식이는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 병약해진 몸은 한눈에 표가 났다. 살은 빠지고 체구는 작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성격만큼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거칠고 또 나를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수군수군 대기 시작했다. 네가 병원에 있을 때 늘보가 모금함도 들고 다니며 도와주려 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투였다. 윤식이는 삐뚤어진 아이처럼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그사이 덩치가 커진 나는 병약해진 윤식이에게 이미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또다시 배신감과 이제는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에 윤식이에게 덤비듯 들이댔고, 더 이상 만만해 보이지 않던 나와 주변 아이들의 수근 거림에 윤식이는 한발 물러났지만, 분을 삭이지 못한 채 계속 씩씩대고 있었다. 이후로 더는 윤식이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해 윤식이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때가 윤식이에게는 마지막 학교생활이 된 것이다.


학교에서 윤식이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몇몇 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선생님도 눈물을 훔치셨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무언가 찔리는 듯한 느낌이 앞섰고, 몹시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생각과 그래도 아픈 윤식이를 생각했다면 그러면 안 됐었다는 생각이 대립했다. 어쩌면 윤식이가 아픈 틈을 타 이참에 콧등을 한번 눌러주겠다는 고약한 심보가 발동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윤식이는 마지막 학교생활이 좋은 기억이었을까?’


아주 잊고 살다 가도 몇 년에 한 번씩 이름이 생각난다. 마지막까지 친해지지 못했던 아이. 너무 어린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난, 나를 조금은 괴롭혔었던 같은 반 아이. 아마 네가 살아있었더라도 지금 나와는 아무 인연도 없겠지. 그래도 몇 년에 한 번은 그냥 네가 떠오른다.






엄마에게 하지 못한 말.

by 동그리


새벽부터 택배가 도착했다.

엄마의 택배다. 파김치, 깍두기, 코다리조림, 깻잎절임과 마늘, 파, 양파, 오징어채까지 한 짐을 보내셨다.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왜 이렇게 많이 보냈냐고, 어떻게 우체국까지 가져갔냐고 타박부터 하고 말았다.


늘 이런 식이다.

만들고 보내느라 힘들었을 텐데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화부터 내고 만다.

참 못났다. 드라마에서 엄마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기만 해도 눈물이 먼저 나는데, 정작 엄마에게는 못난 말만 건넨다. 아이들 때문에 힘들 때도 멀리 있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내 감정을 쏟아냈다.

걱정하실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엄마한테 내 화를 걱정을 실어 보냈다.


나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다.

5년 전, 동생은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저녁 11시쯤이었나.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지 않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느낌이 이상했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니 동생이 이상하다. 샤워하다가 쿵 하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는데, 쓰러져 있다. 구급차가 몇 대나 왔는데도 아가 안 일어난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사이로 엄마가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사이로 동생이 떠나갔다.


대구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은 쉬지 않고 운전했고,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고, 나는 웅크린 채 울고 있었던 것 같다.

동생과 나는 네 살 차이였다.

서로 살갑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어서, 내가 결혼한 후엔 명절 때가 아니면 따로 만나는 일도 드물었다.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 동생, 나, 우리 네 식구가 함께 밥 한 끼 먹는 꿈이라도 꾸었으면 좋겠다,’

그때부터 엄마는 밥을 잘 드시질 않는다.

입맛이 없다고 했다. 맛을 못 느끼겠다고.


엄마 집 근처에는 이모들이 산다.

엄마에게 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내 곁으로 오시라고 했지만, 이모들이 가깝게 있고, 정정하신 외할머니도 계시다며 나중에 오겠다고 하신다. 외할머니는 104세이시다. 외삼촌 댁에 계시는 할머니는 아직도 밭에 나가서 잡초를 뽑으실 정도로 정정하시다.

엄마는 걱정이다. 자기도 외할머니처럼 오래오래 살게 될까 봐.

나를 생각하면 오래오래 살고 싶지만, 너무 오래는 살고 싶지 않다고......


엄마가 보내 준 음식들을 정리하고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입맛이 없어서 간을 잘 맞췄는지 모르겠다는 엄마에게,

“엄마, 간이 딱 맞아. 파김치는 아린 맛이 하나도 없어. 양념에 사과도 갈아 넣었다더니 더 맛있네. 깍두기도 익으면 맛있겠다. 깻잎도 맛있네. 코다리조림도 간을 더 맞출 필요도 없구만. 다 맛있어. 잘 먹을게.”


사랑한다는 말도 덧붙이면 좋으련만, 차마 그 말을 못 붙였다.

“사랑해, 엄마”라고 말하는 순간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그 말을 못 붙였다.






코흘리개 적 친구.

by 백호


코흘리개 시절부터 친구가 있다. 천안에서 살다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며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이상하게도 연락이 끊기지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하고 만나며, 어린 시절 기억부터 현재의 고민까지 나누는 친구이다.


20대 중반, 친구가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결혼하며 캐나다로 이민을 가겠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취업하며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친구는 캐나다로 떠났다.

이민 생활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시민권을 얻고, 지금은 대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 오기 위한 비용과 시간도 만만치 않아 쉽게 오지 못했다. 지금까지 친구는 두 번 정도 한국에 왔다. 그때마다 만난 기억을 남겨본다.


1.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를 만난 날

친구가 캐나다로 떠난 지 5년 정도 된 시점이었다. 그 사이 우리의 상황도 달라졌다. 친구는 캐나다에서 아빠가 되었고, 나도 서울로 이사했고 얼마 전 아빠가 되었다.

바비큐 보쌈을 먹고 싶었지만 감자탕을 먹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삶을 나누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지만, 공감하고 이해가 가는 면이 많았다. 캐나다에서의 삶은 나보다 더 대안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고(故) 백남기 선생님 조문을 함께 가겠냐고 물었다. 친구는 “물론, 가자”고 했다. 함께 조문하고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친구는 평소답지 않게 “아까 너가 얘기할 때 감동이었어”라며 손을 잡고 허튼 웃음을 내보였다.


‘또 언제 만나나.’

만남의 아쉬움을 붙잡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 친구의 말과 삶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닮은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아 마음이 먹먹했다. 땅속 열차 안에서 차오르는 그 마음을 글로 남긴다.


2. 6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

캐나다에 사는 친구가 6년 만에 한국에 왔다. 한창 추웠던 12월 22일, 6년 전 혜화동에서 만났던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나이의 앞자리도 바뀌었다. ^^;

쭈삼볶음을 먹으며 소주와 콜라를 곁들였다. 친구는 캐나다에서의 생활과 경험을 이야기했다. 삶의 여정 속에서 느낀 보이지 않는 인도하심, ‘내 때가 아니라 그분의 때’를 경험하며 찬양의 가사와 성경 말씀의 뜻을 새롭게 깨닫는 이야기였다. 울컥울컥 하는 감정과, 매일 감사의 기도와 고백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고맙다고. 오늘 널 만난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나 또한 살아가며 감사함을 고백하지만, 일상이 되어버린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지하철 개찰구에서도 바로 헤어지지 못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다, 결국 각자의 집 방향으로 흩어졌다.


오늘, 친구가 출국한다. 긴 비행시간 안전히, 시차 적응 잘하고, ‘감사 고백의 삶’을 위해 기도한다.


글을 쓰며 친구와 나눈 시간과 느낌이 되살아난다. 아련하다.

불현듯 친구가 남대문 시장에 갔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국 양말이 싸고 좋다며, 가족들이 한국에 올 때 양말을 뭉텅이로 사 간다고 했다. 남대문 시장에 다녀와 양말 한 뭉텅이를 비행기에 태워, 저 멀리 캐나다 바닷가 도시로 보내야겠다.


+ 빨간 단풍잎 텀블러

친구가 캐나다에서 사다 준 텀블러. 캐나다 국민 커피 브랜드라는데, 나중에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도 팀홀튼으로 들어와 있다.) 아주 잘 사용하고 있다.






어느 별에서 왔니, 내 맘 가지러 왔니.

by 완자


"나만 없어, 고양이!"

실제로 내 주변에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키울 예정인 친구 역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는 가족에게 거는 나의 주술이었으므로.


커오면서 본 주변의 반려동물들은 대부분 장수했고 그렇지만 결국 모두 무지개다리를 건넜으며 그로 인한 가족들의 상실감은 매우 컸다. 나는 불과 2년 전까지 나 스스로 그 세계에 뛰어들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 한 번도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도 키울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이상하리만치 갑자기 그리고 철저하게 고양이를 키우기로 결심했다. 이왕 키울 거면 ‘제대로 귀여운’ 고양이를 키우겠다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먼치킨, 노르웨이의 숲, 랙돌, 엑죠틱숏헤어. 어떻게 골라야 하지?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가 많았다고?


가만, 유기묘들이 많다던데. TV동물농장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고양이 카페에는 입양공고 및 안타까운 사연이 쉼 없이 올라왔다. 그리고 얼마 후 우선 입양신청서라도 봐둘까 싶어 다운로드 버튼을 눌렀다.

아니, 간단히 신청서만 작성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사전 질문이 이렇게 많아?

- 고양이나 개 등 소동물과 함께 산 적이 있습니까

- 함께 산 적이 있다면 지금 고양이나 개는 어디에 있습니까

(현재 함께 살고 있다, 무지개다리 건넜다, 다른 곳으로 보냈다면 사유, 입양 보냈다 등으로 작성, 해당사항 없다면 해당사항 없음, 처음 키워본다 등으로 작성.)

- 지금 입양 대기 중인 고양이를 입양하게 된다면 어떤 삶을 꿈꾸고 있나요

- 캣맘, 캣대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동물학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입양 후 고양이 알레르기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집안 구조를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을 첨부해야 했다.

(방묘문이나, 중문이 있는지 등 집안환경을 점검하기 위해서)


내가 작성한 한 입양신청서는 질문이 무려 21가지였다. 입양을 받아 유기하거나 학대하는 사람이 있다 보니 점점 신청서 질문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21개의 질문에 답을 써 내려가는 동안 입양을 진행해야 하나? 말아? 수없이 내 안의 나와 싸웠다. 이렇게까지 반려동물에 대한 나의 생각과 철학을 피력하고 나서 입양이 거부된다면 더 이상 다른 곳에 입양신청서를 낼 자신이 없었다. 더 나아가 세상을 살아갈 용기도 1/8 정도 뺏길 것만 같았다.

다행히 우려와 달리 나의 첫 입양신청서는 성공적으로 구조자님의 마음에 닿았고 무사히 고양이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얀 프릴이 달린 셔츠에 까만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는 호박색깔 눈동자, 코 옆에 까만 점, 하얀 장갑, 하얀 양말을 신은 귀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방에서 마루까지 나오는데 한 달이 걸렸고 한 달 넘게 하악질을 일삼았으며 새벽 내내 울어대기를 시전하여 아파트에서 민원이 들어올까 조마조마 한 날들이 계속됐다. 두 손으로 안아보기까지 수개월 걸렸을 정도로 겁이 많은 쫄보지만 지금은 밤에 잘 때면 내 왼쪽 팔을 툭툭 치며 팔을 자기 쪽으로 펴달라고 조를 만큼 껌딱지가 되었다. 여전히 손님이 오면 낮은 포복자세로 도망가 이불속으로 꽁꽁 숨어버리지만 가족들하고 있으면 항상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한 팔에 딱 달라붙어서 내 쪽을 바라보며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쩌다 이렇게 귀여운 녀석이 우리 집에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네 엄마는 어떤 고양이일까? 이렇게 사랑스러운 네가 참 많이 보고 싶겠다. 이소 중에 엄마랑 헤어진 거니? 아니면 엄마가 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너 홀로 남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엄마가 키울 수 없어서 안전한 곳에 널 두고 갔던 걸까? 너의 피카츄 같은 번개모양 꼬리는 기형유전이라던데 그러면 너의 엄마도 너같이 귀여운 피카츄꼬리를 가졌을까?


그렇지만 설령 너의 엄마를 만난다고 해도 선뜻 너를 건네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땐 우리 낳은 정, 기른 정 가리지 말고 사이좋게 모두 함께 사는 걸로. 내 양팔을 너희에게 모두 내어주어 하루 종일 팔 저림에 시달린다고 할지라도.






내 친구 윤희정.

by 진달래


윤희정.


넌 지금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니? 작가의 꿈은 이룬 거니?

난 널 꼭 한번 만나보고 싶구나.


사오 년쯤 전에 소식이 끊겼던 어릴 적 동네 친구와 연락이 닿아 거의 40년 만에 만난 적이 있었단다. 놀랍게도 나와 그 친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어. 의정부의 한 찻집에서 만나 그 긴긴 세월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지. 또 만나자며 맞잡았던 손을 아쉽게 놓았는데, 아직까지 다시 보지는 못했네. 사는 게 다 그런가 봐.


이렇게 까마득히 어릴 적 옛 친구도 만나게 되는데, 이미 성년이 되어 대학 때 만난 너는 왜 이렇게 연락이 닿지 않을까. 그 시절 만난 다른 친구들의 연락처는 다들 휴대폰에 잘 저장되어 있는데 말이야.


네가 대학 졸업 후 글을 쓰겠다며 서울로 갔을 때, 참 대단하게 보였어. 내가 하지 못하는 도전을 하는 너를 부러워하면서 너의 도전을 응원했단다. 좋은 작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어.


그리고 너 생각나니? 우리 인사동 육교 위에서 딱 마주친 거..... 넌 그때 볼일 보러 어딘가를 가는 중이라고 했고, 나는 아마도 서울에 일이 있어서 잠시 올라왔을 때였던 것 같아. 근데 우연치고는 너무 기가 막히지 않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그 속담은 완전 거짓이야. 우리는 정말 반가웠으니까. 근데 그 뒤로 너를 몇 번이나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마지막이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연락이 닿지 않는 건 그때의 그 기막힌 우연에 지금까지 이어졌어야 할 우리 인연을 다 소모해 버린 때문일까? 별별 생각을 다 해본다.


네가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너네 집으로 전화를 했었단다. 그러면 어머니나 네 여동생이 받아서 네 소식을 전해주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연결이 되지 않았어. 그 뒤로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단다. 휴대폰이 아직은 대중화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집 전화를 통할 수밖에 없었지. 이사를 간 걸까? 여러 가지 궁금했지만 나는 또 나대로 일상을 바쁘게 살아내다 보니 그냥 궁금증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어.


편지를 쓰다 보니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 집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는데. 네가 한 번쯤 우리 집에 전화해 주었으면 연락이 끊기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 아마도 너와 나의 관계에서는 내가 좀 더 적극적이었나 보다. 아무래도 괜찮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날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던 친구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너를 잊지 못하고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분명 우리는 잘 통하는 친구임에 틀림없어. 너도 그럴 거라 믿어.


그때 모였던 [소설창작회] 선배들은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진로나 취업준비를 슬슬 시작했어야 할 3학년들이 소설을 써보겠다고 동아리를 만들어 매주 만나서 책을 읽고, 글을 써서 품평을 하고, 엠티를 다니고 했으니 다들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지. 난 뭔가를 쓰고 싶다는 욕심으로 발은 담그고서는 열심히 하지는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네가 젤 열정적이었지. 그리고 네가 써온 글이 젤 좋기도 했어. 그래서 우리 중에서 꿈을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 일거라고 생각했어.


나 요즘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어. 그때도 글을 쓴 게 맞다면 말이야. 네가 가장 기뻐해 줄 것 같아서 소식 전한다. 30년도 더 전에 시작했던 걸 오래도 돌고 돌아 다시 이어간다. 살다 보니 인생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내 옆에는 그때 우리 소창 멤버들처럼 서로를 북돋워주는 글벗들이 있어. 50대의 나에게 이런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참 그리고 나 서울에 살고 있어. 강북구 우이동 삼각산 재미난 마을. 번잡한 서울 중심과는 다른 이미지의 시골의 소읍 같은 작은 마을이야. 14년 전 늦은 결혼을 하고 남편의 직장을 따라 올라왔단다. 너도 서울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어쩌면 어릴 적 내 친구처럼 너도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번쩍 스친다.


7~80년대도 아닌 2025년 인공지능의 시대에 만나고자 한다면 단박에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난 어디서 그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서 지금껏 이렇게 마음으로만 그리워하고 있다. Chat GPT에게 물어보면 방법을 알려줄까? 어쩌면 아직 만날 때가 아닌 걸까?


그 옛날 [소설창작회]의 인연으로 우리가 만났듯이 다시 또 어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재회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주문을 외워본다.


-만나져라. 만나져라. 꼭 만나져라 –


기다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뭔 수를 써보겠지.

이러든 저러든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라.


내 친구 윤희정


나도 널 만나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볼게.






아빠.

by 쪼코


아빠와의 처음은 언제일까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였다는 것은 아빠가 기억하는 시간이고. 나에게 아빠의 처음은 언제일까요?


사진과 이야기와 경험이 뒤섞여 잘 구분이 되지 않아요. 그래도 최대한 집중해 봅니다. 국민학교 2학년때였어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학교에 한 살 일찍 들어갔으니 8살 봄. 아빠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좌우로 움직이는 아빠 팔의 기운과 목소리만 기억나요. 일기는 매일 쓰는 거야. 아빠랑 약속할 수 있어? 짜장면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제대로 신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덜컥 새끼손가락을 걸었어요. 그리고 정말 꼬박 5년. 때로는 칭찬, 때로는 격려, 때로는 불호령 속에서 일기를 썼어요, 그리고 아빠는 그 일기장을, 교과서, 노트 등과 함께 결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발사였던 아빠는 주말에 출근을 하시고, 수요일에 쉬셨습니다. 그래서 수요일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빠가 계셨어요. 낮잠을 주무시다 일어나서 삼 남매에게 300원, 500원 용돈을 주셨지요. 받은 즉시 새마을금고로 쪼로로 달려가 통장에 넣었는데,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나선 아빠와 함께 여의도로 자전거를 타러 가거나 동서울 롤러 스케이트장을 가거나 농구나 배구 경기장을 갔지요. 그래서인가. 난 지금도 수요일이 좋습니다. 수요일엔 긴장 없는 편안함과 여유가, 그리고 아빠가 있습니다.


아빤 삶엔 크고 작은 계획이 있으신 분이었어요. 지현이가 다섯 살이 되면 사각팬티를 입을 거야. 지현이가 학교를 가면 생일은 양력으로 지내가 할 거야. 지현이가 열 살이 되면 불법 영업 없는 이발소를 운영할 거야. 지현이가 대학을 가면 등록금까지만 줄 거야. 당신이 50이 되면 성당을 갈 거야. 운동을 1시간 이상 할 거야. 모두를 해내셨어요. 지나 보니 아빠의 계획엔 다른 사람에 대한 바람이 없어요. 아빠의 자유의지로 가능한 계획들. 아버지의 일기 상자 선물, 휴일 용돈, 경기 관람도 그중 하나였겠다 싶어요. 아빠의 계획 덕분에 난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아빠는 암을 오래 여러 번 앓으셨어요. 입원을 하고, 36번의 항암치료를 받고, 조직검사를 하고, 퇴원을 하고 다시 입원을 하는 생활을 여러 번 하셨지요. 병원 침대에 누워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셨어요. 완치판정을 받고, 또다시 새로움 암이 찾아왔을 때도 아빠는 의연하셨어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섬망이 있는 상황에서도 대소변을 가리기 위해 걸음을 걸으셨습니다. 간호조무사의 도움을 바지 허리춤을 잡고 완강히 거부하셨죠. 딱 이틀 전 단 한 번. 병문안을 간 제게 간병인이 기저귀 교체 도움을 요청했어요. 아빠가 싫어할 텐데 싶었지만, 아빠와 단둘이 있을 간병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어요. 아빠 나 어릴 적 아빠가 해준 것처럼 나도 하는 거예요. 수치스러운 거 아니야. 나, 아빠 딸이잖아. 아빠가 날 알아보지 못했어요. 아주 공손하게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완벽하게 낯선 눈빛으로 날 바라봤어요. 며칠 전 나를 의식해 바지춤을 잡고 어렵사리 화장실을 가던,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울던 아버지가 나를 기억하는 마지막 아버지였어요.


장례식장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슬픔을 함께 했습니다. 직장 동료들, 대학 인연들, 마을 사람들. 사람 많은 곳에서 주목받는 것 좋아하시던 아빠와 잘 어울리는 장례식장이었어요. 벌써 3년도 더 지났습니다. 아직도 그날 오셨던 분들에게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못 드리고 있습니다. 겁이 나요. 인사를 드리고 나면 아빠가 떠나신 게 정말이 되어버릴까 싶어서요. 아빠를 언제든 볼 수 없는 게 정말이 되어버릴까 봐요.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쓰며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봅니다.


아빠, 보고 싶어요. 많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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