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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보의 재미난 탐구 일지 by 늘보

2부: 아싸, 재미난학교 이야기

by B급 사피엔스

01. 반말을 부탁드릴게요~


“먼저 가게?” 중학생처럼 앳돼 보이는 일면식도 없던 녀석이 내게 던진 질문이다. 약간 황당과 당황 사이에서 “어... 어?”라고 대꾸하며 주춤했다. “집에 먼저 가게?”라고 재차 나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내가 잘 못 들었나 싶었지만, 두 번째 질문은 분명히 내게 반말로 묻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싶어, 몸이 조금 안 좋아 차에서 쉬었다 온다고 말했다. 이날은 재미난학교 입학 전 신입 가정들과 재학 중인 학부모들 그리고 학생들을 처음 본 환영회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와이프에게 이 말을 해줬다. 걔 좀 이상한 것 같다고. 아니면 예절교육이 필요한 것 같다고. 와이프가 크크크 웃으며 말했다. 재미난학교는 평어를 사용한다고. “평어?” 와이프는 입학설명회 때 이미 설명한 건데 내가 까먹었다고 했다. 평어. 말 그대로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인 언어다. 재미난학교는 교사와 학생들이 평어를 사용하고, 다른 학부모들에게도 역시 평어를 사용한다. 교장도 예외가 아니다.


“영어에 반말이 없는 이유와 비슷하군” 이렇게 말하자 와이프가 물었다. 영어가 존칭이 없지 왜 반말이 없냐고. 나는 피식 웃으며 생각해 보라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줄곧 평어를 사용했던 재미난학교 학생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교사나 학부모들에게 평어를 사용했다. 나는 이점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언어는 지향하는 힘이 있고,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라도 분명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수평적 관계라는 것은 평등한 언어 사용에서부터 출발하기 나름이다.


또 하나는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별명을 부른다. 별명은 교사나 학부모 누구나 가지고 있다.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도 친구처럼 부르고 친구처럼 대한다. 우리 아이도 중등 입학 후 한 달 정도는 연두 선생님이라고 했다가, 금방 적응해 연두라고 불렀다. 교사들에 대한 어색했던 존칭 사용도 금세 사라졌다. 평소 아이에게서 듣는 학교 이야기를 통해 교사들과 살갑게 속닥속닥 거리고 친구처럼 장난도 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볼 수 있었다.


평어와 별명. 나는 이 두 가지가 재미난학교를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이 매우 자랑스럽기도 하다. 재미난학교는 정해진 수업시간표가 없다. 때문에 매 학기 초 아이들과 교사들이 서로 토론하고, 각자 배우고 싶은 수업을 발표하고, 투표를 통해 반별 수업시간표를 함께 정하는 독특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그 바탕에는 평등한 언어와 별명이라는 문화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어에 반말이 없는 이유. 정확하게는 반말이 없는 것인지 존칭이 없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영어가 우리의 언어처럼 상하 수직적 체계로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 차이를 우리 관점에서 존칭이 없다고 해석할 따름이다. 반대로 해석해 보면 오히려 영어는 반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모두에게 존칭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재미난학교의 평어도 모두에게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는 또 수평적 관계를 추구하는 재미난학교의 이상적인 문화라고 뽐내고 싶다.






02. 토토와 알프레도


재미난여행은 자판기 여행이 아니다. 수학여행처럼 딱딱 정해진 여행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교사들이 직접 교통편과 숙소, 주변 병원, 안전시설, 식당 등을 미리 점검차 답사를 떠난다. 참 열 일하는 교사들이다. 여행 일정이 길면 1박 2일 일정으로도 답사를 간다. 그래서 답사 일이 금요일로 정해져 있고, 한날한시 교사들이 동시에 출발한다. 최대한 주말을 끼고 갈려고 하는 것이다. 왜? 평일은 아이들 수업을 해야 하니까. 그럼 금요일 동시에 사라지면 아이들 수업은 누가 하나? 이럴 때 학부모 자기 수업이라는 것을 한다. 학부모들이 자신의 취미를 아이들에게 체험 수업 형식으로 열어주는 것이다. 떡 만들기, 비즈 공예, 레크리에이션 등등. 학부모 자기 수업에 나도 지원을 했다. 학부모 신청이 조금 부족하다고 들었지만, 사실 호기심이 더 많이 작용했다. 무슨 수업들이 어떻게 열릴까? 직관하면서 함께 경험해 보고 싶었다.


처음은 쉽게 마을 산책이나 놀이터를 생각했는데, 예전에 풍선아트를 잠깐 했던 게 떠올랐다. 나도 뭔가 프로그램을 해보자 생각으로 풍선아트를 한다고 하니 와이프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내 검색을 하더니 삐에로 복장 사진을 내밀었다. 이걸 입고하라는 것이다. 풍선 아트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고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협박성 멘트를 날렸다. 나이 든 칙칙한 아저씨가 풍선을 만들어주는데, 아이들이 퍽이나 좋아할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삐에로 복장이라도 입어야 아이들이 신이 나서 풍선을 만들 거라고. 와이프는 논리에 강했고, 난 설득되어 굴복했다. 같이 옷을 고르기 시작했고,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맥도널드 풍의 옷과 빨간 가발 세트를 구매했다.


드디어 자기 활동의 날. 미리 만들어둔 몇 가지 풍선과 삐에로 복장을 챙겨 들고 아이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사람들이 나를 관종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다른 학부모들은 날 어떻게 쳐다볼까?’ 아주 약간의 염려가 고개를 들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등교 시간에 학교에 와본 것은 처음이었다. 교사의 안내를 받고 잠깐 대기하다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옷을 갈아입고 정해진 장소로 향했다. 가는 도중 나와 마주친 교사들은 하나같이 날 보며 흠칫흠칫 놀래며 웃었다.


반응은 예상외로 좋았다. 특히 저학년 초등 아이들의 호응이 폭발적이었다. 순간 와이프에게 감사의 인사를 맘속으로 전했다. 풍선칼, 백조 왕관, 강아지, 하트뿅뿅을 같이 만들었다. 사실상 거의 내가 만들고 아이들은 줄을 서서 기다린 형국이었지만. 그렇게 아이들과 즐거운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왔다. 급식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데, 빨간 가발을 벗을까 잠깐 생각하다 계속 쓰고 있기로 했다.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식사 후 아이들은 학교 마당에서 공놀이, 수다 떨기, 우르르 몰려다니기, 숨바꼭질 또 교실에선 낮잠 자기, 보드게임 등 정말 신나게들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무리 지어 몰려와 가발도 써보고, 염색을 시켜준다며 날 붙잡고 염색 놀이도 했다. 평소 궁금했던 아이들의 일상을 맘껏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찌어찌하여 오후 자기 활동도 마무리됐다. 만족스러웠다. 아이들과 좀 친해진 느낌? 아이들이 껴안아 주기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내 무릎에 앉아 속닥속닥 이야기도 나눴다. 얼굴도 잘 몰랐던 아이들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가려는데, 풍선을 같이 만들었던 저학년 꼬맹이가 갑자기 “늘보~! 늘보~!(내 별칭)”를 크게 외치며 이리로 오라고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부스럭부스럭 찾더니 사탕을 불쑥 내밀었다. “응!” 나를 빤히 보면서 고개를 크게 두 번 끄덕였다. 진지하면서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오늘 수고했어! 내 소중한 사탕을 선물로 줄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탕을 받으며 “우와~!” 하며 씨익 웃었다. ‘응!’과 ‘우와~!’ 만으로도 우린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교감하고 있었다. 헤어질 때도 끝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탕을 입에 물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똘망똘망한 꼬맹이 친구가 한 명 생긴 느낌? 마치 영화 시네마천국에 등장하는 알프레도와 토토 같은 사이라고 할까? 사탕을 쪽쪽 빨며 ‘40년의 나이차를 뛰어넘은 친구가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내게 힘든 일이 생기면 그 똘망똘망한 꼬맹이 친구가 “늘보 힘내! 괜찮아~”라고 토닥거리며, 고개를 두 번 끄덕여 줄 것만 같다.






03. 쉰내 나는 찐 여행!


“여행을 힘줘서 강조하던데, 여행이 그럴 정도인가?” 순도 100% 재미난학교 토종 학부모가 오래전 재미난학교 입학 설명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하던 중 꺼낸 말이었다. 여행이 그 정도로 중요치 않다는 것과 재미난여행은 그렇게 대단한 게 있나? 정도의 의미로 해석했다. 음. 순혈이 아닌 나는 여행이야말로 정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여행을 강조하는 것은 재미난학교의 스스로 배움이라는 문화를 잘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가는 여행은 수학여행이다. 초, 중, 고 한 번씩 가니 12년 동안 3번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미난학교는 일 년에 3번 여행을 간다. 봄, 가을에 한 번씩 그리고 겨울에 또 한 번 간다. 초등 1학년부터 중등까지 각 학년별로 봄, 가을 여행을 가고, 겨울은 전 학년이 함께 간다. 국공립학교에서 12년 동안 3번 가는 여행을 재미난학교에서는 1년 만에 모두 가는 것이다. 초등 6년 동안 18번, 중등까지 합치면 학교에서 가는 여행만 무려 27번이다.


왜 이렇게 여행에 진심일까? 여행이야말로 스스로 배움을 찾아가는 가장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난학교의 여행은 관광버스가 먼저 떠오르는 수학여행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런 프로그램화된 코스 여행이 아니다. 여행 계획을 각 학년 아이들이 스스로 짠다. 각자 가고 싶은 여행지를 고르고 ‘왜 이곳을 골랐는지? 여행지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을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반 아이들의 인기투표를 통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곳이 최종 여행지로 결정된다. 때문에 각자 가고 싶은 여행지에 대해 최대한 어필하는 치열한 설득 과정이 펼쳐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여행지에 대해 스스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이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행지가 결정이 되면 어디를 방문할 것인지, 숙소는 어디로 할지, 교통편은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 또 식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담당자를 정해 각자 조사하고 발표한다. 초등학생들도 예외는 없다. ‘어린아이들이 이걸 어떻게 하지?’ 싶을 텐데, 이미 이런 과정은 재미난학교 20년의 여행 경력이 보증을 한다. 교사들은 보조적인 역할만 할 뿐이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교사들이 하는 역할은 점점 줄어든다.


우리 아이도 재미난학교 중등 입학 후 첫 여행을 떠났다. 몇 끼는 직접 해 먹는다며, 식용유와 쌀, 소금 등을 바리바리 챙겨갔다. 웃기게도 아이들이 직접 해 먹은 밥이 제일 맛있었다는 후일담도 있었다. 우리 아이는 첫 여행인 만큼 커다란 배낭에 이것저것을 엄청 집어넣고 싸갔다. 출발 전 찍은 단체 사진을 보니 우리 아이 배낭이 가장 거대했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재미난학교의 여행을 맛본 친구들의 가방은 하나같이 홀쭉했다. 유경험자의 위엄인가 싶었다.


여행의 일상은 학교 온라인 카페에 매일매일 일기처럼 올라왔다. 무엇을 먹었고, 어디를 갔고, 무슨 일이 있었고. 여행일기도 매일 담당 조를 정해서 하루씩 올린다. 올라오는 글과 사진을 보면 일기를 작성하는 아이들의 개성이 그대로 묻어났다. 여행 전날 아이가 조금 걱정되었던 나는 저녁 늦게 올라오는 후기를 보며 즐겁게 여행하는 아이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볼 수 있었다.


관광버스도 없이 지하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또 여행지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일기로 보며, ‘진짜 여행이란 이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박 5일의 첫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의 모습은 꼬질꼬질 그 자체였다. 얼굴과 몸은 까맣게 그을리고 배낭과 옷가지 그리고 온몸에서 옥수수 쉰내를 찐하게 토해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한 아이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가을 여행을 벌써부터 기대하며.






04. 주정뱅이 행성의 학부모


넥타이를 머리에 동여맨 코가 빨간 주정뱅이 학부모. 쪼르르 아이들을 줄 세워놓고 노래를 한곡 뽑아라, 춤을 춰봐라, 큰소리로 갑질과 명령질을 한다. 아이들은 웃기다는 듯 또 고학년 아이들은 유치하다는 듯 콧방귀를 뀐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요상스럽게 보기도, 재밌게 지켜보기도 한다. 올해 8월. 30도를 가뿐히 넘기는 무더위는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지만, 재미난학교는 무더위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 땀방울을 흠뻑 쏟아냈다. 그리고 나는 무더위에 점점 얼굴이 빨개져 찐 술주정뱅이에 점점 가까워졌다. 메소드 연기가 아닌 레알 상황이다.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재미난도서관은 학교 부설기관이자 마을 도서관으로 매년 재미난 일들을 꾸린다. 여름 방학은 여름 캠프를 연다. 테마를 가지고 아이들이 이런저런 미션들을 진행하고, 학교에서 1박을 한다. 올해 캠프 테마는 ‘어린 왕자’. 나는 술주정뱅이 행성을 맡았다. 그래서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에게 맘껏 술주정(?)과 갑질을 했다. 합법적으로. 이런저런 미션을 끝낸 아이들은 흥이 한껏 올라있었고, 결코 꺼지지 않는 활화산이 되어 새벽이 되어도 잠들지 않았다. 아이들의 체력은 강했고, 어른들의 체력은 받쳐주질 못했다.


새벽 1시가 되어도 시끌벅적함은 학교를 회오리치듯 감싸고 있었다. 소음에 둔한 편인 나조차도 뇌가 두둥실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한밤중에 주변의 민원이 걱정되는 다른 학부모는 연신 아이들에게 조용히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 소리치고, 애원하기도 했다. 허나 그건 불가능이라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나 완벽에 가까운 환경과 분위기를 마련해 놓고, 조용히 잠을 청하라 하는 건 이율배반적이다.


야생마들을 넓디넓은 평야에 풀어놓고, 천천히 산책을 하라 하면 정말 사뿐사뿐 걸음마나 하고 있을 야생마가 있을까? 흥이 한껏 오른 아이들 무리는 조용히 해달라는 부탁과 동시에 이쪽저쪽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학교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렇지! 얌전히 다소곳이 앉아서 속삭이면 그게 어디 아이들이랴? 혼날 때 혼나더라도 웃고 떠들고 한바탕 신나게 놀아야지!


시간이 새벽 4시를 향하고, 시끌벅적한 소란도 한풀 꺾일 때쯤 나도 쪽잠을 정했다. 이제 학교는 물 반 고기 반처럼, 침낭 속에서 잠든 아이들 반, 졸림의 경계선 그 어딘가쯤에서 아직도 정신의 끈을 부여잡고 속닥이는 아이들 반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가지런히 벽을 향해 일렬횡대로 잠을 자는 것은 애초부터 미션임파서블이었다. 에너자이저도 울고 갈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이라고나 할까?


쪽잠을 청하며, 문득 유년 시절의 보이스카우트 기억이 떠올랐다. 국민학교 시절 학교 강당에서 옹기종기 모여 미션을 하고 수다를 떨고, 밥도 해 먹고, 학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갑자기 비가 억수로 쏟아져 학교 강당에서 다닥다닥 들러붙어 잠들었던 기억이. 이 아이들도 나처럼 훗날 어른이 되어 지금의 추억을 되새기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이 추억과 경험들은 또다시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흐뭇한 기억과 함께 얄궂은 상상도 함께 해본다. 훗날 너희들이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서 밤을 지새우게 된다면, ‘어디 한번 맛 좀 봐봐라! 이게 얼마나 극한 체험인지를.’






05. 승급식, 블록 큐레이터


"오사카성은 몇 개의 블록이 사용되었나요?"

"… (생각 중) 4만 개 블록이 사용됐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잠깐 생각하더니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언제 그런 것까지 계산했지?’ 새삼 놀랐다. 태연한 것인지, 의연한 것인지. 아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때 종종 의외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지난여름, 자원순환 프로그램에 함께 참가했을 때도 그랬다. 바다에서 수거된 오랫동안 자연 마모된 유리조각과 색연필로 그림을 참 개발새발처럼 그렸었다. 중학교 1학년이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각자의 그림 발표 시간이 있었는데, 아이는 그 엉성한 그림을 가지고 정말 뜻밖에 설명을 했다. 약간 허를 찔린 느낌. 내 눈이 동그래졌다. 헷갈렸다. 이게 순간의 말빨로 지어낸 것인지, 정말로 의도한 것인지. 뭐가 됐던 나는 놀라웠다.


"블록 4만 개는 어떻게 계산했어?"

다음날 물었다. 아이는 오사카성의 가로, 세로 길이를 디폼블록 크기인 8mm로 나누고, 층수를 곱해보니 어림잡아 4만 개 정도가 나왔다고 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걸 계산해서 답을 했다고? 대단하다!' 그리고 며칠 후 생활교사에게 승급식 후기를 들었는데, 사용된 블록 수는 예상 질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리 계산을 했다고 들었다. 즉석에서 계산하고 답했다고 내가 넘겨짚은 것이다. 또 4만 개가 아니고, 3~4만 개로 답했다고 들었다. 기억의 오류 덩어리다(-_-). '팔불출인가? 왜 있는 그대로 듣지를 못 했지?' 잠깐 이런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래도 뭐 어떤가? 승급식날 아이의 당차 보이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재미난학교 중등 승급식. 1년의 수업을 마무리하며, 그간 준비했던 개인 프로젝트와 중등 학생 전제가 함께한 팀 프로젝트 발표회 날. 생각보다 많은 재미난학교 초등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참석해 응원과 축하의 시간을 가졌다. 나도 아이도 처음 겪는 승급식이다. 차례차례 학생들이 발표를 하고, 우리 아이가 나왔다. 목소리와 행동은 떨지 않았지만, 얼굴에서 긴장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이는 직경 8mm 크기의 디폼블록으로 세계의 유명 랜드마크인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오페라하우스, 오사카성을 만들었다. 개인 프로젝트에 대해 PPT로 발표하고, 직접 만든 결과물을 승급식 장소에 전시도 했다.


승급식이 한 달 정도 남았을 무렵 온 가족이 디폼블록에 매달리게 됐다. 아이의 개인 프로젝트를 도와주며, 여름에 있었던 아이들의 행위주체성을 주제로 한 포럼이 떠올랐다. 아이에게 한마디 잔소리를 할까 말까 그렇게 갈등했었던 내 모습은 방향을 명확히 정했다. 와이프는 나에게 혀를 찼다. 단순 반복적인 행위라 해도 끈기와 노력으로 자기 스스로 이뤄내는 것도 공부라며. 맞는 말이다. 다만 나는 현실과 합리적 타협점을 찾았다. 아이의 건강도 중요하므로(아이는 목, 어깨가 좋지 않은 편이고, 디폼블록을 쌓는 일은 생각보다 관절에 무리를 준다). 설계와 구상, 디자인은 아이가 지휘했고, 나는 몸종 노릇을 했다. 결국엔 와이프도 디폼블록 끼우기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물론 아이가 입으로만 만든 건 아니다). 개인 프로젝트 발표를 며칠 남기고 무게 11kg, 사용된 블록 수 약 4만 개, 디폼블록으로 만든 거대한 오사카성이 완성됐다.


발표 쉬는 시간에 디폼블록이 전시된 곳으로 관람 온 학생, 학부모들에게 아이는 미리 준비한 자료를 활용해 큐레이터처럼 설명했다. 실제 건물의 높이, 무게, 건설기간 같은 건물에 대한 이야기와 디폼블록으로 만든 전시물의 비율, 만든 시간, 높이 등을 설명하고, 관람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준비한 크로마키 천 앞에서 사진도 찍어주었다. 디폼블록 오사카성을 배경으로 합성해, 기념사진을 선물할 계획이란다. 여름휴가로 오사카성을 갔을 때 즉석 기념사진 촬영을 보며 엄마랑 생각했단다(나도 같이 갔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다).


아이는 개인 프로젝트를 발표할 때 사람들이 박수도 많이 쳐주고 멋있다고 칭찬하니 뿌듯하고 보람 있었다고 했다. 내년에는 무엇으로 프로젝트를 할 건지 묻는 말에 아직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아마도 내년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정하지 않겠지. 1학년 첫 개인 프로젝트는 어찌어찌 마무리됐고, 성취감과 함께 개인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맛을 봤다면, 내년에는 조금 더 자신의 스타일을 발견하는 프로젝트를 선택했으면 한다. 비록 그 결과물이 엉망이 되더라도 과감히 도전해 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색깔을 찾는 모험을 해보길 바란다!






06. 굿바이! 가정상담.


눈물이 차올라 고갤숙여. 생활교사가 나눠 준 아이의 생활 기록지를 읽어 내려가다 갑자기 핑~ 눈물이 고였다. 참으려고 하는데, 이내 또르륵 눈물이 흘렀다. 쯧. 상반기 가정상담에서도 눈물을 보인 것 같은데, 별칭을 울보로 바꿔야 할 판이다. 개발새발처럼 잘 알아보지도 못하게 쓴 아이의 글. 1학년을 보낸 아이 스스로의 평가가 몹시도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리고 아이는 생활교사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남겼다. 너무너무 좋았던 인생(?) 최고의 학기였다는 말과 함께.


재미난학교의 가정상담시간. 학기말 각 가정의 부모와 생활교사 간 면담. 한 학기 동안에 있었던 학교와 가정에서의 아이 생활상을 서로 주고받는 시간이다. 생활교사는 아이가 수학 숙제를 하는데 2시간이 꼬박 걸린다는 이야기에 새삼 놀랐다. 한 페이지를 푸는데 어떻게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궁금해했다. 짧게 설명하자면 한 페이지를 푸는데 1시간, 엄마와 함께 검사하는데 30분, 다시 틀린 문제를 고치는데 30분. 도합 이렇게 2시간이 꼬박 걸린다. 아이는 수학 문제 푸는 걸 매우 지겨워한다. 멍 때리고 몸을 비비 꼬면서 1시간을 걸쳐 한 페이지를 끝 마친다. 이후 엄마와 함께 검사하는 30분 내내 상호 날이 선 목소리가 오간다. 그 후 다시 틀린 문제를 고치는 시간에 '에휴... 에휴…'를 쏟아내며, 아이는 터벅터벅 방으로 들어간다. 고개를 떨구며.


생활교사는 초 현명한 답을 주었다. 학교에서 숙제 검사를 하고 틀린 문제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있는데, 굳이 가정에서 미리 검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엄마의 변. 문제집을 보면 틀린 답을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있는데, 모두 동그라미가 쳐져 있어서 검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생활 교사는 숙제 검사를 하면, 대부분 틀린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그걸 학교에서 다시 확인해 가며,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하나씩 다시 풀어보고 제대로 풀었으면 동그라미를 준다고 했다. 학교에서 하는 과정을 집에서 엄마가 미리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집에서는 숙제를 하면 그걸로 끝. 아이의 숙제를 더 이상 들여다보지 말라고 권유했다. 와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지난 몇 달 동안 지지고 볶고 했던 통곡의 저녁 숙제 검사 시간들. 이젠 안녕이다.


또 다른 고충의 시간, 글씨 검사. 이건 엄마, 아빠 연합의 변. 글씨를 도무지 알아볼 수 없다. 와이프도 나도 함께 잔소리를 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더 심했다. 글자를 쓴다는 것은 그 목적이 기록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인데, 그 기록의 정보를 인식할 수가 없다. 이런 이해되지도 않을 이야기를 아이에게 해대며, 글자를 바르게 쓰라고 했다. 아이가 쓴 글을 아이도 잘 읽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이쁘게 쓰는 건 바라지도 않고, 알아볼 수만 있게 또박또박 쓰라고 글씨를 볼 때마다 이야기했다. ‘이게 어려운 일인가?’ 다른 건 몰라도 글자는 물러설 수 없었다. 생활교사는 짧게 말했다.


“어려운 일이에요.”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이내 수긍을 했다. 다른 학생들도 글자 쓰기가 참 어렵단다. 와이프와 나는 아이가 초등학생 저학년 시절, 글씨를 참 가지런하게도 바르게 썼던 그 글씨체를 잊지 못한다.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엄마, 아빠는 그 긴 시간 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욕심’ 일 것이다. 생활교사는 글씨도 학교에서 종종 이야기하니 집에서는 안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집은 그저 몸도 마음도 편안히 쉴 수 있는 곳. 눈치 보지 않고 스트레스받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와이프와 나는 동시에 수긍하고, 글씨도 ‘입꾹닫’ 하기로. 또 하나의 갈등의 시간들. 이젠 안녕이다.


또 하나의 부탁이 있었다. 아이를 지켜보면 본인 스스로에게 갖는 기대치가 높은 편 같다고. 그래서 긴장도가 높고, 스트레스도 있는 편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끔 학급 친구들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본인의 기대치를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기 때문일 거라 했다. 그리고 그 기대치는 부모에게서 비롯되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음. 이번엔 와이프는 순순히 수긍을 했지만, 내가 쉽게 수긍하기 어려웠다. ‘아이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가?’ 스스로 반문했다. 직장이나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는 종종 깐깐하다는 말을 듣는 편이긴 하다. 다만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방적 소통, 강요 이런 것을 나 스스로도 싫어하는 스타일이므로.


아빠의 변이 길어졌다. 내가 아이와 평소 대화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생활교사는 바로 이런 점들이 기대치가 높은 것이라고 콕 집어 말했다. 내 말과 생활교사의 말이 동시에 겹치는 그 순간, 이해가 확 와닿았다. 아이와 대화하는 나의 습관 중 하나는 어떤 상황이나 현상을 마주할 때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아이가 잘 이해되는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 다른 예를 들어가며 묘사하듯 상황들을 하나하나씩 설명하기도 한다. 상황에 잘 들어맞는 정확한 단어를 생각하며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편이다. 생활교사는 바로 이런 점이 나의 기대치가 높다는 반증이라 했다. 이해를 못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해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명쾌했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인정하고 또 한발 물러섰다. 고로 또 하나와 작별을 고했다. 오늘 여럿과 안녕한다.


이별을 했는데 참 홀가분하다. 안녕이 이렇게 좋을 순 없다. 가정상담에서 그간 생각하지 못했었던 일상에 대한 깨달음의 시간. 아이가 생활교사에게 고맙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오늘의 시간이 그리고 그동안 아이와 함께 해준 시간들이 고맙고 감사하다. 감사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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