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아싸, 재미난학교 이야기
“엄마, 저 학교 안 갈래요.”
6학년 1학기였다. 아이가 등교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안 가면 안 돼요?”에서 “안 갈래요. 안 갈 거야!”로 바뀌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학교폭력(왕따)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몸이 안 좋은가? 우선 근처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소변검사, 피검사를 했다. 별이상은 없었다. 몸이 허해서 그런가? 한의원을 갔다. 맥을 짚고 아이 체질에 맞는 한약을 지었다. 세 재를 먹은 아이는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큰 아이가 정신과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정신과 예약을 하고 진료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아이가 불안감, 긴장감이 다른 아이들보다 높은 편이고, 약한 우울증상도 보인다며, 우선 약을 먹어보고, 지켜보자고 했다.
영어, 수학, 미술학원을 쉬기로 하고, 학원 선생님들에게 아이 상황을 전하다 눈물이 터졌다.
괜찮아질 거라는, 잠깐 쉬었다 오라는, 힘내라는 말에. 밖에서 전화를 하던 나는 터져버린 눈물 탓에 한참을 걷다가 들어갔다.
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는 첫 일주일을 힘들어했다. 며칠만 쉬다 다시 가겠다고 했다. 죄송하다고도 했다. 나는 괜찮다고 아이를 다독였다. 한 달, 두 달이 넘어가니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다 학원을 아예 다니지 않는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됐다.
학원을 잠시 쉬면 학교를 잘 다닐 줄 알았다. 학원이 힘들어서일 거라 넘겨짚은 탓이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고, 나는 아침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화를 내느라 진이 빠졌다.
00초 사건 때문에 예민한 시기였다. 학교 선생님과 이야기를 깊게 나누고 싶었지만, 대면상담도 조심스러워, 학교앱으로 아이와 관련된 문자를 보낼 때마다 얼마나 고민을 하면서 보냈는지 모른다.
전화 통화 한 번이 쉽지 않았는데, 어렵게 연결이 되어도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크고 바르던 아이의 글씨체는 작고 삐뚤어졌고, 숙제는 미뤄지고 아예 하지 않는 날도 생겨났다.
수학 같은 경우 그동안 한 번도 치지 않았던 재시험도 보게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모든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힘들어했다. 성적이 내려가자, 자신감이 떨어졌고, 쓸모없는 아이라고 자책했다.
2학기가 되고, 수업일수만 맞춰 졸업을 시켜야지라는 일념으로 아이를 달래어가면서 학교를 보냈다. 일을 하면서도 오늘은 괜찮았을까라는 생각에 불안했고 하교하는 시간이 되면 심장이 빨리 뛰고 배가 아팠다. 아이도 아프고 나도 아팠다. 온 가족이 힘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중학교도 힘들게 다니겠구나,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침마다 등교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학교가 이렇게 가기 싫고 불편한 곳이라면 더 이상 학교에 보낼 수는 없었다.
대안이 필요했다. 남편과 나는 서울에 있는 대안학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어디가 아이에게 맞는 곳인지 고민했다. 그러다 몇 년 전 친구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학교가 생각이 났다. 낮은 돌담이 있고, 숲이 우거지고 학교 앞에 계곡이 있었던 곳. 이런 학교에 다니면 너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곳.
삼각산재미난학교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정보가 많지 않아서, 우선 학교 설명회와 아이 겪어보기를 신청했다.
겪어보기를 한 아이는 뭔가 다르다고 했다. 학교라고 해서 갔는데 학교 건물이 아니고,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좀 이상하다고. 하지만 이름처럼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재미있을 것 같다고? 아! 다행이다. 남편과 나는 안도했다.
마지막 관문. 아이 면접과 부모 면접이 남았다. 겪어보기 마지막날 면접을 보는 아이는 전날 걱정을 했다. 아이는 면접을 못 봐서 떨어질 것을 걱정했다. 면접 잘 보는 방법을 물어보길래 그냥 네 생각을 솔직히 말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서로 예상 질문을 만들고 연습도 했다. 겪어보기 마지막날. 아이는 면접을 봤고, 잘 본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이제 나와 남편의 차례. 부모 면접을 보던 날 아이가 힘들어하는데 왜 학교를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순간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지고 식은땀이 났다. 나는 아이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했다고 말했다. 한 학기만 하면 졸업이고 도중에 포기하면 다음에도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포기할까 봐 그만둘 수 없었다고. 그리고 무슨 말을 했더라.
대문자 I인 내게 면접은 역시 어려웠다.
며칠 후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자 아이는 정말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자기가 면접을 잘 봐서 붙은 거라며 기뻐했다. “맞아! 네가 면접을 잘 봐서 붙은 거야. 잘했어!” 우리는 서로 꼭 안아주었다. 이제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일반 학교의 교육과정은 선생님이 정해준 시간표에 따라 교과과정에 맞춰 진행된다. 이 방식은 다수의 학생들에게 동일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학생 개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을 존중하기는 어렵다. 교과서 중심으로 진도를 나가는 수업은 중학교부터 입시 위주의 경쟁체제로 전환된다. 중학교부터 시작하면 늦을 수 있어, 소위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의 부모는 초등 고학년이 되면 학군이 좋은 곳으로 이사하기도 한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이의 원적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학교로 아이와 꼭 함께 와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함께 학교로 가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집 바로 옆에 있는 중학교에 방문해 교장실로 안내받았다. 그곳에서 몇몇 선생님과 학부모 한 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면담 중 삼각산재미난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왜 대안학교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오늘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았는데, 아이는 긴장한 목소리로 학급 시간표를 구성 중이며 자신이 배우고 싶은 과목을 정해 PPT로 만들어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했다고 말했다.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서 일본어를 배우면 좋은 점을 발표하고 왔다고 했다. 조용히 듣고 계시던 교장선생님은 건강하게 네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며 잘 지내라고, 학교를 다니는 길은 여러 가지이니 학교 이름처럼 재미있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교문을 나서면서 아이는 "생각보다 선생님들이 좋은 것 같아. 다녀도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한데? 교장선생님 인상이 좋아 보였어.", "그래? 그럼 다시 다닌다고 말하고 올까?", "아니, 그건 아니지. 농담을 구별해야지!"라며 발끈했다. "난 또 진담인 줄 알았지. 하하하!". 아이의 재미난 학교 사랑은 이미 시작되었나 보다.
아이의 삼각산재미난학교 중등과정은 학생과 교사가 함께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개인 프로젝트와 팀 프로젝트를 통해 관심사를 스스로 배우며 서로의 프로젝트를 돕는 과정이다. 개인 프로젝트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해 보고 싶은 것’을 하도록 독려한다. 아이는 개인 프로젝트로 '디지털 드로잉으로 친구들 얼굴 그리기'를 선택했고, 프로젝트 과정에서 전문가를 만나 피드백도 받았다. 운 좋게도 전문가를 빨리 만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여러 가지 조언을 받았다.
팀 프로젝트는 각자 정한 수업을 진행하는데, 주체하는 아이와 도와주는 아이들이 함께 활동하며 다양한 협력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찾아간다.
영어와 수학은 각자의 수준에 맞게 분반 수업을 하고, 과학도 교과서 중심 수업이 아닌 실생활에서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수업으로 진행된다. 시험의 부담이 적어서인지 조바심이 줄어들었고, 학교에서 내준 숙제도 내가 하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싶어 하는 의지도 생겨나고 있다.
재미난학교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보내는 학원을 다니며 의무적으로 공부와 입시 준비만 하면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교과서로 짜여진 시간표대로 공부하는 대신, 재미난 학교에서 수업 시간표를 짜보고, 4박 5일의 여행을 다녀오고, 점심시간이 길어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고, 교실에서 누워 있기도 하며, 학교 안에서 자유를 느끼고,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며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정해진 길을 가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내 생각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는 여전히 발표를 하거나 자기가 주도하는 수업을 할 때는 힘들어하지만, 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해보려고 용기를 낸다. 그 시간들 속에서 충분히 느끼고 배우고, 고민하고 시도해 보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과 대처 방법을 알아가길 바란다.
환경에 간섭받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기에는 아직 어리고 약한 아이.
나는 아이가 영어, 수학, 국어, 사회, 과학을 많이 배우지 않더라도 걱정되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으니...... 재미난 학교에서 3년 동안, 아이는 얼마나 자라날까? 앞으로의 3년이 아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은 분명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아이가 하교할 시간이 되어도 심장이 빨리 뛰지 않는다.
배가 아프지 않다.
아이가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가 여수로 정해지자 ‘여수 밤바다’를 들어야 한다며 노래를 다운받고, 준비해야 할 물품들을 체크하느라 분주해졌다. 혹시 모를 추위에 대비해 얇은 점퍼를 챙기고, 4박 5일 동안 사용할 짐을 넣어갈 커다란 배낭까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신이 난 아이는 볼펜으로 하나씩 체크하며 짐을 꾸렸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짐을 싸야 했기에, 넣었다 뺐다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짐을 쌀 수 있었다. 자기 몸의 반을 차지할 만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이 의젓해 보여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가방이 꽤 무거울 텐데도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다.
여행지는 아이들과 교사가 함께 의논해서 정한다. 어디를 갈지, 어느 식당을 갈지, 무엇을 만들어 먹을지,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한다. 무려 4박 5일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가는 여행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해맑은 얼굴로 “걱정을 왜 해! 엄마도 참. 그리고 전화하면 안 된대. 그러니까 엄마도 전화하지 마!”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씩씩하게 여행을 떠났다.
4박 5일의 휴가가 생긴 나는 오랜만에 친구도 만나고, 늦잠도 자고, 그림도 그리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저녁마다 여행지에서 학교 까페로 사진과 글이 올라와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볼 수 있었다.
첫날 활기찬 모습에서 점점 피곤해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났다.
여행 전날 설레어 잠을 설쳤던 아이는 편안한 일상을 떠나 불편하지만 새롭고 낯선 세계를 경험했다. 편안한 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긴 시간 KTX를 타야 했고, 버스를 타야 했고, 매 끼니마다 원하는 음식만 먹을 수 없었을 테니, 여러 가지로 불편했을 것이다. 그동안 누렸던 편안함에 대해 감사함을 느꼈을까?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만난 것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을까?
길었던 여행이 끝나는 날, 4.19 탑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린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꼭 안겼다.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는 그 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랜만에 조잘조잘 떠드는 아이를 보니, 여행이 꽤나 즐거웠던 모양이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워서는 “역시 집이 최고야!”를 외쳤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는 “여행이 재밌긴 한데, 4박 5일은 좀 긴 것 같아. 너무 피곤해.”라며 일찍 잠이 들었다. 그렇게 열두 시간을 내리 잤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은 아이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이제 여수는 아이에게 친구, 형, 연두, 호랑이와 함께한 특별한 곳으로 남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때를 떠올리면 힘들었지만, 다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재미난 학교는 봄, 가을, 겨울. 세 번의 여행을 떠난다.
3년 동안 아이에게 여덟 번의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삼각산재미난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일반 학교에서 6년을 보낸 아이가 자유로운 분위기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개인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같은 부분이었다.
삼각산재미난학교 중등 과정은 1~3학년 연령 통합반으로 운영된다.
각각 다른 학년들이 같은 공간에서 지내기 때문에, 일반 중학교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통합반 수업에서는 형들과도 함께 지내게 되는데, 같은 또래 집단에서 생기는 경쟁심이나 소외감을 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가 친구들뿐만 아니라, 형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됐다. 다행히 같은 취향의 만화를 좋아하는 형을 만나면서 조금씩 친해졌다. 그 형은 취미로 도마뱀을 키우고 있었고, 도마뱀에 전혀 관심이 없던 아이도 형과 이야기를 나누며 도마뱀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아이는 용돈을 모아 도마뱀을 분양받았고, 도마뱀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며 비바리움을 직접 만들어 매일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다.
긴장감이 높은 아이는 새로운 변화나 도전을 앞두고 늘 긴장한다.
발표하는 날이 정해지면 며칠 전부터 걱정하며 잘못할까 불안해했다.
3월 1일 열음식(입학식)에서 신입생 가족들은 각자 소개를 해야 했는데, 아이는 가족과 함께 발표한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순간을 곁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등업식 날 줌으로 발표를 하게 되었을 때도, 학교에 안 간다고 할까 조마조마했지만, 아이는 연습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 형들에게 발표 팁을 전수받으며 교사의 격려 속에서 떨면서도 끝냈다. 발표를 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긴장되었지만, 끝난 후 한결 편안해진 아이의 표정을 보며 안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는 “해보니 별거 아니네. 그래도 발표는 하기 싫어.
나만 떨리는 줄 알았는데 다른 친구도 떨렸었대.”라며 홀가분한 표정으로,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래,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 애썼다. 우리 천천히 하나씩 다시 해보자.’
이제 내 마음도 조금 편해지고 있다는 신호일까?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은 재미난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아이는 아프지 않은 이상 빠지지 않았던 영어와 수학 학원을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대신 디지털 드로잉 수업을 주 1회 다니고 있다. 드로잉 수업은 개인 프로젝트로 친구들 얼굴 그려주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혼자 연습했지만 생각만큼 되지 않아 전문가에게 배우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스스로 배움을 선택한 아이는 즐겁게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학교에서 영어와 수학 수업을 하고 온 아이는, 시키지도 않은 영어 숙제를 하고 테스트를 해달라고 했고, 수학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며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남편은 아이의 수학 선생님이 되어 지금도 투닥거리며 수업을 하는 중인데, 투닥거리는 저 소리가 듣기 좋을 줄이야!
아이 역시 마음이 편해졌는지 예민하게 반응하던 행동과 말들이 많이 줄었다.
내 목소리 톤이나 작은 행동에도 민감하던 아이의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발표할 때 발음이 좋지 않은 것 같다며, 저녁마다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며, 집 근처 서점에서<똑똑한 하루 글쓰기>라는 문제집을 사 와 매일 조금씩 풀고 있다. 낮은 단계의 책을 산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공부하고 싶어서라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조금씩 해나가는 아이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띵동! 휴대폰 알림음이 울린다.
“안녕하세요? 중등 2학기 반모임을 정해야 하는데, 우선 9월 모임부터 정하려고 합니다.” 중등 대표인 산양이의 메시지가 왔다.
산양이의 메시지 아래로 참석 여부에 대한 답장이 하나둘씩 달리기 시작한다.
반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저녁 7시 30분에 열린다. 대부분의 학부모가 참석하고, 간단한 인사 후 교사가 한 달 동안 아이들과 있었던 일들을 들려준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요즘 학교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슬쩍 물어보면, “몰라도 돼.”라며 무안을 주기 일쑤다.
아이들이 외부 활동을 다녀온 날이면, 학교 카페에 올라온 사진과 글로 대략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만 알 수 있어서, 교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반모임을 하는 날은 퍼즐 맞추듯 아이의 짧은 이야기들이 하나씩 맞춰진다.
이번 모임에서는 아이들의 개인 프로젝트 현황과 가을 여행 기간이 3박 4일이 될 뻔한 이야기와, 여행 일정과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개인이 준비하는 식재료가 무거운 것 같아 즉석에서 다시 정해서 나누기도 했다.
어느 달엔 참석 인원이 적었던 날도 있었다.
“오늘은 사람이 적네요. 우리 카페에서 이야기 나눌까요?”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빵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은 곳이 있어요!”
“제가 학교 옆에 차를 세워 뒀어요. 제가 운전할게요. 그쪽으로 가죠!”
“와아, 좋아요. 좋아요. 신난다!”
이 대화는 놀랍게도 학부모와 교사 간의 대화다.
일반 학교에서는 여러 부모와 교사가 함께 아이들의 일상을 나누는 일은 드물다.
학부모 상담 주간이 아니면 교사를 마주할 일도 적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는 상담할 일도 별로 없었지만, 관심 없는 부모처럼 보일까 봐 상담을 신청하곤 했다.
딱히 할 말도 없었기에, 20분의 상담이 두 시간처럼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재미난 학교의 두 시간 반모임은 20분처럼 느껴진다.
반모임에서 나누는 대화는 단순히 학교 소식을 듣는 자리가 아니라, 아이를 함께 키우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느껴지는 시간이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학부모와 교사의 사이도 더 가까워졌다. 그 덕에 우리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배우고, 자라고 있는지 더 깊이 느끼게 된다.
두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저녁에 열리는 반모임도, 기본 두 시간인 반모임도 이제는 익숙하다.
오히려 두 시간 전에 끝나면 허전할지도 모르겠다.
2학기가 끝나간다.
아침이면 늘 분주하다. 우리는 7시 40분에 맞춰 집을 나선다.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 298번지. 이제는 내비게이션 없이도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습관처럼 버튼을 누른다. 차 안에서는 아이가 좋아하는 J-POP이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왜 이런 노래를 좋아할까 싶었는데, 이제는 나도 따라 흥얼거리게 되었다.
재미난학교를 다닌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아이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저는 이 글의 주인공 이한결(한교리)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파충류 특히 레오파드 게코를 좋아해요.
냄새에 민감하고, 입맛이 까다로워서 어쩔 수 없이 편식을 해요..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말이 적은 편이에요. 체력이 약하지만 운동은 하고 싶지 않아요.
재미난학교에 입학 후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아, 잘 왔다.”,“나에게 꼭 필요한 곳이었어.”,“학교가 좀 특이한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가 특이하다고 했는데, 어떤 점이 특이했나요?
중등 1,2,3학년이 같이 수업을 듣는 것, 초등에도 통합반이 있다는 것, 급식 후 자기 식판을 직접 설거지하는 것. 또, 개인 프로젝트를 정하고 어떤 수업을 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 모두 신기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여행을 가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부모님과 교사들이 별칭을 쓰고 평어로 말하는 것이 특이했어요.
평어를 써보니 어떤가요?
처음엔 낯설고 어색해서, 1학기에는 잘 쓰지 못했어요.
지금(2학기)은 평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존댓말이 익숙해서 쉽게 쓰지 못해요. 그래서 평어와 존댓말을 번갈아 쓰고 있어요.
재미난 학교의 여행은 어땠나요?
첫 여행지는 여수였어요. 여행 가기 전날 설레서 잠을 잘 못 잤어요. 가족과 떨어져 혼자 가는 첫 여행이라 긴장도 많이 됐어요.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밥은 맛있을지, 잠은 잘 잘 수 있을지, 반려견(동동이)과 도마뱀이 잘 지낼지 걱정도 됐어요. 막상 가보니 밥은 맛있었어요. 여행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지루하기도 했어요. 잠도 잘 못 잤고요. 그래도 여행이 싫지는 않았어요. 가을에는 서천으로 가요. 못 가본 곳이라 기대가 돼요. 숙소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로 해서 좋아요. 많이 걸으면 피곤하거든요.
이번에는 보드게임과 캐치볼, 마쉬멜로도 가져가서 구워 먹을 예정이에요.
재미난 학교에 입학할지 망설이는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망설이지 말고 와! 우리가 알고 있는 학교와 달라. 아침에 일어나면 저절로 학교 갈 마음이 생겨. 점심시간도 길어. 방학 때도 학교 가고 싶은 생각이 조금 들 정도야. 그리고 방학기간도 길어. 네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도 할 수 있어.
교사가 도와줄 거야.(연두, 사랑해요!)
친구, 형들, 교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내가 낯을 가려서,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다가 못한 적이 많아. 장난도 막 치고 싶은데, 아직도 왠지 부끄러워서 못할 때가 있거든. 해도 될지 망설여져.
그래도 같이 있어서 정말 좋아.
개인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프로젝트를 잘 선택한 거 같아요. 꾸준히 그려서 실력이 좀 늘어난 거 같아요.
며칠 전에 그림 의뢰를 받았는데, 사진을 보고 그리느라 시간이 꽤 걸렸어요. 사람의 전신 비율을 맞추는 게 특히 어려웠거든요. 그래도 의뢰한 분들이 제 그림을 좋아해 주셔서 뿌듯했어요.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서 기뻤어요.
다음에 또 그림을 의뢰받아서 그릴 생각이 있나요?
아니요.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엄마, 아빠 고마워요! 그림이 잘 안 그려질 때마다 짜증 냈던 거 미안해요.
엄마는 도마뱀을 처음에는 싫어하셨는데 이제는 귀엽다고 해주셔서 고마워요.
엄마의 잔소리가 줄어 들어서 좋아요. 점점 더 괜찮은 청소년이 돼 볼게요.
마지막으로, 나에게 재미난 학교란?
나에게 재미난 학교는 ‘트램펄린’ 같아요. 힘들어도 뛰면 뛸수록 재미있고 신나요!
아이는 자기 속도로,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교사들에게 평어로 말하겠다는 작은 다짐, 개인 프로젝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준비하겠다는 말에 한시름 놓인다.
“한결아, 적응하느라 힘들었지? 앞으로의 3년도 금방 지나갈 거야.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우리 즐겁게 잘 지내보자.”
이 말은 아이에게 전하는 응원이자,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