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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님은 이사 가기 싫다고 하셨어 by 완자

2부: 아싸, 재미난학교 이야기

by B급 사피엔스

01. 화려하지 않은 고백.


‘띵동! 땡! 땡! 띵동!’


저녁시간만 되면 아이의 노트북에서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소리다. 일명 ‘띵동땡공격’. 아이의 학원 숙제하는 소리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땡공격’에 가깝다.


국공립초등학교를 다닌 아이는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영어학원과 수학학원을 다니며 학원숙제로 괴로워하며 지냈다. 하지만 학원에 가야만 친구들과 잘잘한 수다라도 떨 수 있는 지금의 교육환경은 아이가 학원을 끊는 것조차 주저하게 만든다. 이미 학원은 지식이 아닌 사교의 장이 되어 버렸다. 아이에게 학원은 사교의 장이므로 놀랍지만 숙제는 필수항목이 아니다. 시작점부터 부모와 아이의 견해가 전혀 다르게 출발하는 것이다.


부모는 요즘은 어떤 학원의 선생님이 바뀌었으며 그 선생님의 이력은 어떻고 어떤 커리큘럼으로 운영하고 있는지. 강남의 유명한 학원이 이 동네에 지점을 냈는데 역시나 괜찮다던 지. 아니면 소문만 못하다던지 최대한 안테나를 세워 그 안에서 내 아이에게 맞을만한 최상의 조합을 찾아 학원에 보낸다. 초등 저학년이 끝나가면 학군지로 이사를 갈지 아니면 살던 곳에 남아서 계속 지낼지를 고민하고 초등 고학년이 되면 동네 보습학원에서 대형학원으로 넘어간다. 정답은 알 수 없지만 구전처럼 내려와 모두가 읊을 수 있는 과정들을 거친다.

키즈 카페에서 미끄럼틀 태우고 볼을 날려주며 깔깔 웃던 시기는 지나고 본격적인 입시 열차에 탑승하는 시기인 것이다.


집 앞 동네 보습학원을 계속 다니던 아이의 친구들이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하나 둘 이사를 가거나 대형학원으로 옮겨갔다. 아이는 숙제는 하지 않아도 친구들과의 수다에 집착하며 당당히 학원 끊기를 거부했다. 학원이 사교의 장이 된 것도 나에게는 고민스러웠지만 더 큰 고민거리는 따로 있었다. 초등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선행학습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아이가 숙제를 하는 소리, 즉, 땡! 띵동! 땡! 땡! 띵동! 땡!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1형식 문장, 2형식 문장, 직접 의문문, 간접 의문문 등 내가 영문법을 공부할 때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간 것 같지 않은 교재들이 나를 더 고민스럽게 했다. 세상은 이렇게 변했는데 배우는 내용과 방식이 30년도 지난 지금과 동일하다면 이게 맞는 것일까? 물론 고전이라는 것이 있듯 교과에서도 꼭 다지고 지나가야 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아이의 띵동땡공격 속에서 나는 그러한 고전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아이는 곧 중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고민은 점점 깊어 갔다. 나는 공교육이 아닌 대안 교육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대안학교에 보낸 다는 것은 곧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맹자의 어머니였다면 고민이라는 것이 없었겠지만 나는 귀가 얇고 경솔하기 짝이 없는 인간 아니었던가. 마음을 대안학교로 정하고 나니 지금 사는 곳과는 거리가 있어 이사를 가야만 했다.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동네로 이사를 가는데 아이는 과연 잘 적응하고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주변 환경들을 모두 바꾸면서까지 대안학교에 보낼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아이는 지금 친구들과 헤어져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다시 관계 맺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살던 동네에서 중학교도 진학하기를 원했다.


그러던 와중에 삼각산재미난학교의 3일 겪어보기를 신청했다. 아이가 직접 겪어보기에 참여해 보고 아이가 만족하면 보내자고 한발 물러섰다. 겪어보기를 가는 첫날 아침, 아이는 아침 일찍 그렇게 멀 리까지 꼭 가야 하냐며 투덜대며 집을 나섰다. 억지로 끌려들어 가는 듯한 찌그러진 아이의 얼굴에 나는 애써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어 주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수업은 어땠는지 슬쩍 물어보았다.

“오늘은 형, 누나들이 만든 보드게임을 했어. 좀 어렵긴 했는데 재미있더라구.” 그리고는 나에게 보드게임 규칙을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겪어보기 신청한 다른 친구들도 있었는데 이름은 다 못 외웠어. 내일 다시 한번 물어보고 오려고.” 아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줄줄이 해주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 아이는 별다른 불평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겪어보기 마지막날은 아이와 선생님들의 면담이 있다. 아이는 면담이 떨린다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니 묻지도 않은 말을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지금은 집이 좀 멀지만 2월까지는 가오리역 쪽으로 이사를 올 거니까 학교 다니는 것은 문제가 없어요!”

아이의 말은 현실이 되었고 나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글을 쓰고 있다.






02. 아이엠그라운드 종말선언.


아이네 반 생활교사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입학하고 한참 후이다.


재미난 학교에서는 별칭을 사용하기 때문에 별칭이 아닌 그 사람의 진짜 이름을 알기가 쉽지 않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로 부를 기회가 없다. 처음 별칭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일부 게임회사나 외국계회사에서 부르는 영어이름이 떠올라 ‘나 갑자기 크리스탈 되는 거야? 굳이? 왜?’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다고 정말 수평적인 관계가 되는 거야? 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일단 정해진 모든 규칙에 대해서는 모두 의심하고 보는 성격이다.)


학교 면접을 보면서 교장 호랑이는 별칭은 준비하신 게 있냐고 물었다.

물론 있다. 나의 면접예상 문제였기 때문이다.

면접 전, 남편과 나는 어떤 별칭으로 할지 고민했다. 합격여부도 아직 모르는 학교지만 그래도 성심껏 생각해 보았다. 나를 드러내면서 3년간 계속 불릴 이름이니까 공을 들여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딱 마음에 드는 별칭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이름을 조금 비틀어서 만들어볼까? 아니면 좋아하는 캐릭터이름을 붙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다 보니 그즈음의 나는 아이와 눈만 마주치면 물어뜯고 싸우며 지낸 터라 스산하고 황량해진 마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나의 별칭을 ‘들개’로 정했다.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지금의 나를 정확히 드러내면서 씩씩해 보이는 데다 그래도 일종의 개니까 조금 귀엽지 않아? 라는 자기 위안을 담아. 내가 나를 들개로 칭하는 건 괜찮은데 남이 부르면 조금 싫을지도? 라는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지만 말이다.

면접 때 들개라고 약간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이 점은 들개답지 못했다. 그런 모습 때문인지 모두 참깨의 친구 들깨로 생각해서 그 고소함에 대한 이유를 물으셨다. 나의 답변 후 공기의 흐름이 약간 달라짐을 감지했다. 재빨리 확정은 아니라고 비겁하게 덧붙였다.


학교는 꼭 합격해야 하니까.


‘들개’ 미확정의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인지 ‘당당하게’ 합격했다. 그 후 나는 빛의 속도로 들개에서 완자로 다시 태어났다. 동그랑땡같이 둥글어지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이다.


아이 입학 후 이런저런 모임들 속에서 나는 완자로 살게 되었다. 누구도 나에게 나이나 학번이나 진짜 이름을 묻지 않았다. 별칭 하나로 여러 가지 불필요한 탐색을 줄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위인지 아래인지. 아직 친하지 않으니 언니라고 부르는 건 도리어 어색하다 또는 누구 엄마라고 하면 너무 그 사람 자신이 사라진 것 같지 않아? 등등. 더구나 우리나라에는 모든 족보를 뒤엎는 ‘빠른 년생’이라는 골치 아픈 존재가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저는 완자예요.”라고 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정리되었다.


유레카


아이들 역시 선생님, 다른 학부모들을 별칭으로 부르고 평어를 사용한다. 어느 날 아이의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아이 친구는 초등학교부터 재미난 학교에 다녔던 터라 평어가 어색하지 않다. 밤이 좀 깊어져 아이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고 같이 버스에 올라탔다. 아이 친구는 나에게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완자, 이번 역에서 내릴 거야.’

“이번 신호에 건너야 해. 그냥 뛸까?”

“이번 골목에서 왼쪽이야.”라고 이야기를 건넸다.


누구 엄마 또는 이모라고 불렸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지금은 아이들과 내가 같은 곳에 발을 딛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한 명은 한 계단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면서 이야기하거나 또 한 명은 밑에서 올려다보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처음 내가 가졌던 짙은 의심들을 하나씩 하나씩 걷어 내가고 있는 중이다.






03. 가시밭에 사랑을.


‘소음레벨이 90dB에 다다랐습니다. 약 30분 동안 이 레벨이 노출되면 일시적인 청각 손실을 입을 수 있습니다.’


봄 여행 중 중학교 생활교사 연두의 애플워치에 뜬 메시지이다.


연두는 우리 반에서 가장 시끄러운 아이들 옆방에서 자는 극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아이들 중 하나는 우리 집 아이다. 진심으로 면목이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연두의 귀에서 피가 나는지 입에서 불이 나오는지 모른척하며 마냥 즐겁게만 지내고 있다. 연두는 이런 중등아이들을 이렇게 평했다.

‘모두 착하지만 시끄럽다.’ 심지어 ‘아이들과 여행 후 아이들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고. 반의법인가?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예전과는 달리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존경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고 어떤 곳에서는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실에 절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삼각산재미난학교에서의 선생님이란 때로는 내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모르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는 조금 어른 같은 친구이기도 하고 같이 웃고 농담을 주고받는 찐친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6년 간 국공립학교를 다녔던 아이는 연두썜이라는 호칭에서 연두라고 부르기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정말 무섭도록 빠르게 적응한다.


중학생이라고는 해도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여행을 가는 것에 걱정이 많았던 아이는 봄여행을 앞두고 연두에게 자신의 이런 불안한 마음을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일반 학교에서 아이가 선생님과 서로 웃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먼저 찾게 되는 존재였던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현실이 나는 특별히 슬프거나 이상하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나에게 역시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늘 그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랬던 기억이 있다. 이미 학교는 지식을 배우는 의미에서도 학원에게 밀려버렸고 사회성을 기른다는 명목을 붙이기엔 학폭문제가 너무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타성적으로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으니까 모두 학교라는 ‘건물’에 아침에는 등교를 하고 오후가 되면 귀가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든다.


대안교육기관은 현실적으로 많은 벽이 있다. 대안교육법이 제정되었어도 교육부의 인가를 받지 않은 대안학교의 공통적인 문제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교육부의 통제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커리큘럼의 자율성을 얻은 대신 정부의 보조금이 적어진다. 이는 교사의 처우로 이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굳은 신념을 갖고 일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며 거꾸로 말하면 신념을 꺾이기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교육부의 인가를 받으면 재정적으로는 여유로워지지만 하고 싶은 교육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어려운 부분이다. 그렇다고 내부에서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공론화하는 순간 이는 수업료 인상으로 직결될 수 있으니 쉽게 꺼낼 수 있는 화두도 아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환경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우리 교사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신념을 의심할 여지없이 지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어도 버거울 수업준비를 매 학기 어떻게 다르게 풀어갈지를 고민하며, 여행 전에는 사전답사를 가서 하루 2만보씩 걷고 돌아오기도 한다. 사진을 찍을 때는 갯벌 바닥일지라도 최상의 각도를 찾아 누워서 진흙을 묻히더라도 진심으로 아이들 사진을 찍어준다. 어떻게 들으면 하찮은 고민거리도 웃지 않고 정성을 다해 상담해주며 잘못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따끔하게 이야기도 해주는 마음들을 지켜냈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욱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개개인의 고민으로 끝나지 않고 보다 정당한 보상으로 실현되어 흔들림 없이 우리 아이들의 곁을 지켜주는 존재이길 바라본다.






04.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나는 감자튀김으로 할 까봐.”


내 말을 들은 남편이 활짝 웃는다. 아무래도 맥도날드 아저씨 옆은 감자튀김이 있어야 완성형 아니겠는가. 햄버거가 아닌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감자튀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기활동 시간에 맥도날드 아저씨 복장으로 아이들에게 풍선아트 수업을 했다. 그 복장으로 꽤나 아이들과 친해진 남편은 어깨가 으쓱해져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설명회를 한다고 하니 시간이 되는 분들은 참석해 달라는 공지글이 올라왔다. 남편은 풍선을 주문해 달라며 맥도날드 아저씨 복장을 또 한 번 입겠다고 했다. 나는 학교홍보인지 패스트푸드점 홍보인지 분간은 안 가지만 아이들이 좋아해 줄 것이라 믿고 그 옆에 감자튀김 복장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학부모님들이 학교 설명을 들을 때 따로 체험활동을 할 아이들을 위해 펄러비즈와 도안들, 다리미도 함께 챙겼다. 이렇게 부부가 이상한 코스프레를 하며 학교행사에 참여하니 꽤나 적극적인 성격으로 비칠 수 있다. 미리 말해 두자면 내적 갈등이 상당히 심했다. 남편에게는 이런저런 복장을 입으라 권하고 나는 평상복 차림으로 참여한다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감자튀김복장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의 쑥스러움과 나는 뒤로 빠지고 평상복으로 서있는 비겁함을 저울질하다 결국 ‘나도 감튀가 되자’. 고 마음먹었다.


남편에게 입힐 화려한 삐에로 복장 찾던 화면 위 손가락은 좀 덜 창피한 감자튀김복장을 찾는 손가락으로 변신했다.

학교설명회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친구들이 왔다. 물론 입학까지 이어지면 좋겠지만 학교의 좋은 분위기와 재미있게 놀다 갔다라는 신나는 경험이 아이들의 어딘가 한 구석에 자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 역시 입학 전에는 아무래도 학교의 규모가 작다 보니 학부모일이 많지 않을까? 라는 염려가 있었다. 면접 때는 고개를 크게 끄떡이며 마을 속 학교공동체라는 부분에도 공감했지만 낯선 곳에서 모르는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있을까? 내 마음속에서 계속 물음표를 던지고 있었다. 합격통지 이후 입학 전이지만 학부모자격으로 카페에 가입해 여러 글들을 볼 수 있었다. 행사에 도움을 줄 사람을 구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나를 지칭하지 않지만 손을 보태 주면 좋겠다는 글 하나하나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직 이사 전이었고 학교 가까이 산다고 해도 맞벌이라 시간 내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학부모 오리엔테이션을 위한 단톡방이 생기고, 중학생 학부모 모임 카톡방이 만들어지고 또 중1 학부모 카톡방이 만들어졌다. 나는 개인톡은 대화가 끝나면 모두 삭제해 버린다. 가족 단톡방 정도만 남기고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간첩이냐 묻곤 한다. (간첩은 텔레그램을 쓰지 않을까 싶지만) 그런 나의 핸드폰에 단톡방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처음에는 카톡창이나 네이버 카페, 사람들의 대화 여기저기서 들리는 단어부터 낯설었다. 열음식, 승급식, 2각산, 4각산, 도서관, 재미난카페 등등. 모두가 선명하게 발음하는 단어들이 나에게는 그저 뿌옇고 흐릿한 음으로 들려 귀 안까지 닿지 않았다. 지내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렇게 생소할 수가 없었다. 학교일은 많다. 보이는 것이 모두 일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 내가 감자튀김 옷을 입고 다른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를 안심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학교설명회에는 햄버거와 콜라가 섭외되어 있다.

이 글을 읽고 혹시 맥도날드 완전체를 보시고 싶다면 학교설명회에 꼭 한번 와보시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쩌면 우리가 내년에 또는 언젠가 감자튀김복장을 벗고 평상복으로 만나 이야기 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






05. 텐트 밖도 재미난-


‘요알못’인 나는 오랜 기간 평일은 친정 엄마께 주말은 남편에게 요리를 ‘맡겨왔다’.

‘요알못’이라는 신조어의 등장이 나를 얼마나 구원해 주었는지 모른다. 그전까지는 여러 사람에게 나는 요리도 ‘하지 않는’ 다소 의무감이 결여된 인간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가까이 사는 친정 엄마가 있다니 전생에 꽤나 좋은 일을 했을 거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주말에는 “남편이 밥을 한다니 진짜 복을 타고났구나.”라고 남의 속도 모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렇게 나는 주방에서 요리를 제외한 식사 전 세팅, 설거지, 뒷정리, 음식물쓰레기 버리기 등을 담당하며 나름대로 ‘그늘진 곳’에서 묵묵히 내 역할을 하며 지내왔다. 그러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갑자기 삼각산산재미난 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가족은 오랜 기간 살던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이의 학교 적응이나 나와 남편의 출퇴근 등등 여러 가지 문제가 떠올랐지만 나의 머릿속에 크게 자리한 부분 중의 하나는 ‘저녁밥 어떻게 하지?’였다.


시간적으로는 남편보다 나의 퇴근 시간이 빠르기 때문에 나는 물리적으로 저녁밥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친정엄마의 각종 반찬들이나 다양한 밀키트들도 물론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장터’의 존재가 새로운 마을에서 나의 밥걱정을 많이 덜어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단체 채팅창인 ‘장터’ 방에는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학부모나 교사가 아닌 사람이면 누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심지어 대부분 별칭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더욱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아는 사람들의 아는 사람들로 엮인 이 공간의 사람들은 그 엮인 인연만으로 반찬도 나누고, 고향에서 수확한 좋은 작물들을 내놓기도 한다. 마을의 좋은 프로그램을 안내해 주기도 하고 쓰던 물건들을 나눔 하기도 한다. 먹을 것의 경우에는 수량에 제한이 있다 보니 티켓팅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 종종 연출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서로의 유쾌함과 마음씀으로 즐거운 결말이 나곤 한다.

이런 여러 가지 도움으로 요알못은 오늘 저녁도 열심히 밥을 하고 있다. 반찬세트가 올라오자마자 티켓팅에 성공하여 정말 밥만 하고 그럴듯하게 한 상 차려본다. 오늘 밥에는 잡곡도 섞어 넣어 이 밥상은 날림 아니냐는 공격에 대해 수줍게 방어해 본다.


또 한 가지 이곳에서는 ‘당근’을 할 필요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전에 살던 동네에서는 필요 없어진 책, 의류, 가구 등등을 소소하게 당근에서 사고팔고 했었다. 하지만 장터방에는 이런 물건 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눔으로 내어 준다. 그동안 당근으로 소소하게 용돈을 벌며 당근 온도를 올려가던 재미를 붙였던 나는 갑자기 나의 당근 온도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당근앱을 사용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이왕이면 이곳에서 내가 받은 온기만큼 나누는 마음도 가꿔보고 싶다라는 개인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처음에 장터방에 초대될 때 “알림이 많이 울릴 수 있으니 꺼두시는 것도 추천드려요.”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나는 절대 알림을 끌 수 없다.


오늘도 나는 우리 집 밥상을 (수줍게) 지켜내야 하기 때문에.






06. 오늘도 맑음.


우리 아이는 삼각산재미난학교를 입학하기 전 국공립초등학교를 6년 다녔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학부모 첫 모임이 있었다. 23명의 엄마가 전원 참석했다. 초등1학년의 위엄이다. 첫째가 입학한 엄마들은 대부분 긴장한 얼굴이고 둘째 또는 셋째인 엄마들은 다소 여유가 있어 보였다. 우리 아이는 집 근처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고 원래 낯을 좀 가리는 편인 나는 딱히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어 주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맥주도 한 잔씩 마시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아이이름, 엄마이름, 엄마나이, 연락처를 쓰는 종이가 한 바퀴 돌았다. 이로써 서로의 호칭이 정리되었다. 누구 엄마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누구 엄마는 나랑 동갑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종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일명 족보파괴자 ‘빠른 년생’이므로 한 살을 올려서 적어야 하나 고민했다. (마흔이 넘어서도 내가 이렇게 나이에 집착하며 살 줄은 몰랐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학교에 대한 여러 정보가 많았다. 다른 반은 ‘클래스팅’이라는 앱으로 매일 담임선생님이 사진을 올려 주신다며 하루에도 몇 십장씩 사진이 올라온다고 했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처럼 클래스팅을 안 하는 선생님은 이 학교에 한 분도 안 계신다고. ‘클래스팅’이라는 앱의 존재도 몰랐던 나는 옆의 앉은 엄마에게 물었다.


“담임선생님한테 한번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 반도 만들어달라고.”


그 말을 들은 주변 엄마들이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나만 몰랐지 우리 반은 꽤 유명한 말하자면 꽝인 제비를 뽑은 셈이었다. 안 그래도 재잘재잘 오늘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는 타입이 아닌 아이인지라 학교에서 무엇을 하는지 재미는 있는지 친구는 잘 사귀고 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다른 반 사진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심술이 났다. 왜 우리 반만 사진을 안 올려 주시는 거야? 바로 다음날 나는 선생님에게 문자를 한통 보내 보았다. 답장은 이랬다. ‘우리 반은 클래스팅을 하지 않습니다. USB를 보내주시면 사진은 보내 드리겠습니다.’ 나는 바로 아이 편에 USB를 들려 보냈다.


아이 편에 돌아온 USB를 받아 들고 적은 양의 사진이지만 꽤나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선생님은 USB을 보내지 않아도 가끔씩 나에게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보내주시곤 했다. 그 적은 정보로 최대한 학교 생활을 유추하며 지냈다. 후에 선생님의 이야기는 그랬다. 사진을 올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학부모도 있고 왜 우리 아이는 사진이 이렇게 적나라고 이야기하는 학부모도 있다고. 선생님입장에서는 꽤나 신경 쓰이는 일이긴 할 것 같았다.


재미난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네이버카페만 들어가도 특히 초등 저학년은 2주에 한 번씩은 수업하는 모습, 나들이 모습 등등 글 하나에 100개가 넘는 사진들과 동영상이 올라온다. 카페멤버의 경우 모든 학년의 게시판을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다른 학년들의 나들이 사진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학교에서의 표정과는 사뭇 다른 아이들 표정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주변에 몰랐던 좋은 나들이 장소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하며 열심히 글을 읽고 사진을 보다 보면 나도 가고 싶어져 주말이 바빠진다는 것이 함정이다.


일반 중학교에서는 교사와 아이들의 단체 카톡방에서 학교공지가 이루어져 부모가 모르고 지나가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재미난학교 중등의 경우, 네이버카페에 공지사항이 올라오기도 하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직접 자신이 쓴 글을 올리기도 하기 때문에 수업내용뿐만 아니라 글을 쓴 아이의 캐릭터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의 글들을 보고 있으면 학교에서의 생활도 알 수 있고 아이들 관계를 그려보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더구나 한 달에 한 번씩 학부모와 생활교사가 함께 하는 반모임이 있다. 네이버카페를 꼼꼼하게 보지 않는다고 해도 반모임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학교 생활을 알 수 있다. 한 달 동안의 수업내용과 잘잘한 에피소드까지 이야기해 주기 때문에 솔직히 학교생활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림체는 졸라맨이다.)


우스갯소리로 북한이 남침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중2가 무서워서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중학생들의 일상적 사진이나 그들이 직접 쓴 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부모로서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초등학교 때 도대체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는 걸까 궁금해서 친한 엄마와 서로 한탄하며 농담으로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우리 애들 필통에 볼펜형으로 생긴 녹음기 넣어서 보내 볼까?”

“모르는 볼펜이 필통에 들어있다고 담임선생님한테 가져가면 우린 끝장이야.”


지금은 아이가 학교에 가도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다.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잘 지내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가 궁금하고 다소 불안해했던 이유는 아마도 이런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미난 학교에서는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서로 잘 풀어낼 친구들과 선생님이 있다고 믿고 있다. 스스로 배우는 과정은 아직 아이가 할 몫이 남아있지만 따뜻한 돌봄만큼은 넘치게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왜 이제야 재미난학교에 왔냐고 묻는다.


답은 하나다.


그러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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