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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체험보고서 by 쪼코

2부: 아싸, 재미난학교 이야기

by B급 사피엔스

01. 나의 북극성을 찾아.


엄마, 나 내일 물고기 잡으러 길동이랑 백련사 계곡 가도 돼? 악어가 같이 가준대.


물고기? 물고기를 왜 잡아? 집에 데리고 온다고?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였다. 아이는 초3. 집합 인원 제한으로 반 아이들이 모두 모여 함께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생활 교사 반디는 개인 프로젝트와 친구 프로젝트를 기획해 소규모 수업을 했다. 아이는 잠을 잘 자고 싶다며 개인 프로젝트 주제를 ‘잠’으로 정했다. 길동이의 프로젝트는 ‘어류’. 둘은 친구 프로젝트로 ‘물고기의 잠’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물고기를 집에 데리고 와서 관찰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게다. 개인 프로젝트를 하며 본인 자는 모습을 촬영해 아침에 확인했는데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망설였다. 야생에서 살던 물고기를 잡아 어항에 넣고 촬영을 한다? 난 파충류, 어류 등이 무섭다. 정말 무섭다. 책등에 파충류나 어류 그림이 있는 책을 뒤집어 꽂아 둘 정도다. 단박에 거절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어정쩡하게 걱정을 말했다. 물고기가 어항에서 살 수 있을지. 혹시 죽어가는 과정을 촬영하게 되는 건 아닐지. 고향(?)에서 잘 살고 있는 생명을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한 우려도 전했다. 아이는 물고기를 계곡물에 넣어 데리고 왔다가 하룻밤만 자고 다시 풀어준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끄응. 자유로운 배움을 지지 응원하는 부모가 되기 위해 힘을 내본다.


다행히 물고기들은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계곡으로 돌아갔다.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고, 한자리에서 가만히 떠서 잔다. 인간의 잠과 비교하면 굉장히 짧은 잠을 잔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책과 과학 유튜브 등을 통해 이유를 찾았다. 재미난 교사 반디는 9살 소년들과 이 과정을 끈기 있게 해냈다.


벌써 4년 전이다. 중1이 된 아이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알게 된 지식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자신의 욕구를 살피고, 욕구에서 배움을 시작하고, 조직하고 확장하는 방법을 익혔으며 지금도 그러하고 있다. 현재 큰아이는 코딩에 관심이 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사다 들여다보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 공부한다. 그리고 마을에 살고 있는 코딩 전문가를 만나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조금 속도를 내보는 게 어떨까 싶어 짜여진 커리큘럼이 있는 학원을 다닐지 한 번씩 제안해 본다. 아이는 자신의 방법으로 해보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겠다고 부드럽게 거절한다.


그해 7살이던 작은 아이는 형들의 프로젝트 과정을 보며 학교에 입학하면 반드시 물고기 프로젝트를 할 것이라 다짐했었다. 4학년이 된 지금. 물고기 프로젝트는 잊은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는 어깨너머로 자유로운 배움을 ‘선행 학습’한 재미난 영재. 지난 3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재미난에서 자신의 속도와 깊이, 넓이를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02. 불편한 여행.


경험해 봐야 아는 일이 있다.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를 해줘도, 책을 파고들어도 모르는 일이 있다.


스스로 기획해 각자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여행을 해요.


학교 설명회였다. 교실 한쪽에 아이들 여행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공간을 소개하던 교사는 위의 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 강조에는 뿌듯함과 자신감, 자랑 같은 감정이 있었는데, 같은 무게로 호응을 하지 못했다. 몰랐기 때문이다. 여행은 시간표를 아이들이 결정한다거나 자기활동 시간이 종일 있다거나 하는 교육과정에 비해 평범해 보였다.


재미난은 봄, 여름, 겨울 1년에 3번 여행을 간다. 입학 후 큰 아이는 19번-초등과정 18번, 중등과정 2번, 작은 아이는 11번의 여행을 다녀왔다. 가깝게는 남양주, 멀게는 여수, 제주도까지.


여행지 결정 과정은 치열하다. 각자 가고 싶은 여행지 선택을 위해 아이들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친구들을 설득한다. 여행지가 결정되면 그때부터는 여행 이름, 목표, 프로그램, 조등을 짠다. 아이들은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 6시 반에 일어나는 수고를 계획하고 버스와 버스 사이에 비는 시간에 무엇을 할지 준비한다. 식당을 예약하기도 하는데, 주변에 식당이 없는 여행지라면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 칼과 불이 무서우면 빵과 시리얼로 식사를 대신한다. 여행 후 먹고살려면 요리를 할 줄 알아야겠다며 다음 학기 수업으로 요리 수업을 개설하기도 하니 여행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대중교통을 여러 번 갈아타며 이동해야 하므로 캐리어는 금지. 제 몸만한 크기의 가방을 메고 여행을 한다. 학년이 올라가면 가방이 좀 작아지나 싶었는데 어림도 없다. 몸이 커진 만큼 옷도 커졌다.


설명회 때 교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이제야 들린다.


스스로 여행을 기획해

=스스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길어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며

각자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고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즐길 줄 아는

여행을 해요.

=배움을 해요.


2016년 내게 재미난 여행을 자랑하던 교사는 2023년 큰 아이의 6학년 생활 교사가 되어 재미난 역사상 제일 긴 14박 15일 여행을 다녀왔다. 졸업 여행이었다. 아이는 혼자 서울 여행을 하면서 탕후루를 사 먹고, 친구들과 자전거로 두물머리를 왕복한 후,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 한라산을 오르고, 성산일출봉에 다녀왔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이는 ‘14박 15일은 좀 길더라.'며 웃었다. 그래, 내게도 길더라. 아들. 보고 싶었어.






03. 방과 후에도 재미난.


아이 둘을 재미난학교도서관에서 키웠다. 집에 도착하면 6시가 넘는 시간인데 다행히 도서관 돌봄이 7시까지. 아이들은 방과 후 도서관에서 놀고, 도서관에서 간식을 먹고, 도서관 사서 교사와 돌봄 교사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방학에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안전한 공간에서 즐겁게 지냈고, 나는 걱정 없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중1. 초4. 작년까지 도서관 붙박이었던 우리 집 녀석들은 이제 도서관에 잘 가지 않는다. 큰 아이는 혼자 마을을 돌아다니고,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즐긴다. 작은 아이는 형에게 기대 큰 아이보다 일찍 도서관에서 독립했다. 그래서 요즘 나는 방과 후 도서관 소식을 학교 카페에 올라오는 글로 접한다.


도서관은 여전해 보인다. 아이들은 매 순간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하며 놀지 궁리한다. 만들고 그리고 보드게임을 한다. 종이비행기에 꽂혀서 종일 비행기를 날리는 날도 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놀러 온 형아, 누나를 놀이기구 삼아 놀기도 한다. 바닥에 깔아 놓은 알집 매트는 남극 기지였다 순식간에 우주선이 된다. 계단에 펼치면 세상 재밌는 미끄럼틀이 만들어진다. 그래도 명색이 도서관. 책이 사방에 있다. 어느 순간 고요해져 모두가 책을 읽기도 한다.


아이들은 크고 화려한 장난감이 없어도, 넓고 그럴듯한 운동장이 없어도 잘 논다. 올여름 전기 문제로 에어컨이 시원하지 않았던 날이 있었다. 재미난 어린이들은 이날 찜질방 놀이를 했다. 그야말로 놀이 천재.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돌봄 교사 무궁화는 재미난 놀이 천재들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아이들의 기상천외한 놀이를 말리지 않고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고민하고 도와준다. 도둑게, 누에나방 애벌레, 장수풍뎅이도 아이들과 함께 키운다. 도둑게가 더위로 힘들까 싶어 금요일 퇴근 때 데리고 갔다 월요일에 다시 데리고 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이들 세계도 현실이니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다. 아이들은 종종 싸우고, 사과하고, 삐지고, 슬프다. 도서관이 답답할 때도 있다. 그럴 땐 편의점 쇼핑을 하거나 MSG 가득 떡볶이를 먹으러 나오기도 한다. 각자 용돈을 들고 와 서로 사주기도 하고, 얻어먹기도 하는데, 돈 문제는 어른이든, 아이든 쉽지 않은 모양인지 갈등 상황이 생기곤 한다. 대부분의 학년이 이 문제로 우왕좌왕 시기를 겪는다.


1, 2학년은 고학년이나 어른들이 동행해야 도서관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언니 형들이 동생들 몰래 슬그머니 도망가다 눈물 바람이 나는 것도 꼭 한 번씩은 있는 일. 학교 안에서는 스마트폰 사용이 금지이므로 아이들은 때때로 학교 밖 담벼락에 모여 학교 와이파이를 쓴다. 재미난 어른들이라면 한 번쯤은 봤을 풍경. 흐린 눈으로 지나가준다. 하지만 재미난에 어물쩡 넘어가는 일은 잘 없다. 학교 담장은 학교안인가, 밖인가’는 결국 학생회 안건으로 올라와 학생들 스스로 정비를 하더라.


오늘도 놀이로, 다툼으로, 웃음으로, 눈물로 소란스러울 재미난 도서관. 다음 주엔 간식을 준비해 들려야겠다.






04. 학사는 베이스캠프일 뿐.


재미난 학사를 보고 당황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대안학교라고 하면 학사가 산과 들, 계곡에 둘러싸여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난은 도시형 대안학교. 서울 끄트머리라고는 하나 그래도 서울이다. 집값, 땅값이 만만치 않다. 현재 학사는 유치원이 있던 ‘건물’과 주택가 2층 ‘구옥’이다. 다행히 산과 계곡은 가까이 있으나 학사는 작디작다.


하지만 재미난의 교육은 마을 곳곳에서 이루어지기에 작은 학사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학교 근처 청소년 수련관에 가서 몸놀이를 하고, 윤극영 -푸른 하늘 은하수~하얀 쪽배에~그 노래를 만드신-가옥 다락방에 가서 맘껏 수다를 떤다. 마을 텃밭에서 계절을 만지고, 계곡에서 과학 실험을 한다. 마을 미디어 강북 FM에 가서 미디어 제작을 체험하고, 학교 근처 시장에서 생활을 배운다.


뿐만 아니다. 재미난의 교육 과정은 학교와 책상에만 있지 않다. 재미난 모든 학년은 일주일에 한 번 나들이를 간다. 둘레길로, 계곡으로, 수영장으로, 놀이터로, 박물관으로, 과학관으로, 성교육센터로, 에코 센터로. 여행과 마찬가지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큰아이 5학년 때였다. 혼자서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다니는 아이들이 생겼다. 신중한 큰아이는 그때까지도 혼자 다니지 않았다. 먼 곳으로 가는 나들이는 보통 집에서 버스 6 정류장 거리에 있는 수유역에서 모여 출발한다. 매번 출근길에 데려다줘야 했다.


5학년 생활교사 하늬는 어른 도움 없이 아이들끼리 오가는 나들이를 계획했다. 처음엔 각자집에서 수유역까지. 혼자 다닐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짝지어줬다. 하늬가 직접 아이의 집 앞까지 가서 동행하기도 했다.


아이들 전원이 수유역까지 자신을 보이자 다음엔 각자 집에서 국립중앙박물관까지로 확장했다. 아이들은 중간중간 교사들이 만들어 놓은 미션을 해결하며 국립중앙박물관까지 갔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수유역까지. 다시 수유역에서 이촌역까지. 드디어 도착한 국립중앙박물관 사물함엔 1단계 미션 성공 선물이 있었으니. 마이쭈와 초콜릿이었다. 그리고 다시 2단계 미션 시작. 그날 저녁 아이는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모험담을 늘어놓았다.


올해 4학년인 작은 아이도 얼마 전부터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엊그제 나들이 날이었다. 근무 중인데 페이스톡이 걸려 왔다. “엄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버스를 잘못 탔다. 큰아이 때는 없던 일이다. 아이 실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이 상황을 내가 놓친 적이 없다. 둘째는 발로 키운다더니. 둘째 특유의 자신만만함을 믿었고, 방심했다.


저녁에 작은 아이를 만나자마자 꼭 끌어안아줬다. 무서웠지? 아이는 조금 울었다. 그리고 큰 아이의 마이쭈 미션 때보다 더 상기된 모습으로 모험담을 풀어놓았다. 이 날 아이의 모습을 보며 소년의 동의어는 모험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험의 또 다른 이름은 실수와 실패라는 말도.


재미난 학사는 이런 소년 모험가들의 베이스캠프일 뿐이지 싶다. 재미난 소년 모험가들은 베이스캠프를 중심으로 마을 이곳저곳으로, 또 마을 밖으로 나들이를 다니며 세상 공부를 한다. 안전하게 실수하고, 실패하고, 일어선다. 다시 모험을 떠난다.






05. 말 놓을 용기.


재미난 사람들은 아이들과 수평적 관계를 맺고, 소통하기 위해 평어를 사용한다.


“연두~나 잠깐 나갔다 올게."

"백호~어디가?"

"해피~안녕!"


재미난 어른들은 스스로 지은 별칭을 쓴다. 연두, 백호, 해피는 실제 재미난 교사. 아이들은 마을 어른, 교사들과 평어로 자연스럽게 소통한다.


재미난 학교와 마을은 올해 20주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지키고 가꿔왔던 것을 돌아보고, 정비하고, 서로 축하하고 또 응원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의 독특한 평어 문화를 검토하는 일을 포함해서.


영화 <투모로우>를 인상 깊게 보았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재앙과 가족애를 다룬 영화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들은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는 마지막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의 아들 일행을 태운 헬기가 높이 뜬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하다 현실로 돌아오며 느긋해지려는 순간이었다. 카메라가 폐허가 된 뉴욕을 비출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건물 옥상 곳곳에서 생존자들이 나타났다. 아. 주인공 일행만 생존한 게 아니었다. 곳곳에 자신들의 서사로 생존에 성공한 사람들이 있었다.


작년 여름. <말 놓을 용기>를 보자마자 이 장면이 떠올랐다. 평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대안학교와 학교를 품고 있는 마을공동체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공동체가 있다니! 책을 내다니! 숨도 쉬지 않고, 책을 주문하고, 마을 책동무들에게 알리고, 책모임을 열었다.


저자는 평어를 ‘<이름 호칭+반말>로 이루어진 새로운 한국말’로 규정한다. 반말의 구조를 사용하지만 반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 한국말에는 이제 반말과 존댓말이 있고 또한 평어가 있다"라고 선언한다. 평어는 반말과는 달리 한쪽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기에 수평적 관계를 전제한다. 속이 후련하다. 그동안 평어 문화를 실천해 오면서 입에 맴돌았던 옹알이가 드디어 말이 된 느낌.


앞서 이야기한 대로 재미난은 아이들과 '수평적 관계'를 만들기 위해 평어를 사용한다. 저자도 평어 사용을 존비어체계에서 만들어진 '관계와 문화를 바꾸는 실전 평어 모험'으로 규정한다.


'수평적 관계'의 수평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될까? 수평은 고정될 수 있는 것일까? 이성민은 다른 책에서 수평적 관계를 위한 평어 사용 설명을 위해 자전거 타기를 예로 든다. 자전거 타기를 상상해 보라. 왼쪽 발을 구른다. 그리고 적당한 리듬으로 오른쪽 발을 구른다. 그렇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은 쉬지 않고 리듬감 있게 움직여야 한다.


수평적 관계란 자전거 타기와 같다. 매 순간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관계이다. 수직적인 관계와 친밀한 무례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수평적 관계를 위한 평어 사용도 마찬가지. 평어는 존비어체계가 강화하고 있는 수직적 관계와 거리를 두고, 반말의 구조 때문에 빠질 수 있는 반말의 무례를 경계해야 한다. 발을 계속 굴러야 한다.


가끔 오랜 습관으로 어른의 권위를 써서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 하다 아이들에게 걸려 민망할 때가 있다. 반성한다. 반말의 무례는 아이들보다 어른인 내 쪽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이다. 그리고 자주 고맙다. 실수에 민망해하며 반성할 수 있는 어른으로 살 수 있어서.






06. 엄마는 마법사.


삼각산재미난학교는 부모들이 학교 운영을 한다. 국공립학교에도 있는 학부모회뿐 아니라, 여러 상설위원회와 부설기관이 있다. 나는 재미난도서관 관장 역할을 맡고 있다. 자천이었다. 사람들에겐 나의 꿈 중 하나가 마흔 살에 청소년 도서관 관장이 되는 것이었노라고, 조금 늦었지만 꿈을 이뤘노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과장 없이 사실이다.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은 이유 하나가 더 있는데, 그즈음 난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했다. 거의 20년 동안 한 직장에 근무하며 내 것이라 여기고 만들어 온 이야기가 내 것이 아니라는 슬픔. 이야기의 방향을 내가 결정하지 못하는 좌절, 내 언어로 내 마음대로 세상에 떠들 수 없다는 허무. 내 몸을 관통해 생산된, 내 언어로 조직할 수 있는 삶이 간절했다. 그래서 시작했다. 도서관 관장. 요즘 말로 부캐!


방학엔 1박 2일 도서관 캠프를 기획하고 진행했고, 도서관 방학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운영했다. 학기 중에는 도서관 잔치를 준비하고 외부 지원 사업에 응모해 작가와의 대화를 마련했다. 매주 금요일 밤에는 심야도서관 <夜, 재미난>을 열어 마을 어른, 청소년, 어린이와 함께 책을 읽었다. 심야도서관의 시간을 꺼내 나누는 이야기 마당도 벌였다. 책모임을 꾸리고 마을 축제에 참여해 학교 홍보도 했다.


이 모든 걸 혼자? 그럴 리가. 불가능하다. 재미난도서관은 도서관마법사라는 부모와 교사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있다. 내내 도서관마법사와 함께 했다.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강하게 연대하며 1년을 지냈다. 의견이 다를 때도, 같을 때도 서로의 선의를 확신하니 담백하게 다정할 수 있었다. 학교를 운영하는 의무와 피곤보다 삶에 가치 있는 이야기를 남겼다는 뿌듯함이 남았다.


지내면서 서로 작은 걱정도 했다. 올해 에너지를 몰빵 하다 지치거나 사라지면 어쩌나. 하지만 걱정하면서도 우린 알고 있다. 오늘 있는 에너지를 나눠 쓴다고 내일용이 남아있는 건 아니다. 오늘 에너지를 힘껏 탕진해야 내일 에너지도 생긴다. 혹시 내 에너지를 다 쓰면 잠깐 업혀 가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쉬어가면 되고. 비인가 대안학교인 재미난은 이렇게 만들어져 왔다, 고 나는 생각한다. 합리적으로 비용과 이익을 계산해 예측가능성을 높여 지어진 공동체가 아니다.


대동천에서 돌을 올려 담을 쌓고,

도서관 미끄럼틀 각도를 재던.

마을공유공간 카페를 열고

마을기업을 기획하던.

한 칸 마켓을 만들고,

공유책장을 운영하던.

귀 얇고, 신중하지 못한, 마음 약한 사람들이 지어온 이야기.


올해, 2024년은 재미난학교 20주년, 재미난도서관 10주년의 해이다. 9년의 역사에 작년 한 해가 더해져 학교도서관 운영을 넘어 마을도서관으로 확장을 꾀할 힘이 만들어졌다. 나는 경험을 기획하고, 기록하는 공간운영자로서의 나를 발견했다. 물론, 관장직을 자천했던 것처럼 자평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슬픔, 좌절, 허무의 색은 아니니 계속 가보기로 한다. 내 몸과 언어로 재미난을 계속 지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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