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내게 남기고 싶은 감사함이 있나요?
“본적 바꾸러 왔는데요.”
구청 직원이 나를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차남이신가 봐요?”
“어.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보통 본적 바꾸러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차남이세요. 장남들은 특유의 내 뿌리, 핏줄 이런 성향이 강해서 본적을 거의 안 바꾸시거든요.”
“아, 네네”
”내 집 장만하셨나 보다” 구청 직원은 나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했다.
“어? 네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보통 차남들이 서울에서 살다가 내 집을 장만하면, 본적을 옮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얼굴에서도 표가 나요. 기분 좋은 표정이”
이런 게 짬밥일까? 중년을 넘겨 보이는 공무원분과 십 년도 전에 나눈 대화다. 세월에서 얻은 공무원의 내공은 실로 대단하다.
요새 ‘영끌’이란 단어처럼, 그때는 ‘전세대란’이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전세보증금이 몇천에서 몇억까지 올랐다는 뉴스도 있었다. 전세 만기가 3개월가량 남았을까? 임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긴장된 손으로 전화를 받은 내게, 임대인은 친절하게도 전세대란이 무슨 뜻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 나게 일깨워 주었다. 대출을 더 받을지, 이사를 갈지 고민이 한 가마니였다.
이사는 녹록지 않았다. 마땅한 매물도 없고, 부동산도 전세대란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전세보증금을 올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전셋값이 매맷값의 80% 비율을 넘어서고, 폭등이란 말들이 쏟아지는 이 시기에 초라한 멘탈을 붙잡고 은행에 쭈그리고 있었다. 상담 순서를 기다리며 뉴스와 상품 전단지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전셋값이 매맷값 80% 비율이면, 여기서 대출을 조금만 더 받을 수 있다면 집을 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집을 산다는 건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별안간 스친 생각이었다.
은행에서는 주택담보대출이라 했다. 금융 지식이 1도 없는 내겐 낯설고 어려운 상담이었다. 가장 황당했던 건 대출서류들을 접수한 후 심사를 받아야 가능 여부가 확인된다는 것이었는데, 대출서류 중에는 매매 계약서도 포함돼 있었다.
“아니, 대출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매매계약은 덜컥 어떻게 해요?”
애매모호한 설명은 은행들의 만국 공통어였다. 그만큼 여러 은행을 발품 판 끝에, 가까스로 만난 세상 친절한 참은행원이 눈높이 교육을 해주었다. 담보대출이 처음인 것 같은데, 승인이 안 될 것 같으면 애초에 창구에서 접수를 하지 않는단다. 창구에서도 나름의 판단 후 심사를 요청하고, 그러면 대부분 승인이 된단다. 그런데도 간혹 거부되는 경우가 있어, 심사를 받아봐야 한다고 안내한단다. 거부되는 경우도 추가로 채무가 발견되거나, 제출 서류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했다. 처음으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만난 순간이었다. 세상 친절한 참은행원에게 칭찬으로 응수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안내를 안 해줄까요?”
“그게요, 아마도 대부분은 이 정도는 다 알고 오신다고 생각할걸요? 또 솔직히 정부 대출은 대행만 하는 거라 실적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되고요.”
참은행원이 모범사원으로 승승장구하길 바라며, 돌아가는 길에 ‘전세대란발 발끈 러시’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세든 매매든 대출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고, 2년마다 한 번씩 보증금은 올려야 되니, 초!장기 적금 드는 셈 치고, 집을 사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고군분투 은행과 부동산을 들락거리며, 집을 구하고, 계약을 하고, 바로 옆 동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찌나 가까웠던지 이사 차는 짐을 싣고 10미터쯤 이동 후 시동을 껐다.
동주민센터에서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는데, 문득 ‘본적’도 바꿀 수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은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 본적으로 남아있어, 바꿀 수 있다면 이번 기회에 바꾸고 싶었다. 혹시나 하고 본적 주소도 옮길 수 있는지 물었다.
“네, 본적 이전은 신분증 가지고 구청으로 가시면 돼요.”
한참 오래전 일이다. 대출금 상환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도록 ‘토닥’이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카드 고지서와 자매지간이라고나 할까? 가끔 뉴스에서 ‘이사 철’이라는 보도가 나오면, 잊고 있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칭찬에 인색한 와이프도 한마디를 건넨다. 평생 동안 칭찬받을 일 하나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