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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Apr 08. 2022

4월 8일 정상태의 하루

무두절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금요일이라서 그런가?”


휘파람까지 불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 내 모습을 본 아내가 물었다. 아내는 자신은 출근하기 싫어서 죽을 것 같은데 내 표정을 보고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 양반이 뭔가를 잘못 먹었나’ 싶은 표정이었다. 


“금요일도 금요일인데 오늘 사무실에 아무도 없거든. 우리 팀에 나랑 최주임만 있어. 무두절인거지”


“그래? 어제 피곤해서 그냥 잠들어서 오빠 이야기 못 들었는데 둘 다 오늘 회사에 없었구나? 그 진과장이랑 벽부장은 어디 갔는데?”


아내가 말하는 진과장과 벽부장은 별명이다. 퇴근을 하고 나와 아내는 서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데 진과장과 벽부장은 그때마다 등장하는 인물 중 일부다. 진과장은 진상 과장의 줄임말로 이름 그대로 여기저기서 진상짓을 해서 붙은 별명이다. 벽부장은 항상 자기 의견만 내세우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 그와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아마 이 사람은 나중에 이사나 사장이 된다면 벽이사, 벽사장이라 불릴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회사의 빌런 중 일부인 진과장과 벽부장이 모두 자리를 비우는 날이었다.


“진과장은 지방으로 출장 가고, 벽부장은 휴가를 쓰셨더라.”


“벽부장이? 한 10년은 휴가를 안 가고 맨날 회사에만 붙어있었다며?”


“약간 과장되기는 했지만 내가 여기 오고 5년 동안 벽부장이 휴가를 간 걸 본 적이 거의 없긴 하지. 중요한 일인지 며칠 전부터 우리한테 자기 휴가 간다고 말하더라고”


“좋겠다. 우리 팀장은 휴가 어디 안 가나…. 나는 오늘 회의만 4개 잡혀있어서 이것만 하다가 집에 올 거 같은데.”


“이따가 칼퇴할 테니까, 당신 회사 근처로 내가 갈게. 밥이나 먹고 가자.”


“알았어. 이따 연락해. 먼저 간다. 여기 앞에 정리 좀 해주고. “


나보다 출근이 빨랐던 아내는 힘없이 가방을 챙기고 현관문을 나섰다. 나는 오늘 조금 여유를 부리면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 내가 어지른 옷방을 정리하고 나도 짐을 챙겨 회사로 향했다. 


회사 앞에 가니 옆팀 송과장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송과장에게 인사하며 아내 몰래 넣어둔 담배를 꺼냈다. 


“상태 씨 오늘 기분 좋은가 봐? 그 현승철 부장님이 오늘 휴가라고 하셨던가?”


현승철 부장은 벽부장의 본명이다. 송과장과 나는 꽤나 친했기 때문에 조금 편한 마음으로 말을 할 수 있었다. 


“네. 오늘 정과장님도 출장 가셨고…. 이른바 무두절입니다.”


“얼씨구. 정과장은 내 동기야. 내가 걔한테 이른다?”


송과장은 내 얼굴을 보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농담을 건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송과장의 장난을 맞장구를 쳐주기 위해 그에게 90도로 인사하는척했다.


“오바하지마. 그래도 오늘 좋겠네. 벽.. 아니 현부장님도 없고.”


송과장은 조용히 주변 눈치를 살피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일은 부족하지 않을 만큼 주고 가셔서 오늘 그것만 해도 하루가 갈 것 같습니다.’


“정대리야 뭐 일 잘하니까 맡기고 간 거지. 진상이는 휴가는 아니니 전화는 해서 또 진상짓 할 수도 있고. 뭐 부장님 안 계신 거 빼곤 그리 무두절이라 할 수도 없네.”


송과장도 자신의 동기인 정과장을 진상이라고 불렀다. 그는 상사, 부하, 동료 가릴 것 없이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아마 회사에 자기 편하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워낙 잘해서 회사에서도 뭐라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뭐 마음은 조금 편합니다. 이따 식사하실까요?”


“오늘은 선약 있어. 그리고 나 바빠 임마. 다음부터는 나랑 밥 먹고 싶으면 번호표 뽑고 기다려.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송과장은 담배를 탁탁 털며 바닥에 던지고 침을 뱉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올라가시죠?”


“그래, 올라가자. 에이고, 우리 두목은 언제 휴가 가려나.”


나는 송과장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가는 송과장에게 다시 한번 인사하고 내 자리로 갔다. 우리 팀은 자리가 빈 곳이 많았다. 벽부장과 진과장말고도 2명의 팀원도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한 명은 진상 과장과 같이 출장을 갔고 한 명은 어제부터 코로나 확진으로 회사를 당분간 못 나오게 되었다. 이 팀에는 나와 최주임. 딱 두 명뿐이었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진과장의 전화였다. 송과장의 말이 맞았었네.


“네 정과장님.”


“어, 정대리. 출근했지? 내 자리에 파란색 명함 하나 있을 거야. 그거 사진 하나 찍어서 보내줘 빨리.”


슬쩍 진과장의 자리를 보니 너저분했다. 정리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의 자리 같았다. 워낙 뭐가 많아서 진과장이 원하는 명함을 찾기가 어려웠다.


“책상 위에 있는 것 맞죠? 지금 바로 안 보여서요. 잠시만요.”


“아니, 거기 책상 위에 내가 뒀는데. 그게 안 보여? 파란색이야. 다른 명함은 하얀색이잖아? 파란색이면 뭐 바로 보이지 않나?”


진과장은 갑자기 나에게 짜증을 냈다. 아니, 니가 책상을 엉망으로 해놓고 찾으라 하면 찾아지겠냐고요. 그리고 진짜 안 보인다고요. 아침부터 2분 통화하고 스트레스받게 하는 것도 진과장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지금 찾고 있어요. 그런데 과장님. 진짜 안 보이는데요.”


“아이씨, 야. 너 화상 통화 좀 걸어봐.”


이 말을 하고 진과장은 통화를 끊었다. 아니 화상 통화하고 싶으면 자기가 하지, 왜 나보고 하라는 거야. 나는 한숨을 쉬고 진과장에게 친절하게 화상 통화를 걸었다.


“네 과장님.”


“야, 니 얼굴은 됐고. 카메라 좀 돌려봐.”


아 진짜… 말하는 싸가지….


“…. 네 돌렸습니다.”


“책상 좀 비춰봐. 아니 거기 말고 왼쪽 거기”


진과장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전화기 너머로 그의 말을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회사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내 쪽을 잠깐 보다가 또 진과장 짓이겠거니 하며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일을 봤다. 


나는 진과장이 시키는 데로 핸드폰을 여기저기 비추면서 그의 책상 곳곳을 구경시켜줬다. 그러나 진과장이 말하는 명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책상 바닥까지 살펴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진과장은 다시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보아하니 오늘 미팅하는 곳의 명함인 것 같은데 왜 자기가 제대로 안 챙기고 나한테 저러나 싶었다. 그리고 중요하면 명함 사진을 찍어두던가 주소록에 전화번호를 저장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아침부터 고생하는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최주임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자리로 돌아갔다.


한 10분 정도 지나니까 진과장과 함께 출장을 간 이대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대리님. 명함 찾았어요. 진상이 앞주머니에 있었데요. ㅎㅎ”


그럼 그렇지. 이 망할 진상이. 나는 이대리에게 진과장이랑 있느라 고생이 많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쩌면 내가 갈 수도 있던 자리였는데 안 가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마 진과장은 이대리한테도 뭐라 뭐라 했었을 것이다. 자기 주머니에서 나오자 민망해진 진상이는 헛기침만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을 것이고. 물론 나도 진상이에게 아무런 메시지도 받지 못했다. 이제는 그냥 익숙하다.


오전 업무를 하고 있을 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회사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는데 점심을 먹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나는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으니 그곳에서 보자고 친구에게 말했다. 인기가 워낙 좋은 식당이라 아무래도 일찍 점심시간을 써야 할 것 같다. 오늘은 마침 무두절이니 별 눈치 보지 않고 일찍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최주임에게 혼자 나가서 먹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최주임은 어차피 오늘은 점심 안 먹고 낮잠이나 자려고 했다며 괜찮다고 했다. 괜히 나 때문에 밥을 안 먹는 것 같아 미안했다. 나는 그래도 밥은 챙겨 먹으라고 말하며 다른 팀원이나 동기랑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최주임은 정말 괜찮다고 했다. 흠…. 이따가 밥 먹고 들어오면서 빵이나 사 와서 먹여야겠다.


평소보다 일찍 점심을 먹으러 나간 나는 친구와 오랜만에 여유롭게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었다. 밥도 천천히 먹고 카페에서 축 늘어져서 잠시 쉬면서 친구와 시간을 보냈다. 나는 더 늦게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친구는 자기도 회사에 곧 복귀해야 한다며 먼저 일어났다. 친구를 보내고도 나는 10분 정도 더 카페에 있었다. 그리고 카페에서 나가기 전 최주임이 먹을 수 있을만한 빵과 커피를 사서 사무실로 복귀했다. 정말 자고 있었던 최주임은 내가 건넨 빵과 커피를 감사히 받으며 잘 먹겠다고 다음에 밥을 꼭 사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흔들며 내 자리로 돌아갔다. 


오후의 업무는 꽤나 바빴다. 오늘 꼭 해치워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렇게 여유롭게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했다. 누구 하나 일하는 도중에 쓸데없이 부르는 사람도 없었고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었다. 정말 평화로운 하루였다. 


“뭐 하고 있어? 나 미팅 끝났는데 5분 후 또 들어감. 살려줘 “


아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는 아내에게 힘내라고 말한 후 아내와 저녁에 같이 갈 식당을 검색했다. 파스타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괜찮은 식당을 찾던 나는 평가가 꽤나 좋은 곳을 골라 아내에게 저녁에 거기서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거기 정말 최악. 아 진짜 오빠 센스 최악이다. 내가 다른데 추천할게. 오빠 이 동네 모르잖아. “


미팅 들어간다더니 아내는 잘도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곧 아내가 추천한 식당 이름과 위치가 메시지로 도착했다. 슬쩍 보니 꽤나 괜찮은 곳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가 그 동네를 가장 잘 아니 신뢰가 가기도 했다. 나는 아내에게 “콜”이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일에 열중했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 다행히 다음 주 월요일에 보고드릴 내용들은 다 정리되었고 나는 오늘 칼퇴를 할 수 있었다. 나는 퇴근 시간이 지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했다. 최주임을 슬쩍 보니 아직 업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최주임에게 가서 “어서 정리하고 빨리 퇴근해, 오늘 금요일이잖아”라고 말했다. 최주임은 “금방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퇴근하시나요? 주말 잘 보내십시오”라고 인사를 했다. 나는 최주임의 어깨를 두드리고 근처의 다른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금요일 오후는 언제나 기분이 좋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아침에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늘이면 꽤나 괜찮은 하루였다. 다음 주 월요일이 되면 다시 북적북적한 사무실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테지만 그래도 오늘 기분은 아주 좋았다. 아주 가끔씩, 정기적으로 부장님이 휴가를 가셨으면 좋겠다. 기분 좋은 발걸음과 함께 나는 아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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